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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여성농민의 힘/ 임봉재 선생

지리산 중촌마을에 가면 큰 삶 만날 수 있다
여성농민의 힘...임봉재 선생을 찾아서
텍스트만보기 이우성(namu1022) 기자
▲ 부끄러운듯 아름다운 미소가 일품입니다. 소녀같은 미소 뒤에 강렬한 힘도 있습니다.
ⓒ 이우성
땅 파고 사니 그렇게 좋을 수 없다는 여성농부. 돈 써가면서 농사지으면 안 된다고 입을 떼는 임봉재(64) 선생. 그는 솔숲을 옆에 거느리고 혼자 산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석대산 아래, 중촌마을 가장 높은 곳에 아담한 초가삼간을 짓고 산다. 400평 텃밭에 산야초를 비롯해 토종자급용 먹을거리를 잔뜩 심어놓고 풀 뜯어먹으며 동정녀처럼 산다. 그렇다. 이곳은 성지다. 한국 생명농업의 성지요, 여성농업운동의 성지요, 가톨릭농민 운동의 성지다.

그래서 이곳은 더욱 그만의 성지가 아니다. 이 땅 넓은 곳까지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그의 온기가 전해진다. 아름다운 마을, 토종의 진한 향기가 잔뜩 묻어나는 그의 성지를 돌아다니다가 내내 이곳에 자리잡고 며칠이고 머물고 싶었다. 선생이 오랜 시간 걸려 정성들여 차린 늦은 점심을 함께 하고 진한 향기 묻어나는 박하 한 잎을 띄운 차를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얘기를 듣노라니 듣는 사람에게까지 눈물 콧물이 나게 만들었다.

선생의 밭에는 토종고추인 붕어초, 수비초를 비롯해 배추, 상추, 쑥갓, 근대, 조, 기장, 수수, 콩, 녹두, 팥, 무, 부추, 두릅, 방아, 야콘, 마늘 따위의 수십 가지 작물이 자란다. 풀 속에서. 산나물들의 종류는 이름 대기에도 바쁘다. 금낭화, 매발톱, 할미꽃, 옥잠화, 비비추, 참나리, 복수초, 앵초, 수선화, 제비꽃, 부처손, 바위단풍, 국화, 상사화, 곰취, 박하 따위의 들꽃들이 지들끼리 알아서 수시로 피고진다. 바로 옆 산에서 씨를 받아 분양된 것이 많다.

'농사를 일이다' 생각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논밭을 갈고 씨앗을 심으면 싹이 돋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면서 그렇게 농사지어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니 농사가 얼마나 즐겁냐고 소녀 같은 웃음을 짓는다. 괴산 청천에서 살다가 이곳에 내려온 지는 7년째. 올해는 가톨릭농민회 마산교구 회장 일을 맡아 필요한 것만 심었다. 선생의 말씀으로는 올해를 안식년으로 생각한다고. 아흔이 된 어머니께서 노인성질환으로 아프셔서 자연이 맑고 아름다운 이곳에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모시고 왔는데 지금은 남동생이 모시고 갔다.

▲ 넓은 가슴으로 세상을 안고 살아온 선생이 집옆 솔숲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이우성
선생은 거제가 고향이다. 4대째 가톨릭집안이다. 집이 공소였다. 21살까지 거제에서 살았다. 7남매의 맏이다. 한 동생은 신부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던 때, "가시나들은 시집가면 그만인데 학교도 보내지 마라"는 할아버지 때문에 죽도록 농사일을 도왔다. 학교 가고 싶어 병이 다 났다. 학교 안 보내주면 약도 안 먹는다고 버텼더니 학교를 보내주었다. 항상 어머니께서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바느질 하면서 그림책 교리서를 보았는데 이상한 그림이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꼬치꼬치 묻다가 기억력을 키우고 글도 빨리 익혔다.

그 덕분에 또래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는데 2학년으로 월반을 했다. 모내기한다, 나락 벤다 하면 가정실습이었다. 숙제도 제대로 해간 적이 없었다. 보리밥만 먹고 동생들을 업고 일에 치여 살았다. 어릴 때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오늘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워한다. 어릴 때부터 편하게 살면 안 된다며 건강하게 사는 길을 일러준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지만 살아오면서 빚지고 산 적이 없는 것을 제일 자랑한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면서 갑자기 선생의 눈자위가 붉어진다. 3학년 때 6.25가 났는데 인근 외갓집으로 피난을 갔다.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내려왔는데 잘 사는 집안의 아이였는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껌을 씹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신기해 쥐눈망울 만큼만 달라고 해서 몇 번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갚으라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그런데 그게 빚인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선생의 집으로 그 여자아이가 찾아와 '자신에게 껌 3개를 빚을 졌으니 30전을 내라'고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그날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았다. 똥을 싸면서까지 맞았다. 그 사건이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그때부터 단돈 10원이라도 없으면 안 먹었다. 농민운동, 사회운동을 하면서 그때 일을 항상 되새김질 하면서 살았다.

나중에 커서 그때 아버지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그 말씀을 못 드렸다.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선생은 살면서 절대 남에게 무엇을 달라는 말을 못했다. 누가 무엇을 주면 부담이었다. 하나 받으면 두 개를 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아버지가 다치고 난 후 선생이 농사를 도맡아 지으며 살았다. 낮에는 나무 몇 짐을 하거나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면서 어디서든 부지런히 주워들었다.

부모님들은 가난했지만 참 열심히 당당하게 사셨다. 그런데도 소작농이라고 멸시하는 눈초리가 심했다. 어린 선생의 눈에는 그게 억울하고 분했다. 좋은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 하나 회의도 들었다. 그때부터 결혼 안하고 혼자 살 결심을 굳혔다. 어머니처럼은 안 살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어머니 같은 사람을 위해 살고 싶었다. 사회에 나와서 농민운동을 하다 보니 이 모든 문제가 사회구조 탓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다 인간이 만든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수녀원에 있는 친구의 권유로 8개월간 필리핀에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신협을 발견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신협운동을 몇 년 했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 아이들이 많았는데 농촌어린이집을 운영하려고 이스라엘 하이파대학 지역사회개발연구소에서 8개월간 과정을 밟았다. 다시 돌아와 시골에서 어린이집하면서 엄마들을 따로 모아 여성농민운동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봉화에 들어가 2년간 살았다.

1977년 7월에 가톨릭농촌여성회(이하 가농)가 발족되어 참여하면서 여성농민운동을 활발하게 하게 되었다. 밥상살림 운동을 제대로 해야 여성농민이 제대로 서겠다 생각하니 할 일이 참 많았다. 전국을 돌며 잠 안자고 교육을 다녔다. 3년 동안 여성지도자 교육도 했다. 초창기 척박한 환경에서 여성농민운동을 하기란 너무 힘이 들었다. 시부모가 아프면 여성들은 모임에 나오지 못했다. 한 가지를 들으면 두세 가지를 얘기해 주어야 했다.

무슨 일만 툭 생기면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던 시절, 잡혀가기도 많이 잡혀갔다. 1980년대 군부독재 아래 생명운동에 힘을 쏟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한다. 생명운동보다는 아스팔트 농사짓느라고 바빴던 것이다. 1989년에 전국농민운동연합과 전국여성농민회연합회가 발족되면서 가농도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농민대중을 상대로 힘을 쌓기 위해 가농 안에서 생명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가농에 남았다. 그래서 가농 국제부에서 일을 했다. 국제가톨릭농민회 상임이사를 맡았고 회장까지 했다. 선생은 영어에 능통하다. 그때 거의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을 것이다.

그즈음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차선으로 농촌으로 들어가자는 생각을 한다. 전국 활동을 하면서 늘 집짓고 뼈 묻을 곳을 찾곤 했는데 96년쯤에 솔뫼공동체가 있는 괴산 청천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리 내려갔다. 쉰 중반의 나이였다. 가농회원과 귀농자, 토박이가 적당히 어울려 함께 일하고 있는 청천에서 5년간 살았다. 솔뫼 식구들은 한 식구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자연을 벗하며 살고 싶은 마음에 이곳 솔숲이 너무 아름다운 산청 땅에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아담한 흙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 2000년에 이곳에 내려왔으니 7년째 살고 있다.

▲ 황토흙으로 지은 선생의 3칸자리 집.
ⓒ 이우성
선생은 젊을 때 꿈이 농촌탁아소를 꾸리는 것이었지만 지금 농촌에는 아이들이 없으니 탁노소가 필요하다고 말씀한다. 자식들이 버린 농촌 노인들을 한평생 모시고 살고 싶은 아름다운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꿈은 버리지 않는다. 또 농촌 여성들은 남편과 싸워도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여성농민들의 쉼터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용도로라면 자신의 집을 내놓을 생각도 있다.

선생은 여전히 농사를 버리지 못한다. 옷이나 집은 없어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지만, 먹을 게 없으면 당장 약탈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 안에 정치, 문화, 사회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잘 엮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성농민들도 사는 방식에 대해 자기자문을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넉넉해지길 바란다고 어렵게 말씀한다. 가장 중요한 삶의 요건은 넉넉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외형이나 물질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 없다고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라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버리면서 평화를 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자신이 편하게 누리고 살면 후세 사람들은 내가 누린 것의 반도 못 누린다는 걸 알아야 해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죽자 사자 일만 하지 말고, 두 발짝 갈 거 한 발짝만 가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생은 설거지물도 애벌로 씻어 그 물을 담아두었다가 식물에게 준다. 생활하수 한 방울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머리도 손수 깎고, 수지침, 부항, 요가, 태극권도 배워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산다. 그리고 누구든지 똥을 누고 나면 자기가 눈 똥 위에 재를 덮어서 작은 삽으로 뜬 다음, 거름더미에 붓는다. 오줌은 오줌대로 한 방울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든 뒷간이 참 아름답다.

선생이 살아온 눈물겨운 삶이, 선생의 실천이 큰 울림이 되어 이 땅을 살아가는 큰 의미로 되살아난다. 입석리 중촌마을, 꼭대기 흙집에 이 시대 여성농부의 표징이 산다.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참 삶이 산다. 그 웃음을 또 만나러 가고 싶다.

▲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선생집의 뒷간, 안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
ⓒ 이우성
임봉재 선생은 여성농민운동, 가톨릭농민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일생을 살아온 산증인입니다. 곱게, 아름답게 늙으신 이분은 아직도 할일이 많다고 합니다. 편안한 유식처에서 심신을 달래고 왔습니다. 흙살림신문 8월호에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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