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송

여덟 귀족가문

[무왕과 대치했던 여덟 귀족가문]

17회를 보면 금강유역에 기반을 둔 사씨, 연씨, 백씨 등의 귀족세력들이 연합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는 아좌태자가 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이 이른바 대성8족에 해당하는데, 그 당시 백제를 지배했던 귀족가문에 대해서알아보자.



백제의 귀족가문으로는 건국초부터 등장하는 해씨와 진씨가 있다.(이에 대해서는 “백제의 로열패밀리 해씨와 진씨”라는 제목으로 설명을 하였으니 참조바랍니다.)

또한목려라는 복성의 목씨가 있었다. 근초고왕대에 가야연맹과 깊은 관련을 맺었던 목라근자라는 인물이 있다. 구이신왕대에는 그의 아들이었던 목만치(木滿致)가 어린 구이신왕의 즉위를 기회로 권력을 농단했으며, 개로왕대의 목금이라는 인물을 거쳐 웅진성 천도에 큰 공을 세운 목려만치 또한 같은 가문이었다.


이처럼 실권귀족들의 권력장악으로 왕권이 미약해지자 개로왕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고구려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북위(北魏)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러나 그의 왕권 전제화정책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치고 밖으로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왕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웅진천도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백제가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금강유역에 기반을 둔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사씨, 백씨, 연씨, 국씨 등이 대표적이다. 사씨는 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 백씨는 공주, 연씨는 온양에 그 근거지를 정하고 있었다. 국씨 또한 좌평을 비롯한 요직에서 활약한 사실이 확인된다.

위에 나열한 가문들이 8대성에 해당된다. 사서에는 ?(협)씨를 8대성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득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려씨로 표기하고 있다. 그 밖에 백제의 씨성으로는 흑치씨를 비롯하여 곡나, 고이, 수미, 사마씨 뿐만 아니라 중국계씨성인 정씨, 왕씨, 고씨 등이 존재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씨성의 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씨성의 사용이 보편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웅진성도읍기에는 금강유역에 기반을 둔 다양한 가문이 조정의 요직에 등용됨으로써 귀족세력의 힘의 분산을 가져왔다. 사비성도읍기에는 왕권과 유착된 사씨 세력이 귀족가문을 평정했다.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대(554~598)에는 관산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귀족들의 발언권이 증대되어대성팔족이 성립되었다. 중국의 역사책인 『수서』 동이전에는 사, 연, 협, 해, 진, 목, 국, 백씨가 대성팔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덕왕대에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중심으로 한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운영의 핵심체가 6좌평제였다. 6좌평제는 왕명의 출납(出納), 재정, 의례, 왕궁 숙위, 형옥, 병마관제의 사무를 관장하는 최고의 귀족회의체였다. 6좌평의 부상은 이것이 당시 정치의 중추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실권귀족중심의 정치운영에 반발한 것이 무왕이었다. 무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고 익산(益山)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여 왕궁과 제석사(帝釋寺)를 세우고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익산경영으로 알려진 무왕(600~641)은 귀족들의 견제를 벗어나고자 복신이나 계백, 흑치상지 등의 걸출한 인물을 등용하여 귀족에 대한 지지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해씨, 진씨, 목씨같은 대성팔족 중 일부 성씨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점, 왕효린 같은 왕씨가 신흥세력으로 갑자기 좌평에 오르는 점 ,무왕 2년에 해씨 세력들이 전쟁에 나타난 기록이 있으나 그 뒤에 기록이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무왕이 법왕의 잔존 세력들을 척결하여 왕권을 강화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위 이듬해에 이른바 대성팔족으로 생각되는 고명지인 40여명을 귀양 보낸 바 있는 의자왕은 17년에 41명에 달하는 왕서자(王庶子)들을 대거 좌평으로 임명하여 좌평직을 독점하고 있던 대성팔족을 무력화시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