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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졌다. 드라마 <주몽>을 보다가. 누가 허준호(해모수) 아들역 아니랄까봐 아무리 잘 봐줘도 꽃미남과는 거리가 먼 울퉁불퉁 주몽왕자? 날마다 업그레이드되는 분노를 내뿜으며 우리 집 20인치 TV를 더 졸아들게 만드는 대소왕자? 아니면, 우뚝 선 콧날에 마음이 싹 베일 것 같은 소서노? 모두 아니다. 그럼 누구냐? 왕자는 왕자지만 신선한 왕자, 영포 왕자다. 영포의 캐릭터를 한 방에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타고난 도둑놈 심보 상인인 도치에게 영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특유의 강렬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은 형님과 힘을 합쳐 주몽이놈을 몰아낸 후, 형님과의 경합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어떻냐. 나의 비책이…. 하하하하." 이걸 보고 도치가 말했다. "킁킁 킁킁. 한심한 놈! 킁킁." 왕자는 왕자인데, 날마다 배추벌레에서 갓 짜낸 듯한 연두색 옷을 입고, 날마다 그 큰 눈을 디룩디룩 굴리며 입술을 씰룩이며 딴엔 으랏차차 멋지게 말한다. 그런데 <주몽>에 출연하는 이치고 그를 이렇게 불러보지 않은 이가 없다. "한심한 놈!" 그리하여 왕자는 왕자이지만 혹시 핏줄에 금 갔나 싶게 철딱서니 없고 사고뭉치인 단세포요, <주몽> 공식 지정 '한심한 놈'으로, 그 찌질함에 전국 시청자를 모두 미소 스프에 빠뜨려버린 이 왕자를 보고 생각했다. 이 남자. 누굴까?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며, 백년 묵은 산삼이라도 잘근잘근 씹은 듯이 오만 스트레스를 웃음결에 날려버리게 하는 이 남자. 누굴까? 과거 두꺼비가 왕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주몽>성에 사는 이 남자? "영포 캐릭터는 둘째, 차남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 형한테 무시당하고 밑에 동생한테 치이고. 영포 자신은 절대로 악인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든 간에 영포 상황에 처하면 영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생각하거든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환경이 영포를 그리 만든 거 같아요." SBS공채 탤런트로 잘 나가다 뚝
"비슷한 부분도 좀 있죠. 영포가 단순하잖아요. 생각이 나름대로 복잡하긴 하지만. 저도 그런 면에서 비슷하죠.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그런 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요." 아니 이럴 수가? 그렇다면 똑같다는 이야긴가? 진짜? "영포왕자님!"하고 부르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행동하진 않죠. 하하하하." 그런데 그는 지금껏 어디에서 뭘 하다 이제 나타났을까? 실은 계속 우리 앞에 있었다. 지금껏 배우였다. 그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 배우가 아니다. 무려 1994년에 데뷔했다. 그럼 찔끔찔끔 단역으로 나오며 오랜 시간 무명세월을 견뎠냐? 천만에다. 지금이야 정정당당 MBC 드라마에 출연중이지만, 시작은 위풍당당 SBS 탤런트 공채였다. 김남주가 동기였다. 신기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런데 왜 여태 몰랐을까? 어디 숨어있었지? "나름대로 인생 역경이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1995년도 군대 가기 전까진, 고난이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너무너무! 어려서부터 뭐든지 내가 원하면 일이 다 풀렸고, 내가 하고자 하면 그게 다 이뤄졌어요. 대입시험도 그렇고 탤런트 시험도 그렇고. 한 번에 다 붙었어요. 탤런트 되고 나서도 동기 중에서, 정말 왕성한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다 잘되나보다 생각했는데요." 1998년 2월 제대했다. 군에선 (연예사병이 아니고) 운전병이었다. 제대하고도 좋았다. 제대한 다음날로 캐스팅 됐으니까. 바로 <전설야사>였다. 수요일 저녁 8시면 하던 드라마. 그거 끝나자마자 또 SBS 일일(저녁) 드라마 <칠인의 신부>를 했다. 이태란 상대역이었다. 사단은 그 뒤에 일어났다. 갑자기 일이 끊겼다. 말 그대로 뚝! 뚝 끊겼다. 그때도 매니저가 없었다.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군대 갔다 오니 그게 아니었다. 입대 전엔 없어도 됐는데, 갔다 오니 아니었다. 이럴 수가. 그가 스르륵 눈을 내리깔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나 조용히 말했다. "그때 되게 좀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어디 연기할 데가 TV뿐인가? 그는 그때 연극을 했다. 원래 학교 다닐 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으니까. 처용가 이야기였다. 그가 맡은 건? 역신이었다. 처용이 아니라. 아니, 역신이라면, 처용이 밤늦게 놀다 돌아오니 자기 마누라랑 나란히 다리 네 개를 만들며 누워있던 그 작자? "난 처용보다 역신에 더 매력이 있었어요. 처용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역할이잖아요. 사실 <가스펠>이란 뮤지컬에서도 예수란 인물보단 유다란 인물이 더 매력 있어요. 성격이나 이런 걸 봤을 때. 처용은 그냥 그냥 도인이잖아요. 항상… 너무… '암흑이 짙다 해도 햇빛을 못 당한다' 이런 선문답이나 하면서. 너무 재미없더라고요. 처음에 연출 선생님이 처용으로 캐스팅 제의를 했는데, 제가 그랬어요. '선생님 전 역신하고 싶습니다' 후후후. 선생님이 '야, 처용이 주인공인데, 네가 왜 역신을 하냐'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유. 전 역신이 더 좋습니다' 역신은 칼춤도 춰야 되고, 막 호탕하게 막 변화가 돼요. 성격적인 변화가 막 되고. 처용이랑 딱 대면했을 때, 처용의 이런 것에 눌려서 나중에 무릎을 꿇고. 역신의 모습이 되게 멋있더라고요." 그렇다고 드라마를 안 한 건 아니었다. <자꾸만 보고 싶네>란 SBS 저녁 일일드라마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람둥이였는데 "결국에는 그 회사 사무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뚱뚱한 여직원과 결혼하는 불운의 사나이"라나? 작년 초 아침드라마 <진주귀걸이>에서도 남자 주인공 역을 했다. 불운이었을까? 그 드라마는 악평과 낮은 시청률에 시달리다, 조기 종영했다. 하지만 그에겐 뮤지컬이 있었다. <그리스>에서,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그는 노래하고 탭댄스를 추고, 무대를 화르륵 불태웠다. 그리고 올 여름 <주몽>을 만났다. 운명처럼? 그런데 그가 <올인>과 <발리에서 생긴 일>에도 나왔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건 뭐지? 사실이다. 나오긴 나왔다. 단역이지만. "평면적인 역할보단 입체적인 역할을 좋아해요. 나쁘게 말하면 성격 파탄이라거나 좋게 말하면 젠틀하면서도 아픔도 가지고 있고, 감성도 좀 풍부하고. 때로는 좀 냉철하기도 하고.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런 역할 있잖아요. 그런 거 하고 싶어요." 그는 그런 배역을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게 또 영포였다. 장렬하게 악하지도, 그렇다고 지고지순 의리의 사나이도 아닌 것이, 뭐랄까. 음…. 하지만 영포 아이큐 50쯤은 올려야할 것 같긴 했다. 저대로 되려면. 뭐 사실 그런 인물이 매력적이긴 하다. 햄릿처럼. 하지만 그런 역이야말로 정말로 연기력이 필요하고,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요. 연기 공부를 하기 위해서죠. 제가 연기를 잘 한다면 그런 거 뭐 굳이 그런 역할 하지 않을 텐데. 연기 못하니까…. 그런 걸 자꾸 하면서 연기를 좀 잘하고 싶어서예요." 아니, '캐발랄' 영포 왕자님이 왜 이러시나? 이 (늙은)소녀, 당황스럽사옵게. 학교 선생님이 꿈이었던 영포 왕자
고3 1학기 때였다.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모델 해볼 생각 없어요?" 그래서 "심심해서" 한 번 따라가 봤다가, 모델 워킹을 배웠고, CF를 찍었다. 8명이 나와서 하던 '시카고 피자'와 '렛츠비 캔 커피'였다. "미쓰리 커피 한 잔" 하는 거였다. 그가 고3때였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다. 해보니까 좋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재밌고 좋았다. 그래서 연극영화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기요? 잘 못해요. 연기 잘 못해서, 시청자들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고. 계속 배우고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을 해요. 잘 못해서." 그는 "발성도 안 되고, 호흡도 안 되고"라며 자꾸 연기를 못한다고 했다. 이런 왜 자꾸 연기를 잘 못한다고 그러시나? 그럼 지금 영포 왕자로 뜬 건? 영포 왕자를 너무 잘해서 아니고? "글쎄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운이 좋아서라? 운이 연기력 레벨도 급상승 시켜주나? 뭐 때를 만난 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제 역을 만났거나. 그는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대뜸 박근형을 꼽았고(이유는 묻지말라고 대뜸 엄포했다), 배우한테 가장 중요한 걸로 "살아있는 눈빛"을 꼽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박근형과 왠지 닮았다. 쳐다보면 오그라들 것처럼 매서운 눈매나, 한 성깔하게 보이는 것까지? 그는 연기하지 않을 땐 "그냥 논다"지만, 땀 흘리는 운동은 싫어해서 골프나 승마를 좋아한다고 했다. 잠잘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에게, 살면서 후회되거나 그런 일 없냐고 물으니(내가 그였다면 군대 갔다 온 게 후회됐겠다), 그가 똑 잘라 말했다. "없어요." 그리고 똑 잘라서 다다다 덧붙였다. "후회할 일을 했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 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니까요." 이크. 이렇게 단호하고 심플하다니. 영포 왕자와 원기준은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이야기하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배우로 살 생각을 처음 한 스무 살 즈음 이야길 하다가 급기야 그가 버럭 목소리 톤을 높이며 말했다. "기사 제목이 뭐예요?", "기사 주제가 뭐예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긴 하기 싫은데요?" 처음에 영포 왕자가 어떤 인물이라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도 그랬다. "다 나온 이야기인데 왜 또 물어요?" 성격 참 화끈했다. 그때 내가 만약 소서노라면,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겠지만, 나는 소서노는커녕 소심한 금순이인지라 "기사 제목은 인터뷰가 끝나야 알 수 있다" 소리만 미소 섞어 살살거렸다. 더구나 MBC사옥 1층 로비에서 본 소서노는 아까 21세기 옷차림을 하고, 누군가 "어디가?"라고 묻자 "교회 가!"란 말만 남기고 총총총 MBC사옥을 나갔다. "배우 사생활 알아서 어떤 의미가 있죠"
입체적인 캐릭터를 좋아한다더니, 그 짧은 시간에도 그는 입체적인 인간 스타일을 보여줬다. 덕분에 덕담 삼아 하려던 "12월에 결혼하신다면서요? 축하해요" 요 입에 바른 덕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획 나가버리면 어떡하나? 아무튼 사생활 보호에 결연한 의지를 지닌 듯한 그가 급기야 말했다. "가십거리라도 사생활이에요. (인터넷에서) 가십거리라고 가정생활까지 들춰내고 그럴 때 같은 배우 입장으로 좋은 기분은 아니에요. 드라마에 나오는 역할로 재밌게 보고 즐겨주셨으면 해요. 옆집 사람 어찌 사는지 알아서 뭣하겠어요?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배우의 사생활이 어떤지 알아서 어떤 의미가 있겠어요?"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궁금한 걸 어떡하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실체가 어떤지 궁금한 것도 죄일까? 그가 스타가 아니라면 궁금할 것도 없지만. 아. 모르겠다. "그러게 누가 스타 되래요? 인기가 많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죠"라고 잘난 척 말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개그콘서트>의 강유미 기자처럼 열심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런데 어찌 그리 잘 알까? 궁금했다. 그도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나? 그에 대한 사람들 반응을 체크하거나 신경 쓰나? '캐발랄' 영포 왕자님이, '주몽'과 혼이 바뀐 빙의라도 일으키신 양 똑부러진 목소리로 똑부러지게 잘라 말했다. "시청자 게시판만 봐요. 참고 하죠. 연기 판단은 심사위원이 아니라 감독님이 아니라 시청자가 하는 거라 생각해요. 시청자 위해 드라마 만드는 거니까요. 관객 없이 배우는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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