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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 면

식도락? 친구 따라 강남 갔지요
냉면 한 그릇 먹으러 서울에서 일산까지 간 이유
이승철(seung812) 기자
▲ 기둥처럼 세워진 음식점 간판
ⓒ 이승철
"아니 언제부터 식도락가가 되셨나? 냉면 한 그릇 먹으려고 일산까지 갔었다고?"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군,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는 친구가, 설마 벌써 망령이 난건 아닐 테고, 하하하."

며칠 전 어느 날 저녁을 멀리 일산에 있는 냉면집에서 먹은 적이 있었다. 냉면 한 그릇 먹으려고 서울에서 일산까지 가다니, 그야말로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다른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전날 멀리 일산에 가서 저녁 먹은 얘기가 나오자 한 친구가 대뜸 던진 말이다.

나는 사실 식도락가도 아닐 뿐더러 냉면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평소 음식을 전혀 가리지 않고 먹는 수더분한 식성이지만 굳이 좋아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된장찌개와 청국장이다. 그래서 30년 넘게 함께 살아온 아내가 밥상을 차려 놓고 생색을 내는 음식도 바로 된장찌개와 청국장일 정도다.

나의 이런 식성에 식도락이란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식도락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 음식을 두루 맛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일, 덧붙이자면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사는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을 식도락가라고 한다. 식도락을 하려면 단순히 입맛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여유와 함께 그만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만 가능한 것이다. 애당초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를 않는 것이다.

▲ 평양식 물냉면
ⓒ 이승철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지만 식도락가들은 어느 음식점에서 어떤 특별한 음식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거나, 기막힌 맛 집이라는 소문을 듣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지간히 먼 곳이라도 불원천리 찾아간다고 한다. 그들은 대개 맛을 감별하는 특별한 취미와 입맛도 있어서 여간해서는 '맛있다'는 말도 잘하지 않는다.

식도락가를 다른 말로 미식가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가령 쇠고기를 먹어도 부위별로 특별한 맛을 알고 먹는다. 고기 한 점, 생선 한 토막을 먹더라도 어느 부위가 가장 맛있는지 꼼꼼히 따지는 것이다. 특별한 맛을 찾는 그들은 같은 종류의 고기나 생선이라도 특별한 부위의 특별한 맛을 즐기는 것이다.

많은 종류의 음식들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쇠고기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에서 쇠고기를 가장 다양한 부위로 나눠서 먹는 민족이다. 한 마리의 소를 대략 160개 정도로 부위를 나눌 정도니 그 섬세한 미각이 세계 최고의 수준을 넘어 가히 예술적 경지라고나 할까.

쇠고기를 분류할 때는 갈비나 등심 같은 일반 부위를 시작으로 안심, 박살, 치맛살, 낙엽살, 살치살, 보섭살, 아롱사태 등 특수 부위별로 섬세한 칼질이 가해진다. 그 많은 부위 중에서 한국인들이 최고로 꼽는 것은 단연 꽃등심이고 값도 가장 비싸다.

▲ 식당안에 가득 찬 손님들
ⓒ 이승철
그래서 쇠고기의 꽃등심이나 참치의 뱃살, 상어의 지느러미 요리 같은 특별한 음식이 값은 비싸지만 이들이 찾는 별미로 꼽히는 것이다. 미식가들이 찾는 생선의 또 다른 특별한 부위로는 뱀장어의 꼬리 부분과, 도미의 머리고기, 그리고 뽈살이라고도 불리는 대구머리 등도 꼽힌다.

돼지고기는 쇠고기에 비하여 그 섬세하게 분류되는 면이나 부위별 선호가치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나름대로 특별한 맛을 내는 부위가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야 그저 삼겹살과 목살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지만, 미식가들이 찾는 부위는 머리와 목 사이를 두르는 항정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항정살은 아주 귀해서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고기가 아니다.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이 아주 조금밖에 되지 않아 옛날에는 정육점 주인들끼리만 몰래몰래 먹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할 것 같다.

미식가도 아닌 내가 며칠 전 일산까지 냉면을 먹으러 간 사연은 이렇다. 가까운 친구 한 명이 집안에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친구들 몇 명을 초대하여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본래 좀 게으른 편인 나는 우선 저녁을 먹으러 일산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 매콤한 회냉면
ⓒ 이승철
그런데 누구도 가고 누구도 가는데 너만 가지 않고 빠지겠느냐는 말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쳇말로 '친구 따라 강남 간' 것이다. 우리들이 탄 차가 한강변을 달려 일산이 가까워지자 강변 물가에 유난히 많은 버드나무들이 한들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일산 나들목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자 길가에 장대처럼 세워진 '모란각'이라는 식당 간판이 보인다. 길가의 집 담장 안에 핀 노란 국화꽃 몇 송이를 바라보며 지나치자 바로 주차장이다. 건물 전면에도 역시 날씬한 글씨로 쓴 간판이 보인다.

"여기가 평양인가, 웬 모란각?"

일행 중 한 명이 모란각이라는 간판이 매우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 집이 새터민 김용씨가 운영하는 북한식 음식점이라는군."

초대한 친구가 말을 받는다. 이 집 냉면이 감동적이라는 것이었다. 감동적인 음식맛이라니 그냥 '맛있다'는 표현보다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일까. 모두들 음식 맛에 기대를 거는 눈치다. 냉면이 별로인 나까지도 기대를 하게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 식당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북한산 술들
ⓒ 이승철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객실이 손님들로 꽉 들어차 거의 가득한 모습이다. 예약을 미리 해 놨던 듯 우리들의 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금방 우리들도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곧 음식이 나오는데 냉면이 아니라 녹두부침개다. 어라! 그런데 맛이 장난이 아니다.

"냉면 대신 이걸로 더 먹으면 안 될까?" 한사람 앞에 한 개씩이었다. 자기 몫의 녹두부침개를 다 먹은 친구 한 명이 부침개의 맛에 반했다고 말한다.

"아직 냉면은 맛도 안 봤잖아? 이걸 더 먹으면 냉면을 못 먹을 테니 좀 기다려봐." 기다릴 것도 없이 곧 냉면이 나왔다. 물냉면이었다. 이 집은 평양식 물냉면이 일품이라는 친구의 설명이었다. 그 감동적이라는 냉면이었다. 비빔냉면은 함흥식이다.

"어, 정말 맛이 좋아. 가히 감동적이구만 허허허." 평소에도 냉면이나 국수 등 면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던 친구가 역시 냉면 맛에 찬사를 보낸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맞장구를 쳤지만 냉면을 썩 즐기지 않는 나는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 판매용으로 내 놓은 조리전의 냉면
ⓒ 이승철
"왜, 맛이 없어?" 내 얼굴이 썩 맛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는지 다른 친구가 묻는다.
"아니, 괜찮아, 맛있는 걸." 어차피 친구 따라 강남 왔는데, 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어서 그렇지 딱히 맛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먹을 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 역시 감동적인 맛이야!" 내가 냉면 맛에 대해서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다른 친구들이 웬일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음식 맛은 말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먹을 때 이미 표정으로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 내가 냉면을 먹는 표정은 별로 맛있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백로술, 인풍술 등 북한산 술들, 모두 판매용이다.
ⓒ 이승철
식당 입구 진열대에는 북한산 들쭉술이며 몇 가지 술 종류와 함께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냉면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즉석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이었다. "오늘은 모란각에서 저녁을 먹었으니 평양여행까지 한 셈인가, 그런데 언제쯤 정말 대동강변에서 저녁을 먹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으려나?" 한 친구가 문을 나서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진열대의 초라한 들쭉술이 서글픈 모습으로 우리들을 전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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