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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월경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한 김유신 큰누이


김유신의 첫사랑인 신궁의 제관 천관녀 역의 박시연, 연개소문의 정부인 홍불화 역의 손태영,
연개소문의 첫사랑이며 후에 태종무열왕의 왕비가 되는 김보희 역의 임성언. (왼쪽부터)
<월경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한 김유신 큰누이>
05-20021017-012-0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의 명장 김유신(595-673)에게는 보희(寶姬)와 문희(文姬) 두 여동생이 있었다. 둘 가운데 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를 제치고 김춘추(604-660)와 결혼하게 된 사연은 아주 널리 알려져 있다.

김춘추와 문희의 로맨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고려사」 같은 기존 문헌은 물론이고 최근 공개된 「화랑세기」에도 보이고 있다.

이들 문헌에 나타난 골자를 추리면 이렇다. 유신은 자기 집 앞에서 춘추와 축국(축구와 비슷한 경기)을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었다.

이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리고 들어간 유신은 보희에게 바느질을 해드리라고 했으나 마침 보희는 무슨 일이 있어 나서지 못하고 동생 문희가 대신 일을 맡게 되니,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문희는 결혼하기도 전에 춘추의 아이를 갖게 되니, 그가 훗날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문무왕 김법민(재위 661-683년)이다.

문희와 춘추의 결혼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은 모든 사서가 일치하고 있다. 김유신이 "처녀가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을 했느냐"면서 동생 문희를 장작불에 태워 죽이려 한 희대의 쇼를 연출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여하튼 모든 기록을 종합할 때 문희는 죽음 직전에 때마침 남산에 행차중이던 진평왕의 딸 선덕공주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돼 춘추와 결혼하게 된다.

문희는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아들 없이 죽고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하루 아침에 황후로 격상돼 문명(文明)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문희, 곧 문명은 661년 남편 김춘추가 죽고 아들 법민이 즉위하면서 태후가 된다.

김춘추와 문희가 결합해 문무왕을 임신한 것이 언제인지는 어떠한 문헌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 다만 문무왕이 죽고 난 다음 그 공적을 기려 신라인들이 세운 '문무왕비'에는 문무왕이 626년에 출생했다고 돼 있다.

이렇게 보면 김춘추와 문희의 로맨스는 625-626년 무렵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선덕(재위 632-647년)이 즉위하기 전이므로 장작불에서 문희를 구한 주인공을 '선덕왕'이라 기록한 「삼국유사」는 잘못됐으며 '선덕공주'라고 한 「화랑세기」가 더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전개를 보면서 촉발되는 궁금증의 하나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던 날 언니 보희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점이다.

미끈한 미남이라는 기록이 국내 문헌은 물론이요 바다 멀리 「일본서기」에까지 남아 있는 김춘추를 남편으로 얻을 수 있었고, 나아가 황후까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궁금증을 풀어 보자.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던 날, 보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즉위 원년(661)조에는 '유고'(有故), 즉 사고가 생겼다고 했고, 둘째,「삼국유사」에 실린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글에는 두 가지 상이한 기록을 아울러 전하고 있다.

하나는 김춘추의 옷을 기워드리라는 김유신의 명령을 "어찌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경솔히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거부했다고 전하면서도 또 다른 기록을 들어 "옛 책에는 (보희가) 병(病)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셋째, 「고려사」 첫 대목에 실린 건국시조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탄생 설화에서도 보희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이 설화가 보희-문희 이야기를 적당히 '표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작제건 탄생 설화에서 보희의 분신임이 분명한 언니는 그날 "코피가 나는" 바람에 공자를 시중들지 못하고 여동생이 대신했다고 하고 있다.「삼국사기」의 '유고'와 「삼국유사」의 '병'이 이제 코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랑세기」 18세(풍월주) 춘추공전에서도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는데 그 골자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대동소이하다.

「화랑세기」에서도 보희가 오라비가 축국하던 날 '병'이 났기 때문에 동생 문희가 대신 나아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기웠다고 하고 있다.

이 모든 기록에서 공통되는 점은 첫째 김유신은 처음 김춘추의 상대로 보희를 지목했고, 둘째, 보희에게 무슨 사정이 있음을 바로 그 순간에 알아차렸으며, 셋째, 그랬기 때문에 보희의 '대타'로 문희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보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김유신은 축국하던 바로 그날 보희에게 사고가 생겼음을 알았는가? 더구나 전후 맥락을 보면 이 때 김유신은 문희는 물론이고 보희와도 같은 집에 살고 있었음이 확실한데, 그럼에도 동생에게 '병'이나 '사고'가 난 줄도 모르고 처음에 보희를 지목했다는 말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그럴 듯한 설명은 지금으로서는 단 하나밖에 없다. 보희는 월경중이었던 것이다.

민속학자인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관리과장은 "보희의 분신인 언니가 등장하는 '작제건 탄생설화'에서 '코피'는 결정적이다. 월경으로 인한 출혈이 코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라인들이 월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비로소 해명할 수 있게 된다. 월경은 '병'이나 '사고'와 같은 불길한 일로 치부됐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월경에 대한 이러한 불길한 시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펴낸 「충청남도 세시풍속」에 소개된 충남 금산군 제원면 지역의 기우제 습속인 '농바우 끄시기'에서도 확인된다. 여성들만 참여하는 이 습속에서 임신중인 여자와 월경중인 여자는 부정하다 해서 접근이 원천봉쇄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보희 이야기로 돌아가, 그렇다면 보희로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하필 그날에... 김춘추의 배필, 나아가 황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를 전해주는 자료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 바로 「화랑세기」다.

이곳 춘추공전에는 보희가 하도 억울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으니 김춘추가 이를 불쌍히 여겨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과 개지문을 낳았다고 했다. 결국 두 자매 모두가 김춘추를 남편으로 섬긴 셈이다.

이러한 보희의 억울함은 그가 그날 월경중이었다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그 실체가 온전하게 풀린다. 학계 일각에서 가짜라고 단정하는 「화랑세기」가 얼마나 폭발력이 강한 핵폭탄인지를 이것으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taeshik@yna.co.kr

참고 :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월경과 폭무, 두 키워드로 본 모략가 김유신>, 백산학보 70, 2004.12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