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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2)] 여운형,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3·1절을 맞아 그동안 좌파 또는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에게 건국훈장 중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냉전시대에는 ‘사회주의자에게 건국훈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훈장이 주어지지 않았다가 탈냉전의 정서에 맞추어 상훈이 결정된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처음은 아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도 1995년 국민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이전에는 혁혁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사회주의 인사의 경우, 1945년 광복 전에 사망한 경우에만 훈장을 추서했는데 2005년 이후에는 광복 이후에 돌아가신 분까지 확장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표창 대상은 아니었다. 일제 때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인사 중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한 분에게만 상훈이 주어졌는데, 정부 수립 시기에도 공산·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적극 활동하거나,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사는 제외됐다. 몽양의 2등급 대통령장 추서에 대해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며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 소련군 관계자들과 만나는 몽양 여운형(오른쪽)

여운형의 정치노선을 어떤 일관된 사상에 입각하여 규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07~1919년은 부르주아적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1920~1932년은 사회주의자로서 애국계몽적 논리를 포섭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33년부터 1943년까지는 역시 부르주아적이며 개량적인 계몽주의가 두드러지는 시기였고, 1944년 이후부터 1947년 암살당하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해방 직후 건국 과정을 논할 때 좌익을 배제하고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우남 이승만도 처음에는 좌익을 무시하지 못했다. 좌익과 우익이 분립된 상황에서 이를 통합하려고 시도한 정치가 중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이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이었다. 여운형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결성하여 우익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우익 인사 중 민세 안재홍 외에는 참여하지 않아 부분적인 통합에 그쳤다. 그러나 지방의 건준 지부는 좌우통합 진용으로 출발했으며 지역 인민위원회로 전환된 이후에도 좌우통합이 완전히 무너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중앙에서는 이미 1945년 9월부터 우익의 ‘임정(臨政) 봉대론’과 좌익의 ‘인공(人共) 수립론’으로 대립되었지만 지방에서는 1946년 1월 찬·반탁 논쟁 이후부터 좌우 대립 구도가 형성된 지역이 많았다. 물론 지방 소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들어가면 6·25전쟁 때야 비로소 좌우익간의 구별이 확연해진 지역도 있었다. 그것은 우익의 지역적 기반이 그렇게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특히 지역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며 대중과 영합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광복 직후 힘의 공백기에는 건준이 사실상의 정부로서 기능했으므로 몽양의 건국노선이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1946년 1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계기로 점화된 찬·반탁 논쟁 이후에는 찬탁도 아니고 반탁도 아닌 중간노선을 걷게 되면서 좌우 양쪽으로부터 사시 어린 시선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타협적 노선이 좌우 양익의 제휴 대상이 되었던 면도 있었지만 이미 확실한 입장을 가진 정파에 의한 파쟁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몽양의 건국노선은 힘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운형의 타협적 태도는 1946년 봄 미·소 공동위원회(약칭 공위) 휴회 이후 잠시 빛을 발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같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했다. 좌우합작은 공위가 휴회된 상황에서 좌우익간의 대립을 지양하고자 마련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좌우익이 통합되기보다 좌우익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중간파만의 결집에 그쳤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 1945년 8월 16일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 교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환영하는 학생들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1차 회담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을 통해 제시했던 ‘합작5원칙’을 7월 26일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삼상회의 결정의 전면적 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등 우익 진영과 미군정에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항을 고수하면서 7월 25일 이후 회의에 불참했다.

▲ 여운형은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경성축구단 선수뿐 아니라 야구선수로도 활동했다.

이에 우익 측은 7월 29일 좌익이 불참하여 좌우합작 2차 회담이 열리지 못하자 언론에 8원칙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우익의 반동성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좌우의 대립 속에서 여운형은 8월 12일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삼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1946년 10월 4일 김규식의 집에서 좌우 대표들은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을 조정하여 통일원칙인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했다. 여운형은 10월 6일 인민당 확대위원회에서 합작 7원칙을 보고하고 승인 받았다. 이에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 7일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으나 이미 7월 말부터 조선공산당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9월 초부터는 박헌영, 이강국 등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이 내려져 참여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우익 정당의 중심 한국민주당마저 10월 8일 원세훈 등 당대표들이 타협한 안을 승인하지 않는 등 좌우 양익의 실세들이 이탈해 버려 중간좌파와 중간우파만의 합작으로 귀결되었다.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운형의 사회주의 이념은 박헌영의 그것처럼 투쟁적이며 배타적이지 않았다. 여운형의 이념은 좌우합작 운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좌우통합적이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몽양을 만났던 레닌은 여운형에게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는데 몽양은 이를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몽양은 ‘착취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몽양은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도왔지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유물론(唯物論)을 뼛 속 깊숙이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폭력혁명에도 반대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7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던 경험과 신앙이 그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비(非)공산주의자였다.

외국과의 관계 측면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은 거의 유일한 좌익 정치가였다. 당시 소련은 정부 수립과정에서 우익 모두를 배제하려 했으므로 남한의 정치가 중 공산주의자가 아닌 인사 중 배제 당하지 않은 인사가 역시 많지 않았는데 몽양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여운형은 “미국과 소련 한쪽에 기대는 정책을 외세에 아부하는 정책”으로 규정하여 균형을 추구했으므로 자주적인 입장의 외교론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는 미·소 양측으로부터 정치적 유혹을 받았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이렇게 한국을 점령했던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인정 받은 균형된 길을 걸었지만 냉전의 출현으로 좌우익간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암살당했다.

여운형은 식민지 시대에도 민족의 지도자답게 보다 국제적 차원의 외교적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렇다고 그가 투쟁하지 않고 식민지 권력과 타협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자 이강국은 후일 “여운형만큼 일제의 포악한 위협과 교묘한 회유 속에서 권위와 절조를 유지하면서 지상의 신사로, 지하의 투사 생활을 겸비한 인물은 없다”고 평가했다.

▲ 여운형(왼쪽)이 1935년 가출옥한 안창호(가운데)와 자리를 함께 했다.

결론적으로 몽양은 대외적으로는 자주노선을, 민족 내부에 대해서는 민족통일을 견지했으며, 이념적으로는 친사회주의적이지만 비공산주의적인 경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합법적인 조직가나 강철의 혁명가가 아닌 대중정치가였고 선동가였다. 여운형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했는데, 이러한 사상적 모호성과 불명확성은 반대파로부터 기회주의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특정 이념보다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했다.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정치가였다. 그의 건국노선에 대해 좌우 모두가 비교적 타협적 태도를 보이면서 일정 부분 제휴했던 것도 대중적 인기가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를 시기하는 세력들은 그에 대한 테러를 수차례 기도했으며 결국 1947년 7월 19일 극우 테러리스트 한지근에 의해 암살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 후 조직적 기반이 없었던 여운형계 인사들은 지지 기반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대다수가 월북(越北)을 선택했다. 따라서 몽양과 가까웠던 인사 중 대한민국 건국에 직접 참여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몽양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그러나 그의 포용력과 타협적 사상은 통일시대 남북화해 사상의 귀감이 될 단초를 형성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여운형 약력


-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 출생

- 1900년 배재학당 입학, 협성회 주최 토론회 참가

- 1901년~13년 광동학교와 초당의숙 설립. 크리스도교 입교. 평양신학교입학

- 1913~1919년 신한청년당 조직,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함. 상하이정부 외무부 차장

상하이교민단장

- 1920~ 32년 고려공산당 가입.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 중국국민당 입당. 제령위반죄로 3년간 복역

-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 1943년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 결의

- 1944년 조선건국동맹 결성. 농민동맹 결성

- 1945년 엔도 정무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유지를 맡음

건국치안대 조직.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임시의장, 조선인민당 창당

- 1946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집행부 공동의장.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좌우합작 위원회 참석, 인민당해체

- 1947년 근로 인민당 창설. 혜화동 로타리에서 저격당해 서거함.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2)] -여운형 그는 누구인가?
“지상에선 신사(紳士), 지하에선 투사(鬪士)”
일제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절조 유지하면 독립운동…극좌 노선에 반대

▲ 만년의 여운형
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몽양은 일찍이 1900년대에 기독교와 애국계몽 운동을 접하고 교육사업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전개했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간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도쿄에 가서 일본 조야(朝野) 각계의 인사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는 등 외교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부터 선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그는 이동휘의 ‘공산주의 그룹’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21년에는 고려공산당(상하이파)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상하이지부에 가입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레닌 등과 면담하기도 했던(1921~1922) 여운형은 1923년 국민대표대회의 무산을 계기로 독립운동세력의 파쟁을 경험했다. 이후 독립운동이 분열, 침체된 1924년부터 1929년까지는 ‘중국 혁명을 통하여 조선민족이 해방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1929년 일제 경찰에 잡혀 중국으로부터 압송되었다.

여운형은 1932년 출감한 후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1936년 이후부터 1942년까지는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다소 이탈한 시기로서 도쿄를 왕래하면서 유력층과 관계를 맺었다. 이때 도쿄에서 조선독립을 선전했다 하여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두 번째로 복역했다.

▲ 독립운동가 시절의 몽양(오른쪽)
몽양은 1943년 출감 후 정치일선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도 1944년에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비밀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이러한 해방 직전의 조직운동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그는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결성하였다. 건준은 힘의 공백기에 준정권적 기관으로서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자치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그 중심에 여운형이 있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 박헌영 세력의 주도에 의하여 1945년 9월 6일 건준은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전환되었다. 건준이 인공으로 전환할 때 몽양이 완전히 들러리를 선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좌익 진영의 헤게모니를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게 내어주는 형국을 연출했다.

한편 여운형은 인공의 부주석으로 지명되었으나 주석으로 지명된 이승만 등 우익 진영이 “임시정부를 봉대해야 한다”면서 참가를 거부하고 미군정이 부인했기 때문에 인공은 곧 유명무실해졌다.

1945년 12월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조선인민당으로 전환시켜 대중정당을 조직하였으며, 1946년 1월 좌익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에 참여하여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 몽양과 막내 아들
1946년 5월부터 우익 대표인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하였으며, 박헌영 세력이 주도하는 3당 합동에 반대하여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하지 않고 근로인민당을 결성했다. 조선인민당에서 근로인민당에 참여했던 여운형 세력은 조선공산당에서 남로당에 참여한 사람들보다 온건했으며 또한 그 가운데 기회주의적 인사도 상당수 있었다.

1946년 여름 미·소 공동위원회(이하 공위) 휴회 후 미국은 ‘계속 우익만을 지원할 경우 여운형 등의 개혁세력이 공산당과 힘을 합쳐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상황인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운형 세력을 박헌영 세력으로부터 분리하여 진보적 개혁을 실현하고 이를 통해 혁명적 열기를 개량화시켜 공산화를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미 국무부 내의 일군의 용공적 자유주의자(liberal)들이 좌우합작을 주도했다. 이렇게 미국은 ‘공산화 방지’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좌우합작위원회와 과도입법위원 설치를 적극 추진했으며 미군정이 조선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상태에서 합작을 적극 지지했던 사실에서 미국의 숨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합작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김규식과 여운형이 미국의 이익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운형은 입법위원 설치를 반대했으며 소련 주둔군 인사와 김일성 등을 수차례 접촉해 남북을 통틀어 좌우합작을 실현시키려 했다. 1946년에만 5차례 방북하는 등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북쪽과 가장 많은 접촉을 했다. 박헌영을 견제하려는 김일성은 여운형의 제안을 경청하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좌우합작에 대해 소련이 비판적이었으므로 김일성은 여운형의 복안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일 수 없었고 대신 소련과 함께 우익 배제에 의한 독자적 건국을 추진했다.

▲ 몽양의 셋째 딸 원구씨
몽양은 이렇게 남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에 의한 건국노선을 견지했으나 이미 미·소 냉전이 현실화된 상황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통일을 지향한다고 했을 때 가장 현실적 노선이 바로 몽양의 그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며 1948년 이후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참여 노선이 좌우합작 노선의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은 슬하에 4남3녀를 두었는데 해방 전에 두 아들은 병사했다. 테러가 횡행하던 해방정국에 신변보호에 위협을 느끼던 몽양은 둘째 딸 연구와 셋째 딸 원구를 1946년 봄 김일성에게 부탁해 평양으로 보냈으며 나머지 2남1녀도 1950년까지 순차적으로 월북시켰다. 연구와 원구는 모스크바로 유학 보내졌으며 대남공작의 목적에서 북한의 고위직에 올랐다. 이 점에서 “그의 노선이 결국 친북적인 것으로 귀결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으나 확대해석일 뿐이다.

2005년에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북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여원구씨가 몽양의 서훈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녀는 남쪽의 서훈을 거부했으며 3·1절 이후 몽양의 친족에게 전달되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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