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
ㅇ 저자 : 코너 오클리어리 지음 | 이순영 옮김
ㅇ 출판사 : 도서출판 물푸레
ㅇ 페이지 : 452p
ㅇ 가격 : 15,000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 단풍드는 날> 中
■ 생의 절정에 선 존재
≪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를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시(詩)다. 작년 가을, 교보문고 외벽에 이 시 구절이 담긴 거대한 현수막이 내걸릴 때만 해도 그저 아름답게 물든 단풍만을 연상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를 대하는 순간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생의 절정에 선’ 존재는 나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척 피니(Chuck Feeney)의 삶이었다.
1988년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는 척 피니를 미국 갑부 순위 23위에 올렸다. 당시 <포브스>가 추정한 피니의 재산은 13억 달러. 이는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당시 피니는 면세 소매점 DFS(Duty Free Shoppers)를 통해 전 세계 국제공항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일본의 100억 달러 관광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이 바로 DFS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포브스>가 놓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피니가 자선단체 애틀랜틱재단을 만들어 재산 전부를 기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기부 사실을 병적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숨겼다. 기부는 익명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기부를 받는 사람들도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부를 받는 사람이 재단이나 피니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고, 그 내용을 공개하면 더 이상 기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그가 세운 건물에는 간판이나 이름이 없었다. 성대한 만찬도, 거창한 명예 학위 수여식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니 자신은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다. 15달러짜리 플라스틱 카시오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으며 항공기는 이코노미 클래스만 고집했다. 기부 사실이 알려졌을 때 뉴저지주 뉴어크의 <스타 렛지> 신문은 그런 그를 가리켜 “거물의 시계는 값싼 것일지 모르지만 기부하는 그의 마음은 순금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 면세사업에 눈 뜨다
척 피니는 1931년 미국 뉴저지주 타운십 엘모라 마을의 가난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험회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피니의 어머니 매들린은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사려 깊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당시 피니가 살고 있던 마을에 루게릭병을 앓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뉴욕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매일 힘들게 정류장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피니의 어머니는 그 시간에 어디 가는 척 하면서 그를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피니는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일에 재능을 보였다. 열 살 때 집집마다 다니면서 크리스마스카드를 팔았고, 집배원을 도와 편치 부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눈이 오면 친구와 함께 이웃 사람들의 차고 앞 눈을 치워주며 돈을 벌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주말이면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했고, 여름이면 해변 산책로에서 비치 타월과 파라솔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 통 안에 들어가서 얼굴만 내밀고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에 공을 던지게 해 한 번에 몇 센트씩 벌기도 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1948년 그는 미 공군에 지원했다. 당시만 해도 징병제가 남아있었으므로 피니는 언제든 해야 할 일이라면 미리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그는 텍사스 랙클랜드 공군기지에서 무선통신 훈련을 받은 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점령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피니는 여가 시간 대부분을 일본어 배우는데 할애했다. 1952년 제대한 피니는 코넬 대학 호텔경영대학에 지원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기업가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코넬대학이 있던 이타카에는 웬디스도 맥도날드도 없었다. 이 점을 간파한 피니는 기숙사 주변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는 큰 주머니가 달린 낡은 야전 재킷을 입고 바구니에 샌드위치를 가득 담은 다음 기숙사 바깥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자기가 왔음을 알렸다.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일주일에 평균 700개의 샌드위치를 팔았다.
1956년 피니는 호텔경영 학사 학위를 받고 코넬대학을 졸업했다. 호텔 체인점 여러 곳에서 일자리를 제의해 왔지만 피니는 거절했다. 그는 하루빨리 세상을 구경하며 기업가의 길을 가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피니는 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맨해튼 5번가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 프랑스 대학교육이 무료라는 사실을 안 그는 즉각 값이 싼 쿠나드 여객선 표를 끊어 파리로 향했다. 소르본대학에서 한 달 짜리 프랑스어 집중코스를 마친 후 그르노블과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대학들에 편지를 써 입학 가능 여부를 알아보았다. 며칠 후 그는 무작정 그르노블 정치학부 학장을 찾아갔다. 학장은 피니를 만나주지 않았다. 피니는 그가 자신을 만나줄 때까지 비서를 귀찮게 하며 업무를 방해했다. 마침내 비서는 화를 내며 말했다.
“학장님이 만나시겠답니다.”
자신의 방에서 피니를 맞은 학장이 말했다.
“학생은 그르노블대학에 편지를 보내 스트라스부르대학의 정치학부에 입학하고 싶다고 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피니가 지원서를 바꿔 넣었던 것이다. 피니는 얼른 맞받아쳤다.
“그렇군요. 하지만 분명 저는 이곳에 있고 제가 입학하고 싶은 학교는 여기입니다. 스트라스부르로 가고 싶었다면 제가 지금 그르노블에 있지 않겠죠.”
피니는 그르노블대학 정치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여덟 달 과정을 끝낸 후 피니는 프랑스 남부 빌프랑슈로 갔다. 그곳은 200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탄 미 6함대의 기함 역할을 하는 중순함양인 살렘의 모항이었다. 거기서 그는 미 해군이 귀국할 때 면세 술을 다섯 병까지 사서 비휴대 수화물로 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에서 같은 양을 사려면 30달러가 넘게 들지만 유럽에서 면세로 구입하면 배송료까지 합해도 10달러면 충분했다. 지중해의 미 6함대에는 50척의 배가 있었고 해군은 1년에 세 번씩 교체됐다. 사병들의 저축액도 꽤 많았다. 피니가 면세사업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그는 6함대가 이동하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병사들로부터 주문을 받아왔다. 코넬대학 동문인 밥 밀러를 만나면서 그의 면세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향수에서 옷, 심지어 자동차까지 취급품목을 넓혀 나갔다. 주문과 돈이 쌓여갔다.
■ 듀티 프리 쇼퍼즈와의 운명적 만남
어느 날 피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화려하고 색깔도 선명한 카탈로그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제네바 론 거리에 있는 듀티 프리 쇼퍼즈(Duty Free Shoppers)가 만든 것이었다. 이 카탈로그에는 향수와 시계, 캐시미어 등 고급 제품이 미국 소매가격의 절반 정도로 싸게 나와 있었다. 피니는 크리스마스 쇼핑객들 사이를 뚫고 론 거리에 있는 그 주소로 찾아갔다.
듀디 프리 쇼퍼즈는 나폴리에 주둔해 있던 미 해병대 교환장교 스튜어트 데이먼이 외국에 나와 있는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면세물건을 팔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는 동업자 해리 아들러와 투자자들로부터 9만 5000달러를 모은 후 제네바에 사무실을 열고는 50만장의 카탈로그를 인쇄해 돌렸다. 하지만 주문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데이먼은 결국 중간에 물러났고 아들러는 3700달러의 빚과 1700달러어치의 향수 재고품을 떠안은 채 회사를 정리 중이었다. 아들러는 바로 그때 피니를 만났다. 직감적으로 돈이 될 것이라 판단했던 피니는 듀티 프리 쇼퍼즈를 사들였다.
피니가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하와이였다. 1965년 피니가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공항 면세점을 찾았을 때만 해도 그곳은 노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면적이 10평방미터도 채 되지 않았고, 1m 조금 넘는 계산대 세 개는 스카치테이프로 한데 묶여 있었다. 하지만 피니는 하와이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일본이 1964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해외여행 금지조치를 해제하면서 일본인 관광객들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료 보충을 위해 비행기가 하와이에 착륙할 때면 면세점은 고객들로 북적댔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들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거나 값이 비싼 외국 사치품들을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구입했다. 그들은 주로 고급 술과 향수, 시계, 펜, 보석, 가죽제품 등을 원했다.
호놀룰루 국제공항 면세점을 찾는 일본인들 수가 점점 늘어나자 피니는 일본어 새벽반에 등록해 군복무 시절 배웠던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다시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본인 손님들을 일본말로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인들은 면세가격에 놀라워했다. 일본은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펴면서 수입 꼬냑과 위스키에 220%의 세금을 부과했다. 도쿄에서 소매가격이 25달러인 위스키 한 병이 면세점에서는 6달러에 불과했다. 1년쯤 지나면서 물방울 정도 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시냇물 수준으로 많아지더니 나중에는 강물 수준으로 증가했다. 상황이 순조롭게 풀려 가는데 자신감을 얻은 피니는 1967년 독점적 면세점 허가를 3년 더 연장하기 위해 100만 달러의 입찰가를 지불했다.
호놀룰루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피니는 홍콩 카이탁공항터미널에도 듀티 프리 쇼퍼즈를 열었다. 홍콩은 도쿄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서구풍의 상점들, 2층 버스, 영어 도로 표지판들이 있었다. 외국에서의 경험과 저가의 물건을 원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홍콩은 아시아 모든 국가들 중 최고의 장소였다. 하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공항 면세점에도 1964년 이후 일본인 관광객이 밀려들었다. 듀티 프리 쇼퍼즈의 1평방미터당 판매량은 얼마 안 가 런던 해러즈백화점의 50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매장 이름이 문제가 됐다. 경쟁자들은 ‘듀티 프리’ 즉 면세점이라는 이름이 모든 물건을 일반 상점보다 싸게 판다는 인상을 준다며 분개했다. 피니는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DFS라는 이니셜만 사용하기로 했다.
1969년 DFS는 알래스카 앵커리지공항에서도 면세상품을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현금이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하와이와 홍콩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본토로도 향하고 있었다. 보잉 747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계는 지구촌이 되어갔다. 앵커리지는 북극을 지나 동아시아를 오고 가는 비행기들이 연료 보충을 위해 착륙하는 곳이었다. 연료를 보충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그 소박한 터미널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알래스카매장은 문을 열자마자 호황을 누렸다. 비행기가 알래스카공항에 도착하면 승객들은 터미널로 밀려와 면세점의 낮은 가격에 비명을 지르면서 정신없이 쇼핑을 했다.
피니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본인들이 갈만한 여행지로 태평양의 섬, 괌을 주목했다. 그는 미국 문화와 쾌적하고 따뜻한 날씨, 산호초가 있는 그곳이 일본의 마이애미비치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예상했던 대로 일본인 관광객들은 괌으로 몰려들었고 DFS는 여기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피니는 다시 면적이 괌의 5분의 1정도 되고 일본 쪽으로 320km 정도 더 가까이 있는 사이판에 관심을 가졌다. 사이판에는 공항조차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괌보다 더 훌륭한 해변이 있었고 서쪽 해안을 따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호초들이 있었다. 피니는 사이판 정부 당국을 찾아가 공항과 활주로 비용을 부담할 테니 사이판에서 20년 동안 면세점을 운영할 수 있는 허가를 달라고 제안했다. DFS가 500만 달러를 투자한 공항은 1976년 문을 열었다. 거기서 DFS는 면세점, 선물가게, 커피점 등을 운영했으며 나중에는 네 군데의 호텔 상점과 시내 매장도 열었다. 얼마 안 가 한 해에 10만 명의 관광객들이 그 섬을 찾았고 그 중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이 시기에 DFS는 캐나다의 토론토공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공항과 오클랜드공항에 면세점을 열었고,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상점을 열었다. 월스트리트가 후퇴하던 때에 DFS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1968년에서 1974년 사이 월스트리트의 평균 주식은 70% 하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DFS 배당금은 1년에 몇 백%씩 올라갔다. 피니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 갔다.
■ 실패한 노력도 노력이다
피니가 꼭 성공적인 판단만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노력도 노력이다”고 잘라 말한다. 실패에서 배울 점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피니는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성공에 자극받아 또 하나의 결정을 했다. 파리에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면세점을 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결정 때문에 피니는 그의 표현대로 ‘완전한 붕괴’를 경험했다. 파리로 가는 일본인 관광단체가 앵커리지나 홍콩을 통과할 때, 그곳 매장 지배인들이 관광객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수집해 파리로 보내면 파리의 DFS는 관광객들을 매장에서 유인해 파리 제품을 사게 하겠다고 계획했다. 하지만 그는 파리의 쟁쟁한 경쟁 상점들과 대리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얼마 못가 결국 매장 문을 닫아야 했다.
초기의 다른 사업들도 실패했다. 면세상점을 갖춘 타히티의 쇼핑몰은 경제적으로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고, 피니가 1979년 중국에 갔다가 베이징에서 본 ‘여행자들을 위한 대형 프렌드십 스토어’를 흉내 내 하와이에서 문을 연 차이나 임포트 스토어도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결국 3년 후 400만 달러를 손해보고 그 상점을 닫았다.
가장 큰 판단착오는 하와이 매장과 관련한 것이었다. 1986년에 이르자 DFS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류소매상이 되어 1년에 2억 5000만 달러의 판매액을 기록했다. 전 세계 열두 개의 국제공항에서 40개의 매장을 운영하면서 수수료만도 연간 1억 8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이렇게 되자 매장의 입찰 경쟁이 치열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 동안 하와이매장 운영 입찰은 그 정점을 이루었다. DFS에게 하와이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와이의 작은 매장에서 판매액이 연간 4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0.1제곱미터당 총 수입이 2만 달러라는 얘기로 뉴욕에 있는 블루밍데일에서 1년에 0.1제곱미터당 800달러의 수입을 거두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피니는 11억 5100만 달러에 입찰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전 세계 면세점 입찰액 중 가장 높은 가격이었다. 진짜 지폐로 쌓으면 높이가 115km가 넘는 액수였다. 이 입찰에는 진짜 라이벌이 있었다. 서울의 롯데호텔이었다. 롯데호텔은 서울에 쇼핑단지와 면세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입찰액은 3억 7200만 달러였다. 결국 DFS가 7억 7900만 달러를 더 썼다는 얘기였다.
■ 사고를 통해 기부의 삶 결심
피니 가족은 부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고급 승용차와 화려한 보트를 사고, 운전기사와 일하는 사람들을 고용했다. 호화 모임에 참석하고 파티도 열었다. 피니의 부인 다니엘은 보석과 골동품을 사들였고 아파트를 온갖 장식품과 아름다운 물건들로 장식했다. 피니는 재산도 마구 불려나갔다. 택시를 타고 꽉 막힌 맨해튼 55번가에 서 있다가 연립주택이 매매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고 나이가 지긋한 건물 주인이 돈이 궁하다며 간청했을 때에는 도로에 나란히 있는 건물 두 채를 주택용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또 파리 교외에 집 한 채, 호놀룰루 외곽의 해변에 빌라를 샀고 맨해튼에 아파트를 빌렸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끝난 후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다가 갑작스럽게 저택을 하나 사서 오랫동안 가족 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식의 삶,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고향에서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삶에서 너무 멀어진 삶에 대해,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배했던 검소함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피니의 삶은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서 전기를 맞는다. 피니는 조깅하는 것을 좋아해 1979년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 풀코스에 도전했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42km 코스와 높은 기온은 피니의 힘에 부쳤다. 결승선 근처까지 와서 그는 갑자기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이상하게 달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쓰러졌다. 쇼크로 인해 몸이 딱딱하게 굳은 피니는 팔에 링거를 맞으며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어렴풋이 죽음을 경험한 그날의 사건으로 피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어떻게 써야할 지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DFS지분과 사업체, 그리고 투자금 등 자신의 모든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 몫의 돈과 가족의 집은 남겨둘 생각이었다.
1982년 3월 1일, 그는 500만 달러의 자금을 가지고 자선단체인 애틀랜틱재단을 정식 설립했다. 재단은 전 세계의 가난과 고통을 줄이고, 교육을 증진하며, 건강과 같은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어린이와 젊은이와 노인을 돕고, 국제적인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표를 선언했다. 그리고 1984년 11월 23일, 피니는 마침내 자신의 전 재산을 재단에 넘겼다. 금액은 정확히 산정하기 어려웠다. DFS가 사적인 다국적기업인데다 피니가 소유한 지분의 가치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해 피니의 지분 가치는 2억 3600만 달러였다. 하지만 만일 DFS가 주식시장에 상장됐다면 그 가치는 아마도 5억 달러 이상이었을 것이다.
■ 익명의 시간이 끝나다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DFS는 어려움을 겪는다. 피니가 받는 배당금은 곤두박질쳤고, DFS는 매장 수수료로 지급하는 1억 300만 달러를 2년간 연기하는 문제를 갖고 하와이 당국과 논의해야 했다. 면세사업의 침체로 애틀랜틱재단은 커다란 난관에 직면했다. 기부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이 일은 기부를 받는 사람들과 재단 사람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었다. 애틀랜틱재단은 기부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탁회사에서 6000만 달러의 신용대출을 받아야 했다.
걸프전이 끝나자 관광사업은 곧 회복됐다. DFS에서 받는 애틀랜틱재단의 현금 배당액도 1993년 5700만 달러, 1994년에는 1억 2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하지만 기부약속을 어기는 고통스런 경험을 했던 피니는 회사 지분을 매각해 좀 더 확실한 자선사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싶었다. 피니는 DFS를 팔기로 결심했다.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고 연 매출액이 60억 달러에 달하는 루이뷔통 모엣 헤네시가 반응을 보여 왔다. 루이뷔통 모엣 헤네시 아르노 사장은 전 세계 180개 매장을 가진 DFS를 인수할 때 생길 잠재적 상승효과를 기대했다. 피니는 1996년 12월 자신이 갖고 있던 DFS 지분 38.75%를 16억 2750만 달러에 아르노에게 팔았다. 물론 그 돈은 모두 애틀랜틱재단으로 들어갔다. 지분매각 과정에서는 동업자들 간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혔다. 그리고 이는 결국 법정문제로까지 비화됐다.
DFS 매각 후 피니는 2600만 달러를 면세점에 장기 근무한 2400명의 직원들에게 보냈다. 여기에 동업자인 알란 파커가 가세해 1350만 달러를 보탰다. 동봉한 편지에서 피니는 ‘우리의 선의와 존경과 감사를 전하기 위한 선물’로 그 돈을 보낸다고 말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직원들은 피니와 파커 앞으로 수백 통의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호놀룰루의 생산관리 책임자는 직원들이 봉투를 열었을 때 어땠는지 설명해 주었다.
“여기저기서 기쁨의 탄성이 터졌고, 어떤 직원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흥분해서 주저앉는 직원도 있었어요. 그처럼 너그러운 선물을 받고 모두들 감격한 거죠.”
피니가 DFS 지분을 매각했다는 것은 ‘익명의 시간’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언제든 법정에 제출한 서류가 언론을 통해 공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절차에 따라 공개하지 않을 경우 재단의 돈이 부정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1997년 1월, 마침내 피니는 비행기 엔진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샌프란시스코의 공항에서 <뉴욕타임즈>에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자신이 한 기부 내역을 밝혔다. 다음날 신문에는 피니의 기부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뉴욕타임즈>의 보도로 피니의 자선활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화젯거리가 됐다. 텔레비전과 신문, 잡지에서는 이 비밀 기부자에 대해 앞다퉈 보도했다. 피니가 그동안 워낙 알려지지 않았던 탓에 어떤 방송에서는 피니 대신 다른 사람의 사진을 내보내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피니는 단순히 기금만을 지원하지 않았다. 기금을 지원받은 곳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중간에서 도왔다. 피니는 ‘우리가 그들을 도우면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남아프리카, 베트남의 대학총장, 학자, 과학자들은 서로 협력하고 도우라는 피니의 재촉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피니는 또한 기부할 때 다른 기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아일랜드의 교육을 위해 7500만 아일랜드 파운드(미 달러로 1억 2500만 달러)를 내어 놓을 때 피니는 아일랜드 정부도 똑같은 금액을 지원하도록 요구했다. 이렇게 확보한 1억 5000만 아일랜드 파운드는 새로운 실험실, 컴퓨터와 학습장비, 도서관 등을 확보하는데 쓰였다. 덕분에 아일랜드에는 46개 연구소와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연구 능력이 세계적 수준으로 향상됐으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들의 해외 유출 현상도 사라졌다. 그 일은 재단이 어떻게 정부와 협력하고 정부와 함께 정책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모델이 됐다.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사회 변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삶
완벽할 것 같은 피니의 삶도 알고 보면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아주 근사한 저택 몇 채를 샀지만 거기에서 살려고 하지는 않았다. 검소하게 살지만 이따금씩 5성급 리조트에 머물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담배소매업을 했지만 담배 피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사치품을 팔았지만 절대 루이뷔통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고가의 소비재들을 팔아 재산을 모았지만 소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를 싫어한다. 하지만 피니의 삶에서 가장 큰 모순이라고 하면 돈에 대한 그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피니는 돈 버는 것을 좋아했지만 돈을 소유하지는 않았다.
“내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내가 자랄 때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사람은 그가 자라 온 방식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어느 정도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열심히 일했지만 부자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늘 살피셨습니다.”
피니의 자녀들은 수십억 달러의 재산을 물려받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살아가면서 부족하지 않게 쓸 수 있는 돈’을 마련해 놓았고, 그들의 어머니도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근사한 집에서 살고 세계 여행을 하면서 살 수 있으니 행운아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 말이 맞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진짜 행운아인 이유는 그런 부모님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피니는 25년 간 40억 달러를 기부했다. 앞으로도 4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10년 동안 기부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루에 100만 달러를 써야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65세가 넘어서 기부를 시작하는 것은 버거운 일입니다. 기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기부를 하고 싶다면 살아 있는 동안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을 때가지 기다리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큰 즐거움도 맛볼 수 있습니다.”
김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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