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2008. 3. 6. 우기동교수(경희대)정리
. 책제목 : 희망의 인문학
. 저자 : 얼 쇼리스 지음 / 고병헌 옯김
. 출판 : 이매진 / 2006년11월
. 가격 : 16,000원
1. 클레멘트 코스
1995년 미국의 작가 겸 사회평론가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죄수, 마약중독자,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Clemente Course>를 창설했고, 이후 미국 여러 지역(바드 대학, 시카고 대학 등)으로 확산되었다. 1997년에는 UNDP의 협력을 얻어 멕시코 마야족이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2년간 지속).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문화를 다시 일깨우기 위한 과정도 운영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수업’은 현재 6개국(미국, 캐나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호주, 한국)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얼 쇼리스의 인문학 교육과정은 ‘가난에 관한 이론’에 근거를 두고서 ‘클레멘트 코스’로 실행이 되었다. 빈곤 발생은 게임과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게임에는 본래 ‘평등의 손실’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 참가자들은 동등하게 시작해서 동등하지 않은 상태로 끝이 난다. 다시 말해 게임은 참가자들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탓이 큰 것으로 보이는데, 자연 안에서는 동등한 존재로 출발했지만 사회 안에서는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결말이 난다.
이렇게 발생한 빈곤은 사회 구조적으로 수많은 무력의 포위망에 둘러싸여 있다. 타인의 시선(지적 폭력, 미디어, 인종차별 등), 소외, 가정폭력, 질병, 마약, 범죄, 굶주림 등 사회 조직의 파편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탈출의 희망을 잃을 정도의 거대한 포위망을 인식하게 되면, 자포자기하게 되고 생각할 능력을 상실하며 운명 앞에 굴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는 저항심마저 증발해 버린다.
얼 쇼리스는 고대 희랍철학(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와 대화’의 관계에 근거하여, 정치적 삶을 일깨울 필요성을 제기한다. 정치적 삶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적 삶은 곧 행동하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 또는 중용이다. 그리고 대화는 정치적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나아가 인문학은 정치 행위를 하기 위한 준비인 것이다. (클레멘트 코스는 서양 중세의 페트라르카가 정의한 ‘인문학의 르네상스 사상’에 기초하고 있고, 그래서 도덕철학, 문학, 예술사, 역사, 논리학이라는 분류 체계에 따른다.)
소외계층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다. 인문학 학습이 그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公的 세계’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인문학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소위 ‘위험’한 사람들로 변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갖게 해준다.
2. 국내의 소외계층 인문학 강좌
한국에서는 클레멘트 코스를 벤치마킹하여 <성공회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에서 2005년 9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을 개설하였다. 사회 시스템에 정상적으로 적응했거나 노력하게 된 1기 수료생 13명을, 2007년에는 2기 수료생 12명을 배출하였고, 최근 3기를 마쳤다.
그리고 <경기광역자활후견센터>(수원), <관악 일터나눔 자활후견기관>(난곡), 제주 서귀포 지역 등에서 2006년 7월부터 인문학 과정이 개설되어, 사회의 ‘소외계층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2006년 9월에는 노원구 중계동 임대아파트 9단지(지역주민 대상)에서 인문학 과정이 문을 열어 ‘지역주민 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1)
소외계층 인문학 교육과정의 졸업생 대부분은 직장(자활기관 후견의 사회적 서비스업-간병, 청소, 원예, 재활용사업장 등), 지역, 생활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발돋움의 계기를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부 졸업생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싹이 보이고 있는 사회적 기업 혹은 생활 공동체적 사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노원구 중계동의 졸업생들은 자활지원과 무관한 순수한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에, 다른 기관에 비해 빠르게 어우러지면서 지역 공동체, 생활 공동체 운동의 계기를 고민하고 있는 단계이다.
2007년 9월 초에는 새터민 청소년(영등포구 당산동)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교도소 재소자,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도 몇몇 곳에서 진행 중이다. 2008년에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대학 및 교육기관들이 전국적으로 20~30여 곳 이상에서 개설할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 강좌 졸업생들이 연계강좌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심화 과정을 고민하고 있다.2)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외계층 중심의 인문학 강좌는 최초의 모델이 되었던 <클레멘트 코스>와는 그 궤를 달리 한다. 클레멘트 코스가 ‘가난과 인문학’을 중심에 놓고 있다면, 우리의 경우는 ‘대학과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인문학의 상황(혹은 인문학의 위기)과 맞물리면서 연구와 사회적 교육의 단절이 중요한 반성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3. 왜 인문학인가?
‘사람은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 - 나는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참으로 오래된 물음들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정신없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너무도 진부한 이야기들이고, 어쩌면 사치스럽고 한가한 허영이고 망상일지 모른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물음들은 일생 동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문득문득 떠오르거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예외는 없다. 우리 ‘영혼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써 외면하거나 덮어버린다. 사회적 통념의 가치를 추구하며 그냥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영혼의 물음에 대한 근원적 고민이 오로지 이해관계만을 쫓아가는 현재의 삶의 방식을 부정할 것만 같다. 두렵고 고통스럽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듯이 자기합리화만이 두려움과 고통을 망각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이처럼 영혼의 물음을 항상 전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개인에 따라서는 어떤 계기에 의해 다양한 각종의 공부법과 기도법으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삶의 방식을 고민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통속적인 물질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관계에 들어서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영혼의 물음을 내팽개친다. 앞 다투어 자기 것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거의 집단 최면 상태에 가깝다. 맹목적이다. 오히려 통속적인 사회적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노심초사하고 더 발버둥친다.
하지만 우리는 영혼의 물음을 정면으로 끌어안고 진지한 ‘사회적 고민’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싹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통념의 가치, 즉 부와 권력과 명예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해 볼 도리 없이 거대한 자본주의적 거래질서에서 주변화된 삶이거나 일탈된 인생이지만, 그래서 사회적 약자 혹은 소외계층의 사람들이라 불리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영혼의 물음과 소리를 순수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을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영혼의 물음을 항상 전면적으로 기꺼이 고민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상품 거래의 수數가 낮거나 그 거래의 실패로 인해 이른바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현실 처지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사회적 통념의 가치에 대해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그래서 상대적으로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여러 통속적 조건에서의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감의 결핍 혹은 상실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존재의 소리에 목말라 하고 영혼의 물음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줄 안다.
인문학은 다음 세 가지 역할(혹은 영역)의 연관성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첫째, 인문학의 순수 연구 활동이다. 인문학 각 분야의 이론 연구와 작품 활동을 의미한다. 둘째, 인문학의 응용 연구 활동이다. 문화(모든 문화 혹은 문화적 표현은 인간 삶의 가치와 그 고민을 다루기 때문), 민주주의의 실질화, 시민사회의 윤리 등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셋째, 인문학과 현실 사회의 합리적ㆍ실천적 결합에 관한 일이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이 현실 사회에서 꽃피울 수 있는 실천적인 활동을 전면화해야 한다.
우리의 논의는 세 번째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삶이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우리의 삶의 과정은 그 자체로 소중한 사상이며 이념이고,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도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인 우리, 우리인 나’라는 공동체적 의식을 갖는다. 이것이 인문학의 핵심인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을 매개로 한 만남은 교육자든 피교육자든 주체의식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이런 인문정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이 더불어 어우러지는 삶의 모둠판 속에서 빛과 향기를 발한다. 이 삶의 모둠판에는 좌초하고 분노하며 환멸을 느끼면서 욕망과 꿈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열정에 가득 찬 행위들이 있다. 그래서 갈등과 대립이 있다.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것은 서로의 생각과 의견에 다름이 있음이요, 생각과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똑같이 인정하고 평가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화와 소통과 만남을 통해 하나의 삶의 모둠판에서 어우러지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삶의 현장은 개인들의 다양성의 가치가 인정되고 단절 없는 소통이 이루어지며 공동체 의식을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다. 인문학을 통한 만남도 이런 것이며 또한 이런 것이어야 한다.
4. 인문학 교육의 필요성
주체의식의 자각은 개인적 깨침으로 가능하고 종교적 귀의를 통해서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 혹은 옹골찬 노력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굳이 인문정신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인류의 다양한 역사적 축적물이 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은 세상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한,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항상 밑바탕에 깔려 있게 된다. 인문정신은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다시 회복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문학 교육과정은 함께 진지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이런 인문정신을 서로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자각된 주체의식도 영롱한 삶의 사상도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경제적 물질적 욕망과 이해관계 속에서 일관되게 정신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소외계층의 인문학 교육과정은 사회 시스템에서의 소외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경제주체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인문정신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만남이어야 한다. 이것이 소외계층의 인문학 교육의 의미이다.
소외계층은 자의든 아니든 사회 시스템에서의 일탈 혹은 주변화로 인해 체념에 가까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주체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통념의 가치에 내몰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체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통념의 가치에 따르게 되면 돈과 지위만을 추구하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면서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되고, 그래서 통념의 가치를 추구하고 획득하는 데에 걸림돌이 나타나면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여기에는 정신적 가치가 자리할 곳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인문정신이 오염되고 상실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가치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인문정신의 상실은 자연스레 사회적 윤리의식의 부재로 나타난다. 일용직 근로자의 쉼터, 노숙인의 쉼터 등의 건립을 반대3)하는 우리의 사회적 의식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고 있다. 그 기저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비인문정신적 통념의 가치와 논리가 고착화되어 있다.
물질적 가치와 이기주의적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교육의 측면에서나 가치의 측면에서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개인의 능력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사회와는 분명히 거리가 멀다. 국가 윤리나 국민 윤리가 아닌 시민사회의 윤리가 부재하고 실종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강하게 지켜 왔던 인문정신이 와해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인문학 교육과정은 유행도 아니요, 특정 계층에 국한된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은 물, 공기와 동일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정신적 사회적 가치다. 물과 공기가 오염되면 정수기와 여과기를 거치듯이, 인문정신이 오염되면 인문학적 교육과정을 거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닐까.
여기서 인문학적 교육과정은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교육행위나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 구성원들 상호간에 교육적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아직도 우리는 오염된 물과 공기를 들이키고 있으면서 오염된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오염되어 있지 않다고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문학 교육을 통한 인문정신 공유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교육과정은 제도교육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평생교육임이어야 한다.
인문학 교육과정은 소외계층의 경제적 자활, 생활 및 지역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또 다른 현실적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물질의 현실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물질의 고유가치는 인문정신의 토대 위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물질의 가치는 풍요로움이나 부와 같은 경제논리에 의해서만 재단될 수 없다. 물질은 문화적 삶의 바탕이 될 때, 훨씬 아름다운 빛을 발휘한다.
최근 우리 사회도 삶의 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삶의 질은 건강한 욕망과 인문정신에 기초한 합리적인 사회관계를 수반해야 향상될 수 있다. 인문학 교육과정은 주체의식에 의한 주관적 행복상태를 자각시킨다는 측면에서 교육복지의 의미도 또한 지니고 있다.
5. 마무리
“경제적 지원이 급한 사람들일 텐데, 인문학이 의미가 있습니까?” 3년 전부터 소외계층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앞으로도 수없이 받을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 분들 인격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답하고 있다.
좀 많이 배우고, 좀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돈만 보태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의식으로 고착화되어 있다. ‘사람은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를 근원적으로 고민하는 인문학자들조차도 돈과 권력과 명예와 같은 사회적 통념의 가치 앞에 한없이 허물어지는 사회에서 당연한 의식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소외계층 인문학 강의를 시작할 때, 혹시 일종의 지적 문화적 사치로 끝나버리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똑같다.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으며,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 때문에 괜히 주눅들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정신적 가치에 대해 다만 진지하게 체계적으로 정리된 형태의 고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철학의 주제라는 핑계로 그들과 삶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릴 적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이 놈아, 내가 살아온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권은 족히 될 거야”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니 놈은 한 권도 안 돼, 그렇게 편하게 공부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리고 살아’라는 훈계를 담아 자식들 야단치시던 소리를 새삼 듣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살아온 역정을 어렵사리 한 쪽 정도 써 와서 부끄럽게 읽어 내려가는 순박함, 시 몇 줄 써 놓고 즐거워 하는 천진함, ‘교수님, 철학 주제를 가지고 우리 이야기를 하고 그걸 교수님과 함께 정리하니까 결국 우리가 살아온 삶이 철학이네요.’라고 하는 당당함. 소외계층들과 함께 한 인문학 강좌에서 공통으로 느낀 희망의 모습이고 목소리들이다.
물론 일반적인 교육 행위가 그러하듯이 개인 차이나 적극성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다. 교육 과정에 연관되어 드러나는 경제적 자활의 문제, 즉 공동의 일거리 혹은 사회적 기업 등을 통한 안정적인 일자리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인문학 교육 과정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교육 과정을 통해 어떤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의 삶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인문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정의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단순한 기능 교육과 교양 교육을 넘어서서 삶의 가치와 주체성을 확립하는 인문학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당당한 요구이고 정당한 권리이다.
1) 수원지역에서는 2007년 1월 12명, 2008년 2월 20명을, 제주 서귀포 지역에서는 16명의 졸업생이, 노원지역에서는 2007년 2월 20명, 2008년 15명의 졸업생이 나왔고, 관악지역은 2007년 7월초 17명, 2008년 3월초 2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 관악 지역에서는 특강 형식의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또 한글반, 독서반, 영어반, 어린이 공부방, 청소년 교육반 등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3) 우범지역이 될 것이라고 해서 송파구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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