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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에 밭에 못 나가니 밀린 일이 많다. 감자 캔 자리에 들깨모도 내야 하고, 꽃대가 올라 온 채마밭 정리도 급하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 뽑는 일도 만만치 않다. 빈 자리에 열무씨를 뿌리려고 하는데, 땅이 질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며칠 장맛비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비 오는 날은 입이 궁금하다 서울에서 아들이 왔다. TV 앞을 떠나지 않는 폼이 심심한 모양이다. 나도 드러누워 책을 뒤적이는데 졸음만 온다.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무력해진다. 비 오는 날, 사람들은 활동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이고 추억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입이 궁금하면 뭔가 색다른 음식을 찾게 된다. 점심때가 되어 아내가 반가운 제의를 한다. "칼국수 할까요?" "좋지! 그런데 수제비가 더 간단하지 않아?" "그거나 마찬가지죠." "부추 넣어 부침개도!" 아내가 갑자기 부산을 떨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졸지에 칙칙한 집안분위기가 금세 반전되는 것 같다. 수제비는 핵산이 풍부한 조갯살과 찰떡궁합이고, 부침개도 해물이 있어야 한다며 차 시동을 건다. "당신은 밭에 나가 이것저것 준비해. 부추랑 호박이랑 알았지? 풋고추도 몇 개 따고."
피망도 따고, 풋고추도 땄다. 모를 부은 들깨의 어린 순도 뜯었다. 호박밭을 한참 뒤지니까 애호박 하나가 눈에 띈다. 수제비와 부침개에는 감자가 들어가야 집에 들어온 아내가 토실토실한 감자 몇 개를 꺼냈다. 감자를 갈아서 수제비와 부침개 재료로 쓸 모양이다. 감자가 들어가야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린 올해 감자농사를 지어 재미를 보았다. 돈이 되지는 않았지만 수월찮은 수확을 하였기 때문이다. 씨감자 두 박스에서 40여 박스를 거두었다. 그런데 감자값이 너무 헐해 일하는 데 신이 나지 않았다. 씨알이 굵은 감자에 가격까지 좋으면 힘이 덜 들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 먹을 것을 남기고, 이웃과 친지들에게 죄다 선물로 보냈다. 다행이 받는 사람들이 소중하고 귀한 것을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해줘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아내는 내년에는 저장성이 떨어지는 감자보단 고구마를 많이 심자고 한다. 처음으로 자주색 토종감자를 심었는데 오히려 그것을 늘려 심으면 좋을 듯싶다. 자주감자는 쪘을 때 포실포실한 맛이 더하는 것 같았다. 비록 값은 싸지만, 아내는 감자를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쪄서 간식으로 먹고, 반찬으로도 많이 사용한다. 밥맛이 없을 때는 찐 감자 몇 개로 식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오늘은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와 부침개를 선뵐 모양이다. 장마철에 수제비와 부침개를 먹는 맛! 아내와 함께 음식을 만드는 일은 즐겁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부엌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 남자가 여자 일하는데 부엌에 들락거리면 푼수 짓이라고 말리셨다. 장모님도 내가 부엌에 들어가면 손사래를 치고, 오히려 아내를 혼내셨다. 지금은 만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음식을 할 땐 내가 조수 역할을 한다. 맛을 내는 결정적인 일은 아내 몫이고, 나는 옆에서 거드는 편이다. 가끔은 수선을 피워 뒷전으로 내몰리기도 하는데, 대개는 아내도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야채를 썰고, 감자를 가는 아내의 손놀림이 민첩하다. 여러 해 살림해 본 솜씨가 발휘되는 것 같다. 모든 준비가 끝나갈 무렵 아내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칼국수보다 수제비가 왜 좋아?" "손맛이 있잖아. 눅눅한 장마철에 먹으면 제격이고." 사실 수제비는 손맛이다. 음식 맛이 손맛이라지만 수제비는 더하는 것 같다. 아내가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우려낸다. 거기다 나박나박 썬 감자를 넣고 끓인다. 국물이 끓는 동안 아내는 야채를 모아 부침개 준비에 여념이 없다. 풋고추와 피망, 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부추, 들깻잎과 함께 버무려 밑간을 한다. 감자 간 것에 채 썬 오징어와 야채 모둠을 넣고 반죽을 한다. 다시마국물이 끓어오르자 수제비를 떼 넣을 차례이다. 다시마를 건져내고 둘이서 부산 나게 널찍널찍 펴서 수제비를 넣었다. 얼마 가지 않아 부르르 건더기가 떠오른다. 조갯살과 다진 파를 얹어 한소끔 끓이고, 고명으로 다시마를 채 썰어 올리니 수제비가 완성이다.
수제비와 부침개 한 장이 상 위에 차려졌다. 빗줄기도 멈췄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 하지 않은 아들 녀석도 입에 음식 들어가는 속도가 빠르다. 수제비의 쫀득쫀득한 맛이 시원한 국물에 감칠맛을 더한 것 같다. 오징어가 씹히는 부침개의 맛도 그만이다.
내 물음에 아내가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하는 데 그럴 듯하다. "비가 오면 딱히 할 일도 없고, 입이 궁금하던 차에 별식으로 밀가루 음식을 곧잘 해먹었죠. 그 때 먹었던 일들이 비와 연상되어 입맛이 당기는 게 아닐까? 부침개 부칠 때 소리도 빗소리와 비슷하고. 또, 밀가루 음식은 전해질을 보충해주는 효과가 있어서 장마철 늘어지는 몸을 빨리 회복시켜 주는 의미도 있다고 하대요." 하기야 예전엔 입이 궁금하면 콩이라도 볶아먹으며 무료함을 달랬지 않았는가? 수제비에다 부침개까지 먹으니 속이 든든하다. 책을 다시 들었다. 맛난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정신이 맑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