[백잔으로 표기한 영원한 앙숙, 고구려]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서 멸망함에 따라 그 지역을 고구려가 장악함으로써 백제와 영토를 접하게 되었고, 이 후 대결로 치닫는 양상을 보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 때부터 6세기 중반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제는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한반도의 서남부지역까지 세력을 미치게 되어 4세기 중엽이후에는 한반도 전체면적의 1/3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북쪽으로는 예성강까지 남으로는 노령산맥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편을 보면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고국원왕의 전사는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감정을 악화시켰고, 그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대왕의 훈적비문인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백제를 백잔(百殘)이라는 호칭으로 깎아내렸다.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악감정이 배어있는 호칭이다.
이후 양국간의 전투는 한층 격렬해졌다.
광개토왕릉 영락 6년조에 의하면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영락 6년(396) 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영락 10년조에는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능비문에서 신라와 임나는 그 국호를 당당히 표기하고 있으며 또 후연은 누대에 걸친 앙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에는 유독 백잔이라는 호칭과 함께 임금을 잔주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대왕은 아리수(阿利水:漢江)를 건너 백제의 도성인 한성을 함락시켜 아신왕으로부터 남녀 천여명과 세포 천필을 받고 또 그로부터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에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大臣) 18명을 데리고 개선하였는데 이때 58성 700촌락을 취하였다.
위 외에 비문의 전쟁기사는 5차례정도 나타나는데, 4차례의 전투가 백제를 겨냥했거나 백제와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었다.
4차례의 전쟁은 영락6년에 조공을 단절한 백제의 왕성공격, 영락 10년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호한 관계로 신라에 쳐들어온 왜를 격퇴하기 위한 출병, 영락 14년의 백제와 연계된 왜군과의 전투, 영락 17년에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동원한 백제와의 전투이다.
이들 전투는 전쟁과정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최대의 경쟁자로 간주했다는 사실과 비문의 일반적인 압승기록과는 달리 백제를 여전히 벅찬 상대임을 은연중에 표시하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서동요가 방영되고 있는 시기인 위덕왕 재위시의 백제는 웅천성까지 침공해왔던 고구려군대를 격퇴함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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