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가 받은 상방검의 의미]
역사적으로 볼 때 부월(큰 도끼와 작은 도끼)이나 도검의 사여는 하위자에 대한
상급자의 신표로서의성격이 강하였다.
주나라 왕실은 제후 임명시 대형의 궁시를 하사하였다.숭후호(崇侯虎)는 은나라의 주(紂)에게 서백을 모함하기를 "서백이 선과 덕을 쌓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는 마침내 서백을 가두었다. 굉요 등이 이 일을 걱정하여 여러 특산물들을 중의 총애를 받는 비중을 통해 주에게 바쳤다.
주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한 가지 물건 만으로도 서백을 석방시키기에 충분한데, 게다가 이토록 많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백을 사면 시키고 그에게 궁시와 부월을 하사하여 서백에게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북위에서는 고구려 안강왕에게 봉작을 내려주면서 의관과 칼을 보내주고 있다.
문무왕은 전공으로 칼과 창을 하사했다. 웅현정에 진군하여 머물면서 모든 총관과 대감을 모이게 하여 옹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베어 죽여 항복을 받았다. 싸움이 끝나고 전공에 따라 상을 주었는데, 각간이나 이찬 벼슬로 총관이 된 사람에게는 칼을 하사했으며,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로 총관이 된 사람에게는 창을 하사하였다. 백제왕은 호족들을 중앙권력체계에 넣고 복속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동진제 청자와 초두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교역물의 분여를 통해 권력 범위를 확대하고 또한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고대시대 왕들은 전쟁이 날 경우 장수에게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며 지휘권을 부여했다 선조는 도원수인 권율에게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하사하며 이르기를 “장수들 가운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로써 처결하라” 하였다. 또한 의병(義兵)의 여러 진은 모두 공의 통솔을 받도록 영을 내렸다. 서울의 적은 공이 있음을 근심하여 그 전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자 수만의 군사를 삼진(三陣)으로 나누어 이쪽 저쪽에서 공격했다. 공은 성벽을 견고하게 지키며 응하지 않다가 간혹 기병을 내어 적을 격파하였다. 5일이 지나자 적은 진영을 불사르며 퇴각하였고 경기(京畿)의 적들도 역시 군사를 거두어 서울로 들어갔다.
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에 청주에서 반란(反亂)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청주 인근의 사람 이인좌(李麟佐)로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권세를 잡고 소론이 밀려난 것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역도들은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을 죽이고 한양을 향하여 갈 때 조정에서는 병조(兵曹) 참판(參判) 오항명이 "임금께서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신이 청컨대 스스로 가서 역도를 죽여 없애겠습니다." 라고 하며 싸우기를 청해서 임금은 갑옷과 투구와 상방검(上房劍)을 하사하여 허락했다.
홍경래의 난을 토벌한 때도 순조가 양서순무사에게 임명된 이요헌에게 직접 상방검 한자루를 하사하였다. 일본열도를 대표하는 왜국왕으로서의 지위를 승인받는 지배복속관계의 성립속에서 야마다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위나라의 명제로부터 친위왜왕의 칭호와 함께 하사받은 물품으로 거울과 더불어 오척도라는 도검이 있었다.이처럼 부월과 도검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신임에 대한 표지로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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