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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무쇠솥

[기루의 무쇠솥]- 사랑의 증표

삼국은 철제농기구를 사용하고 우경(牛耕)을 실시하여, 벼농사 위주의 농업을 경제의 근간으로 삼았으나 벼농사와 동시에 쌀을 익혀 밥을 먹은 것은 아니다. 밥을 지을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 제법 길었다.


농업초기에는 낟알을 불에 달군 갈돌(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를 만드는데 사용)에서 볶아 껍질을 날리고 부수어 미숫가루형 음식을 만들고, 낟알을 갈돌에 부수어 반죽해서 동물의 기름으로 지져서 떡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곡물을 토기에 담아 죽을 끓인 것으로 보이고, 시루를 쓰면서부터 찐밥과 떡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유물을 보면 삼국시대에 시루가 많이 등장한다.


솥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낙랑 9호 고분에서 돌로 만든 솥이 발견됨에 따라 훨씬 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음식을 끓이는 데 쓰는 그릇으로 다리가 없는 철복과 토기제품 솥을 써오다가 다리가 있는 정(鼎)을 썼으며, 쌀을 끓이고 익히다 뜸을 들이기에 좋은 무쇠 솥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때가 삼국시대 즈음이었다.



4세기 무렵에 무쇠솥이 고안되어 시루에 찌는 방식이 아니라 솥에서 끓여서 뜸을 들이는 방식으로 밥을 짓게 되었다. 4∼5세기에 성립된 경주 천마총에서 청동기 쇠붙이 외에 무쇠솥과 대량의 판장쇠(鐵鋌)가 출토 되었다. 삼국시대후기에는 중농정책으로 인해 미곡을 위시하여 곡물이 증산되어 비축되고, 장, 절임, 포(脯)와 같은 발효식품의 기술이 정착되어 상비 관습이 이루어지고, 그 외에 구이, 찜, 나물과 같은 음식이 식품생산을 배경으로 보급된다.

특히 무쇠솥이 일반화되어서 쌀에 물을 붓고 끓여 뜸을 들이는 밥짓기가 일반화된다. 삼국사기 신문왕 683년 조에 보면 왕이 부인을 맞아 납채를 하는 품목에 쌀, 술, 기름, 꿀, 장, 메주, 포와 더불어 해가 포함되어 있다. 구리나 쇠로 만든 쟁개비(오늘날의 냄비에 해당함), 숯불에 밖아 놓고 앉은 자리에서 전골을 끓이는 무쇠로 만든 전골냄비도 있었다.

삼국유사“眞淨師孝善美”에, 진정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으나 평소의 밥을 짓는 용구로 무쇠솥이 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진정은 신라의 명승 의상의 제자로 7세기의 사람이다. 7세기에 이르면 백성에게도 무쇠솥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열전도율이 낮아 강한 열을 받아도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뜨거워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달구어지면 쉽게 식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마솥은 부뚜막 밑에서 장작불을 세게 때면 그 열을 머금고 있다가 솥 안의 재료에 조금씩 전달하여 음식물을 속속들이 익혀준다. 또 한번 완성된 밥을 오랫동안 식지 않게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따뜻한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유익하고 소중한 조리기구로 인식되어 왔다.


황산벌 싸움에서 이긴 왕건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개태사에는 무쇠솥이 남아 있다. 한번에 500 명분의 밥을 지었다는 무쇠솥은 지름 3m, 높이 1m에 둘레가 9.3m나 되는 이 솥은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린 영물이라 해서 농민들이 기우제를 올리고 복을 비는 대상이 되고 있다. 큰 용량만큼이나 사연도 많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435년 왜구들이 부산까지 반출해갔다가 솥에서 울려 나오는 큰 소리 때문에 놔두고 가는등 우여곡절을 거친후 개태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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