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명의 대표화랑 풍월주에 관한 신라 역사서 ‘화랑세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은 뜻밖에도 미실이란 여인이다. 6세기 후반 신라 사회를 뒤흔든 미실은 화랑 사다함의 억울한 죽음과 맞닥뜨릴 때까지만 해도 대원신통 계급으로서 운명에 순응하는 여인에 불과했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을 종주로 삼는 대원신통은 옥진이 법흥왕을 모신 것처럼, 임금에게 색공(色供)을 바치는 것이 존재이유인 계급이었다. 미실에게 남성을 사로잡기 위해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친’ 장본인은 바로 옥진이었다. 미실은 얼굴이 아름답고 몸은 풍만하며 성격도 명랑해서 ‘화랑세기’에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기록된 여인이었다. 지소 태후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 세종 전군(殿君·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한 것은 당연했다. 미실은 옥진에게 배운 전문적 방사기교로 세종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지소 태후가 진흥왕의 왕비 사도를 폐하고 숙명공주를 세우려다 실패한 사건의 여파가 미실에게 향하면서 그녀의 운명은 달라져갔다. 미실이 사도 왕후의 조카란 사실을 미워한 지소태후는 “네게 전군의 의복과 음식을 받들라고 했지 누가 색사(色事)로 어지럽히라고 했느냐”며 미실을 쫓아낸 것이다. 하지만 미실은 사다함을 만나면서 죄없이 쫓겨난 억울함을 순수한 사랑으로 보답 받았다고 여겼다. 미실은 ‘부귀는 모두 한때’라며 사다함과 부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사다함과 함께 살려는 그녀의 소박한 결심은 실현될 수 없었다. 미실을 그리워한 세종 전군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가 다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가야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다시 세종에게 간 것을 보고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미실은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선 권력이 잡아야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먼저 사도왕후와 “삼생(三生·전생·현생·후생)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했다.” 사도 왕후는 대원신통에다가 미실의 숙모였기에 그녀와 쉽게 권력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미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장악에 나섰다. 사도 왕후는 미실에게 아들 동륜 태자와 사귀어 차기 왕후 자리를 노리라고 권유했다. 이에 따라 미실이 태자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진흥왕의 부름을 받았다. 미실은 태자의 부친에게도 전문적 방사솜씨를 발휘했고 진흥왕은 ‘화랑세기’에서 “천하를 뒤집을 만큼 사랑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녀에게 반했다. 진흥왕이 전주(殿主)라는 지위를 내리자 문장을 지을 수 있었던 미실은 진흥왕 곁에서 직접 정사에 참여했다. 미실은 29년 전에 폐지된 원화(源花) 제도를 부활시켜 스스로 원화가 되었다. 남성 풍월주가 이끌기 전의 화랑도는 두 여성 원화가 이끌었으나 삼산공의 딸 준정(俊貞) 원화가 법흥왕의 딸 남모(南毛) 원화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해 폐지된 제도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었다. 이때 자리를 내준 풍월주는 다름 아닌 남편 세종이었다. 그러나 동륜 태자가 부친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해 미실은 원화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태자의 수행원들이 태자와 미실 사이의 스캔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미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풍월주 선정에 간여했다. 그녀는 남편 세종에게 양보를 강요해 자기 섹스파트너였던 설원랑을 풍월주로 만들었다. 진흥왕이 풍질(風疾)에 걸리자 왕권은 사실상 그녀가 차지했고 그녀는 자기 심복을 각지에 심었다. 진흥왕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미실은 사도 왕후, 세종, 동생 미생과 짜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미실은 동륜의 동생 금륜과 먼저 정을 통하며 충성을 약속 받은 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바로 진지왕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막상 즉위하자 미실은 멀리하고 다른 여자들을 가까이 했다. 이를 약속 위반이자 대원신통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한 미실은 사도 태후와 짜고 그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 미실은 사도 왕후의 오빠 노리부와 남편 세종에게 거사를 맡겼는데 이 일에는 가야계 출신 화랑 문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용감한 가야계 출신 낭도들이 진지왕을 지지하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실은 문노보다 신분이 높은 동생 윤궁을 배필로 맺어줄 정도로 우대해왔기 때문에 문노는 거사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진지왕은 폐위됐고, 진평왕이 뒤를 이었다. 신라사회는 이제 국왕까지 갈아치우는 현실적 힘을 가진 미실의 것이 되었다. 미실의 최후는 그녀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진흥·진지·진평의 세 왕을 모신 그녀가 진평왕 28년(서기 606년) 병에 걸리자 설원랑은 자신이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설원랑이 대신 죽자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다”라며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우리 역사에서 복수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복수의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그녀가 유일하다. 그것도 절대적인 권력 속에서 자발적으로….
화랑세기 1989년 필사본 공개…진위논쟁 계속 ‘神國의 道’로 근친혼도 정당화 미실 얘기의 바탕이 된 ‘화랑세기 ’는 현재까지 필사본만 공개됐는데, 학계에선 아직 진위논쟁을 벌이고 있다. ‘화랑세기 ’는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신문왕 1년(681)에서 7년 사이에 저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앞선다.현재 공개된 필사본은 일본 궁내성 도서과 촉탁을 지낸 박창화가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필사본이 처음 공개됐을 때 위작 논쟁이 벌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는 난잡한(?) 남녀관계였다. 그러나 ‘화랑세기 ’는 이런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道)’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22세 풍월주 양도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을 권유하는 어머니 양명공주에게 “중국 풍습이 아니라 신라의 풍습을 따르겠다 ”며 수락하는데 이에 대해 양명공주는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느냐 ”라고 칭찬한다. 진흥왕은 미실의 군주(君主·일종의 후궁)임명을 기념해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이라고 고쳤다.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신국의 도 ’를 신봉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국의 도 ’라는 프리즘을 통해야 미실과 신라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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