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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기에 나오는 도안 해설

[백제신기에 나오는 도안 해설]


20회를 보면 하늘재의 박사학위를 태학사가 인정해 준 덕택에 기루가 백제신기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생겨 혼자 조용히 사본을 베끼고 있다.

이 때 나오는 도안 중에 백제지역에서만 출토되는 중요한 유물이 있으며, 화면에 보이는 그림은 삼족 청동솥인데, 이것의 모태가 된 삼족토기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옆의 뾰족한 것은 무쇠도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하여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 개요


기원전 3세기 중후반 무렵에 등장하는 백제토기는 2~5cm가량 굽다리가 달려있는 고배(굽다리 접시), 직구단경호라 부르는 것으로서 짧고 곧은 목에 공모양의 둥근 형태의 몸체를 가진 항아리, 그리고 그와 거의 같은 모양이지만 어깨가 더욱 넓으면서 아래쪽으로 갈수록 그 폭이 점차 줄어든 모양을 한 직구광견호, 삼족기라 부르는 것으로서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접시 또는 쟁반모양의 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백제의 국가 성립기에 등장하는 그러한 일련의 새로운 그릇형태들은 서진대를 중심으로 한 시기에 널리 유행하던 것들과 매우 흡사한 점이 주목된다.

국가성립기에 활발하였던 조공관련기록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 삼족기


삼족기는 접시 혹은 반 형태의 토기 바닥에 다리가 셋 달린 토기류를 말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토기는 오로지 백제토기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마치 백제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중요한 기종이다.

삼족토기는 경기북부지역에서부터 서울의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등지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최근 왜계 유물이 출토된 광주 명화동의 전방후원분에서도 반출되었다.

그 기원은 당시 유행하던 진대의 청동제 삼족반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육조(六朝)문화의 영향으로 발생된 것으로 여겨지며, 다리의 모양도 중국 청동기의 동물다리모양장식에서 점차 바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육조의 영향은 부분적이나마 5세기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며, 금강 이남지역에서는 가야토기의 영향도 보인다.

족기(세발토기)는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크게 나누기도 한다. 무개삼족기(무뚜껑식)가 더 오래된 것으로, 입이 크고 둥근바닥[圓底]으로 되어 있어 그릇 깊이가 깊다. 유개삼족기(뚜껑식)는 바닥이 편평하고 그릇 깊이가 얕다. 몸통의 뚜껑받이[蓋受]는 똑바로 세워진 것과 안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있는데, 어느 것에나 뚜껑을 받치는 도드라진 단이 있다. 뚜껑에는 꼭지가 달려 있는데 원형꼭지와 보주형꼭지가 있다. 출토지나 토기의 모양으로 볼 때 의례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질로 된 회청색과 회백색이 많으며 낮은 용기에 원형·각형의 3족이 붙은 것이다. 각형은 3족을 6각이나 7각으로 잘라낸 것으로 끝은 뾰족하다. 직립구연에 뚜껑받이가 있고 꼭지로는 굽모양과 단추모양 등이 있다.

삼족기는 구경이 크고 몸체가 盤(반)처럼 생긴 이른바 반형삼족기와 구경이 작고 몸체가 고배의 것과 같은 배형삼족기로 대별된다. 반형삼족기는 유개와 무개 모두 한성기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만 성행된데 비해 배형삼족기에 있어서는 무개는 한성기말 또는 웅진기초기까지 이어지고, 유개배형삼족기는 한성기 이후 사비기까지 계속된다. 삼족기는 이처럼 한성기에 등장한 이래 백제의 영역변화에 발맞추어 중서부지역, 금강 이남의 전북지역,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전남지역까지 확산된다. 삼족기는 한성기 동안에선 모두 생활유적에서만 출토되지만 대체로 5세기후반 이후가 되면 금강유역을 비롯한 중서부 이남에서는 뚜껑이 있는 세발토기는 주로 껴묻꺼리로 많이 출토되고 있어 무덤의 부장품으로 널리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삼족기의 공간적 분포범위는 곧 당시의 백제의 영역으로 보여도 좋을 정도여서 백제사 이해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

고대중국에서 세 발로 만든 청동 솥은 원래 천자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후로 청동 솥은 제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신성한 제물로 여겨져 오고 있다

아래의 사진은 경남 창녕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유물 중의 하나로, 발이 세개 달린 청동으로 만든 솥이다. 원래 정(鼎)은 중국에서 춘추시대 이전부터 음식물을 끓여 먹는 자비기(煮沸器)의 일종으로 사용되다가 제사용기(祭祀容器)로 변용되었으며 후에는 높은 신분의 무덤에서 신분의 상징으로 부장되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신라(新羅) 적석목곽묘(積石木관墓)와 기타 지역의 대형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한다.





■ 무쇠도끼


철기의 출현은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 도끼는 철기의 등장과 함께 가장 먼저 들어오고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연모의 하나다.

기원전 3세기 경에 이르러 여러 유적지에서 쇠로 만든 도끼, 낫, 도끼, 끈 칼, 화살촉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철제 농공구의 다양한 제도와 보급은 생산기술의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논밭을 갈고 농작물을 가꾸고 거두는 일이 몇 배나 빠르고 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철기는 고대인에게 있어서 부와 힘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철기는 거의 모두 무쇠제품이었다. 쇠를 달궈 두드려서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고 거푸집에 녹은 쇳물을 부어낸 것들이었다.

약 10개의 철기유적들이 평안도지방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 평북용연동과 세죽리는 많은 철기들이 출토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철기는 무쇠, 시우쇠, 강철의 세종류가 있다. 세죽리 유적에서는 3개가 다 발견되었다. 화살촉은 규소가 흔적만 남고 망간이 함유된 순철조직으로 시우쇠였고, 도끼는 탄소, 규소, 망간, 납, 황이 함유된 무쇠였고, 탄소공구강에 해당하는 0.7%의 탄소가 함유된 강철도끼도 있었다.

철기의 틀인 거푸집은 돌거푸집이 대부분이다. 그것들은 한쪽만 파고 다른 한 쪽 면에는 평평한 돌을 대 녹은 쇳물을 부어내도록 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시베리아의 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독특한 형식의 무쇠도끼들은 같은 규격의 돌거푸집을 사용, 대량으로 만들어낸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도와 검의 차이

도와 검의 그림은 “[6회] 도와 검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설명을 하였으니 그 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림해설: 맨밑의 그림이 장이가 발명한 한날검인 "도"이고 위의 것이 양날검인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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