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들은 왜 춤을 추고 다녔을까]
20회를 보면 선화공주가 화살에 맞은 김도함을 놔둔 채 백제인을 살리려고 추적을 저지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화랑들이 세를 규합하여 국왕에게 표를 올려 선화공주의 자결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겁 없는 10대 화랑들이라지만 국왕에게 이런 요구를 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런 일사분란함이 나오는 이유는 단체로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면서 수련과 춤을 병행하여 팀웍을 기른 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화랑들이 왜 춤을 추고 다녔는지, 그리고 그를 통한 공동체적 의리를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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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화랑은 신라의 청년조직, 군사조직, 그리고 관료양성수단이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자 중에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이라 했다. 이 가운데 설원랑을 국선으로 삼으니 이것이 곧 화랑국선의 시작이다. 국선은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이며 화랑은 수백에서 수천의 낭도를 거느렸다. 이들은 전시에는 바로 군사조직으로 활용되었으며 그 가운데 능력있는 자는 벼슬을 받았다.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바 있다.
■ 군사훈련이었던 춤과 노래
춤과 노래는 단순한 여흥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산천의 신령스러운 기운과 교감하는 일종의 종교행위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화랑은 예로부터 성역으로 전해오는 특별한 곳을 찾아서 수련을 했다. 그리고 춤과 노래는 용기를 기르기 위한 고대의 군사훈련이기도 했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와 춤은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세계관 형성에 놀이가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풍류도라는 신라 고유의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한다고 하여, 자유스러움과 호방함을 보여주는 선풍(仙風)과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포괄하여 이루어진 풍류도가 화랑의 기풍과 정신세계의 한 바탕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무리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되었다고 해도 신라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습속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신라청년들에게 불어 넣어주고 신라의인재로 길러내는 독특한 제도가 화랑도인 것이다. 화랑도에는 다른 낭도들과 함께 수련을 쌓는 승려낭도도 있었다.
국보 147호인 울산 천전리서석(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소재)에 『戌年永郞成業』(영랑은 술년(戌年)에 성업(成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랑이 신라산천을 주유하고, 명승과 절경을 구경하며 유람하는 유상(遊賞)을 했는데 울산 천전리 서석으로 돌아와 성업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천전리 일대가 화랑들의 수련장소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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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군은 대사 구문의 아들로 궁전의 관리가 되었다. 진평왕 49년 서력 627년) 8월에 서리가 내리어 곡식을 해치고,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형편이었다. 이 때 궁중의 관리들이 공모하고 창고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다.
검군만이 홀로 이를 받지 않으니, 관리들은 "모두 곡식을 받는데, 그대만 홀로 이를 물리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적다고 느낀다면 더 주겠네" 라고 말하였다.
검군은 웃으며, "나는 근랑(화랑의 이름)의 문도에 이름을 두고 풍월을 수행하는데, 진실로 의가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네"라고 하였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하며, "오늘 이후에는 다시 서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여러 관리들은 술을 내어 사죄하는 체하면서 검군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검군은 알면서도 스스로 먹고 그만 죽었다.
검군은 불의에 대한 미움을 가졌으나 동료관리들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국가의 공권력보다는 동료간의 의리를 더 소중히 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고발하지 않고 죽어간 것이다. 그가 지키려 했던 공동체적 의리는 화랑도의 소중한 원천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사들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사도정신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바꾸어 놓은 이러한 공동체적 의리가 화랑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유학
공자의 초상이 있는 곳에 수련을 마친 화랑도들이 옷을 갈아입고 제례를 올린다.
국학에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을 모신 것은 성덕왕 16년의 일이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성덕왕의 아들인 김수충이 717년 공자와 10철(哲) 및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쳐 국학에 안치하였다. 불교수양과 화랑수련을 거친 화랑이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국학에 입학하여 한문학실력을 길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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