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공주의 가슴꾸미개]
가슴꾸미개를 비롯하여 신라 귀족여인들의 옷차림과 악세사리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 새날개장식
순금의 고깔모자에 꽂은 새날개장식은 고구려 무용총벽화에 나오는 사냥하는 무사들이 달고 있던 새깃털 보다 크고 화려하다. 새는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조상신으로 여기는 토템이다. 기원전 8~3세기 스키타이, 북아시아 흉노족의 모자에 달린 금제 새장식은 신라 서봉총의 금제모자에 달린 새와 일맥상통한다. 북아시아사람들은 여인이 높은 나무 밑에서 자식을 빌며,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으면 아들을 잉태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태어난 인물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데, 그가 죽으면 새가 그 생명을 하늘나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이다.[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라고도 한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 아우가 된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며 눌지왕의 딸이다.
지증왕의 어머니가 조생부인(새가 낳은 부인)이란 이름을 가졌을 정도로 새를 중시했다.
서봉총 북분의 금관과 함께 발견된 금제 십자형 모자를 보면 위쪽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 금관
금관의 장식은 숲속의 나뭇가지, 거기에 달린 비취옥과 금장식은 나무 열매와 나뭇잎처럼 보인다. 또 양쪽으로 숲이 서린 사슴장식은 만들어 달기도 했다. 금관은 숲속의 사슴과 나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슴과 나무는 북아시아 유목민에게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새와 나무 사슴에 대한 신앙은 몽골초원에서 만주와 신라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천마총 금관은 일반적인 신라의 금관과 마찬가지로 관의 표면에는 300개의 비취, 57개의 곡옥(곱은 옥)이 금실에 달려 있다. 관장식은 2점으로 나비형과 새날개 형이다. 곡옥과 달개가 가득 달려 있는 넓은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 뿔 장식을 접합했다.그 관테에는 상하 가장자리에 2줄의 점열무늬와 파상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파상무늬 사이사이에 원권무늬가 찍혀 있다.
순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은 모두 단분이다. 그러나 쌍분인 서봉총과 황남대총의 금관은 모두 북분에서만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은 '부인대'라는 명문으로 보아 그 주인공이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왕이 아닌 사람이나 여인들도 금관을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한편, 고대사회의 남녀평등사상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 신라의 허리띠
한편 천마총에서 출토된 은제 띠드리개의 끝에 붙은 장방형 장식판에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띠드리게에서와 마찬가지로 용이 새겨져 있어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진골귀족의 말 수레와 말안장을 금, 은, 옥으로 장식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로 신라인의 황금사랑은 화려한 장신구문화를 낳고 금세공기술의 발달을 자극했다.
■ 정장을 한 여인
신라시대 여왕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금관, 대, 이식, 경식 등을 모아 당시의 복식 착용 모습을 그려보았을 때, 금관을 쓴 다음 허리띠를 매고 가슴꾸미개와 귀걸이(이식), 목걸이(경식), 팔찌를 했다. 저고리, 바지, 치마를 입고 그 위에 겉옷으로 두루마기(포)를 입었다.
포의 바탕에는 신라시대 기와 모양을 이용하여 화려한 문양을 표현하였으며, 옷의 가장자리에 짙은 선을 넓게 둘러주었다. 특히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7.5cm의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 다른 금관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인다.
■ 복식의 변천
수서와 북사의 동이전 신라조에는 의복은 대개 고구려, 백제와 같은데 복색은 소를 숭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자는 바지 저고리를 주로 입고 내상과 표상을 걸치고 그 안에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신라의 28대 진덕여왕 2년에 김춘추로 하여금 당나라 현종에게 의복을 청하여 당나라의 의복제도를 따르고자 하였다. 문무왕 4년에는 부녀자에게도 교서를 내려 중국 부녀자의 의상을 입게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남녀 의복이 중국과 비슷해졌다.
통일신라시대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단의, 표상이라고 하는 상하의(上下衣)를 착용하였으며, 여기에 표를 두르거나 표의를 입었다. ‘표’는 지금의 숄과 같이 어깨에 걸쳐 입던 것으로, 일반 여성들은 두를 수 없었지만 4두품 여성까지는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왕비의 표는 금실, 은실이나 실크로드의 여러 지역에서 수입한 청호반(靑湖畔)새 깃털, 공작새 깃털로 수놓아 장식할 정도로 호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