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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 나타난 성왕의 최후

[일본서기에 나타난 성왕의 최후]


무녕왕의 아들로 즉위한 성왕은 삼국사기에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을 "하늘의 도리와 지리에 대해 신묘하게 통달한 왕"으로 성명왕(聖明王)이라고 부르며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고 있다.



성왕은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남부여로 개칭하고 부여에서 이어지는 역사적 법통을 분명히 밝혔다. 동성왕·무녕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강화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에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여 내분을 종식시키고 국정의 분위기를 일대 쇄신했다. 내부적으로는 천도와 맞물려 지방에는 방-군-성 체제를 시행하여 전면적인 지방지배를 단행하였다.

16관등제의 정비와 더불어 국왕을 축으로 하는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22개 관서를 설치했다. 국제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여 나갔다.534년과 541년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열반경 의소, 모시박사와 공장, 화사를 구해왔다. 이밖에 불교교단을 정비하는 한편 왜에 불교를 전파하여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성왕은 즉위년인 523년에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1만명의 군대를 보내어 격파하였고, 즉위 후 7년이 지난 529년에는 고구려의 안장왕(安臧王)이 거느린 군대를 3만군으로 막았으나 오곡의 싸움에서 2천여 명의 병사를 잃는 피해를 보기도 하고, 사비천도 후인 540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성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76년만의 한강유역회복이었다. 한강유역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가 있던 자리여서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백제가 강성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토양을 제공한 곳이었다.

551년에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가야군, 신라군과 함께 대대적 군대를 발동하였다. 특히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때 성왕의 태자인 부여창(위덕왕)이 백제·신라 연합군을 총지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죽령이북에서 고현이내에 이르는 10군을 점령함으로서 오랜 백제의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성왕의 고토 회복에 대한 기쁨도 잠시 진흥왕은 나제동맹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유역을 탈취하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하여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수복한 한강 하류 6개 군을 전광석화처럼 탈취해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金武力: 김유신의 조부)을 군정책임자인 군주로 임명한다.

이에 성왕은 신라에 대한 원한을 갖게 되었고, 그는 554년에 신라의 배신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태자를 선봉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케 하였다.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신라도 이에 맞서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관산성에서 일대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부여창이 오랫동안 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성왕은 격려차 군대를 이끌고 백제군진영으로 향하였다. 신라에서는 성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매복하여 생포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의 전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성왕이 출진하였다는 말을 들은 신라측에서는 말먹이꾼인 고도(苦道)에게 "그대는 비록 천한 종이지만성왕은 훌륭한 임금이다. 지금 천한 종이 훌륭한 임금을 살해하게 된다면 후세에 전하여져 입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부추겼다. 이 말에 고무된 고도가 분전하여 결국 성왕을 붙잡아왔다.

고도는 이때 임금에 대한 예우로서 성왕에게 두 번 절한 후 " 왕의 머리를 벨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성왕은 늠연한 자세로 "왕의 머리는 종의 손에 맡길 수 없다"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고도가 그 말을 받아 "우리나라 국법에는 맹세한 바를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종의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성왕은 체념하며 의자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풀어주면서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성왕은 비장한 어조로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고는 머리를 늘여 베임을 당하였다. 신라인들은 성왕의 시신 가운데 몸은 백제측에 돌려주고 머리는 북청(北聽)의 계단 밑에 묻었다고 한다. 위는 설화적인 요소가 많으나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왕이 보병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밤에 구천(狗川)을 통과하다가 신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 궁내성본(宮內省本) 삼국사기>편에 보기오천(步騎五千)이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기록이 더 타당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4인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인에 달하는 사졸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동성왕 이후 성왕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중심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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