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이의 귀걸이, 이제 뿌리를 뽑자]
18회를 보면 은진이가 자기가 도안하여 올린 귀걸이를 여자기술사가 자기의 도안인양 베껴서 이를 발견한 은진이가 두개를 비교하면서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
참 이쁘게 디자인을 했죠. 이 기회에 백제의 귀걸이에 대해서 뿌리를 뽑도록 하자.
■ 耳飾
수하식(드리개)은 심엽형(속잎꼴형), 추형(저울모양), 산치자형(산치자나무의 열매형), 구체등이 있다. 백제이식은 모두 세환고리이며 형태상으로 보면 단순히 세환만으로 된 것과 세환에 보다 화려하게 중간식, 수하식이 연결된 것 두 종류가 있다. 재질로는 금제와 금동제가 있으며 각지의 고분에서 발견된다. 그 특징은 중간에 구형의 중간식과 원판형 혹은 길죽한 심엽형, 수하식이 드리워지는 것이 특징이다.
■ 시대별 특징
백제의 귀걸이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양식을 충실히 따르며, 중심고리가 얇은 것이 특징으로 도읍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 한성도읍기
한성도읍기의 이식으로는 성루 석촌동 85-화장유구, 천안 용원리 44.호분, 원주 법천리 차령산맥 이북지역에서만 한정되어 출토되고 있다. 당시의 수도였던 서울 석촌동 3호분 동쪽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목된다. 2호 토광묘 출토 귀고리, 화장유구 출토 귀고리 등이다. 이것들의 형태는 원형심에 금제파이프를 씌운 세환이식으로 보고되고 있다.
세환이식은 재질로 볼 때 금제, 은제, 그리고 금동제가 쓰였는데 백제지역을 포함하여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석촌동 3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금제수식은 작은 고리에 사슬형 중간연결식, 심엽형 드리개가 달리 형태이다. 원래는 주환, 중간식, 수하식(드리개)으로 구성되었으나 주환 세환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보이는 사슬형 연결법은 삼국시대에 장식 연결방법으로 두루 쓰였다.
2. 웅진도읍기
웅진도읍기의 이식은 매우 화려하며 신라. 가야. 왜의 이식과 형태 및 제작기법이 유사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보인다. 웅진도읍기의 이식은 공주 송산리 6호분, 무령왕릉, 익산 입점리 1호묘 출토품 등이 있다. 재질은 금이 많으며 제작기법이 앞시기 보다 더욱 복잡하고 화려해진다. 주목되는 이식의 하나는 천안 용원리 금제이식, 익산 입점리 금제이식 등이다.
천안 용원리 44호분 출토 금제이식은 주환, 중간식과 수식으로 되어 있다. (아래그림 참조)
주환은 금봉을 꼬아서 만든 독특한 형태이다. 중간식은 반구형장식을 접합하여 중공의 구슬로 만든 것으로 여기에 금사를 꿰어 주환에 연결하고, 이 금사에 4단의 사슬을 걸어 수하식을 달았다. 수하식은 원형금판으로 각목문 테두리를 붙였다. 이러한 중간식과 각목문 테두리의 접합방법은 상당히 발달된 제작기법으로서 당시의 기술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익산 입점리 1호분 출토 금제이식은 금동제 세환에 중간식을 금선(金線)을 걸어 자체 몸에 감은 것으로 백제의 독특한 금봉, 금선 연결방법의 하나인데 그 반대쪽은 고리를 지어 사슬형 고리를 연결하였다. 수하식은 타형형판 3개를 3방향으로 접합시킨 3익형이다. 이러한 사슬형 고리 연결방법은 석촌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어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그림] 천안 용원리 44호분 출토 금제이식
백제의 이식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무령왕릉의 출토물이다. 왕의 이식은 세환의 주환에 2줄의 수하식을 달았다. 중간식 연결구 표면에 누금세공으로 금선과금립으로 문양을 낸 것이 돋보인다.
한편 수하식은 모엽과 자엽을 장방형으로 투공하고 여기에 판형의 중간식 고리를 꿰어 연결하였다. 이 이식은 누금세공과 같은 화려한 금공기술이 발휘된 점 이외에도 금빛과 어울리게 옥빛 곡옥을 달아 장식성을 높인 점도 백제의 미적감각을 보여주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왕비의 이식은 2쌍이 발견되었는데, 큰 것과 작은 것의 형태가 다르다.
큰 것은 고리에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길고 짧은 2줄의 수식(垂飾)을 달았다. 긴 수식은 4개씩의 원형 영락이 금사슬에 7단으로 연결되었고, 맨 끝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원형 영락을 단 아래에 탄환 모양의 수하식(垂下飾)이 달려 있는데, 이는 신라유적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다. 짧은 줄의 수식은 긴 줄의 것과 같은 수법으로, 탄환 모양의 장식 대신 잎사귀꼴의 영락과 담록색의 구옥(球玉)이 달려 있고, 그 아래에는 사익형(四翼形)의 초실형(草實形) 수식에 작은 돌기가 나 있다.
무령왕의 이식은 중간식의 제작방법과 모양이 경주 황오리34호나 일본 웅본현 강전선산고분 이식과 유사하며, 무령왕비의 이식은 합천 옥전 M11호묘나 일본 자하현 압도하산고분 이식과 매우 유사하므로 이 시기 백제의 대왜 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3. 사비도읍기
사비도읍기의 이식은 부여 능산리 귀족묘 32호와 49(금), 관북리 왕궁지(은지금장), 염창리옹관묘(금동)출토품이 있다. 능산리 귀족묘 출토품만 금제이고 나머지는 금동과 은지금장이다. 이들 이식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간식과 상하연결금구를 함께 주조한 것으로써 사비기에 새롭게 나타난 제작방법이다.
이는 또한 고구려 귀고리의 가장 큰 특징인 고리 아래의 유환과 공구체의 중간식, 그리고 원추형 드리개의 연결을 땜질한 것과 같은 기법이어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귀걸이는 백제, 신라의 귀걸이에 비해 장식이 많지 않고 양식이 매우 단순하다.
고분을 발굴할 때마다 출토되는 황금 귀걸이는 정교함과 화려함에서 미감과 공예기술이 한껏 드러난 작품이다. 그러나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들이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했다. 지배층은 자신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려고 귀걸이를 착용하였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시각적으로 구별 지우려고 귀걸이나 금관 등 금빛 찬란한 장신구를 만들어 착용하였던 것이다. 황금장신구의 사용에는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금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팔찌는 왕족뿐 만이 아니라 귀족들도 소유할 수 있었지만, 금으로 만든 관이나 허리띠는 왕과 왕의 일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귀걸이로 남녀를 구별해보자
유물을 통하여 남녀의 성별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큰칼을 왼쪽 허리춤에 차고, 가는고리 귀걸이를 귀에 매달면 남성의 무덤이고, 실을 뽑는데 이용하는 방추차(紡錘車)를 소유하거나 귀에 굵은고리 귀걸이를 매달고 있으면 대부분 여성의 무덤이다. 고대에는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귀걸이를 착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 증명하듯이 백제시대에는 남자도 귀걸이를 하였으며, 여인들의 하트(♡)모양의 귀걸이가 많이 달렸느냐, 적느냐에서 신분의 상하를 가늠하였다고 한다
■ 유행에 민감한 귀걸이
삼국시대 각국은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다양한 기호에 맞는 독특한 디자인과 제작기법을 구사하면서 화려한 황금문화를 꽃피운다. 서로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면서도 귀걸이를 비롯한 각종물품의 제작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때문에 삼국시대 귀걸이를 비롯한 장신구는 매우 국제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 유사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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