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내가 옹기항아리에 담근 동치미. 시원한 국물 맛이 기대된다. | | ⓒ 전갑남 | | 아내는 지난 주 김장을 하느라 경을 쳤다. 드러눕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우리 집에서 네 가족이 먹을 양을 함께 김장했다. 집에서 가꾼 김장거리를 가지고 잔치라도 벌이듯 김장을 한 것이다.
배추만 따져도 150여 포기를 담갔다. 요즘은 김장하는 것도 힘들다며 사먹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많은 양을 담그느라 아내가 고생했다. 물론 다섯 사람이 달라붙어 같이 했지만 아내의 수고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올해는 김장하는데 작년보다 힘이 더 들었다. 배추가 때깔이 좋으면 일이 수월할 테지만, 우리 배추는 별로였다. 손수 농사지은 것이라 귀하게 여기니까 그렇지 상품가치는 없었다. 오랜 가뭄에다 진딧물에 녹아나고 병치레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진딧물을 씻어내는 데도 힘들고, 다듬고 절이는 데도 잔손질이 훨씬 많이 갔다.
파뿌리를 넣으면 더 개운해져요
일요일(12일)이다. 아직 피로가 덜 풀렸을 아내가 동치미를 담가야겠다며 아침부터 서두른다. 생각 같아서는 동치미고 뭐고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다.
"여보, 쪽파 좀 뽑아다 다듬어주면 좋겠네." "쪽파는 왜?" "동치미에 넣게요." "좀 쉬었다 내일 하지 그래?" "당신 있을 때 후딱 해치워야 쉽지요." "나도 쉬기는 틀렸네."
아내 등쌀에 못 이겨 나는 밭으로 나왔다. 황량한 빈 텃밭을 보니 그동안 부지런을 떨며 가꾼 농사가 다 끝난 것 같다. 내년 봄을 기약해야겠다.
쪽파가 실하지 않다. 키가 작은데다 자잘하다. 마루에 신문지를 펴고 하나하나 다듬었다. 쪽파는 성질 급한 사람이 다듬으려면 짜증이 난다. 작은 것을 하나하나 다듬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참을 다듬고 있는데 무를 다 씻은 아내가 왔다.
| | ▲ 동치미에 들어갈 파뿌리를 잘 손질해 놓는다. | | ⓒ 전갑남 | | "당신, 파뿌리 버리면 안 돼." "파뿌리를 어따 쓰려고." "파뿌리도 함께 넣으면 맛이 개운해요." "그래? 몰랐네."
파뿌리는 동치미 맛을 좋게 한다며 아내가 골라낸다. 파뿌리와 저민 생강과 마늘을 보자기에 싸서 동치미 담글 때 넣어두면 국물 맛이 시원해진다는 것이다. 파뿌리는 감기예방에도 효과가 있어 일석이조라고 한다.
쪽파 다듬고, 마늘 까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장할 때 이런 일을 도와주면 아내는 고마워한다.
누님, 고구마, 그리고 연탄가스... 동치미의 추억
나는 동치미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어렸을 때 전라도 고향에서는 동치미를 싱건지라고 불렀다. 심심하게 담아 시원한 국물도 국물이지만 잘 숙성된 동치미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맛이 그만이다.
| | ▲ 그다지 크지 않은 무를 고른 뒤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파뿌리, 마늘, 생강 저민 것을 보자기에 싸서 함께 넣는다. | | ⓒ 전갑남 | | 예전에 어머니는 동치미를 큰 항아리에다 넉넉히 담그셨다. 자그마하고 매운맛이 있는 무를 골라서 마늘과 소금만으로 담갔다.
우리 부모님은 겨울철 농한기에도 손을 놀리지 않으셨다. 우리 학비를 마련하느라 겨우내 왕골 돗자리를 짜셨다. 아버지가 죽침으로 왕골을 감아 지르면 어머니는 바디로 내리치며 일하셨다. 돗자리를 짜서 내다 팔면 수월찮은 돈벌이가 되었다. 그 때 부모님의 수고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다.
일하시는 부모님과 올망졸망 어린 동생들을 위해 둘째 누나는 고구마를 쪄서 간식으로 내놓았다. 밤늦은 시간 출출할 때, 달리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고구마는 소중한 식량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 골방에는 수숫대로 엮어 만든 큰 동우리가 있었다. 많은 양의 고구마를 싸놓고 입이 궁금한 겨울철에 두고두고 먹었다.
이때 누나는 양푼 가득 쪄온 고구마와 함께 동치미도 가져왔다.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살짝 언 시원한 동치미와 함께 먹었던 맛! 퍽퍽한 고구마가 잘도 넘어갔다.
고구마와 동치미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먹었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내도 예전 맛이 생각나 동치미를 담그지 않나 싶다. 초임 교사시절 하숙할 때 일이 떠올라 얘기를 꺼냈다.
"연탄가스를 마셔 혼난 적이 있었어. 속이 미식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는데, 아주머니가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갖다 주시더라고. 그때 동치미 국물로 정신을 차리고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어."
아내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며, 동치미에는 산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깨어났을 것이란다. 이번에 담글 동치미의 시원한 국물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시래기·배추김치·순무김치에 동치미까지... "겨울 준비, 끝!"
| | ▲ 동치미 담글 때 쓰일 재료들이다. | | ⓒ 전갑남 | | 동치미 담글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다. 재료라고 해야 간단하다. 깨끗이 씻은 무가 주재료이고 쪽파, 마늘, 생강에다가 고명으로 얹을 풋고추와 홍고추가 있으면 끝이다. 물론 아내만의 비법이 담긴 파뿌리와 작은 배 2개를 준비했다.
동치미 담그는 것은 배추김치 김장하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아내는 옹기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엎어 놓는다. 동치미엔 아무래도 옹기그릇이 잘 어울린다며 서울 처형집에서 가져왔다.
아내의 요리 솜씨는 친정어머니한테 배운 것이지만, 서울 큰언니한테도 많은 것을 배웠다. 파뿌리와 배가 들어가면 국물이 더 시원해진다는 것은 언니한테 배웠다고 한다.
| | ▲ 무를 소금에 궁굴려 골고루 묻혀 차곡차곡 쟁인다. | | ⓒ 전갑남 | |
| | ▲ 소금은 간수가 빠진 것을 사용하며, 이틀이 지난 후 무를 쟁여놓은 항아리에 붓는다. | | ⓒ 전갑남 | | 동치미 담그는 것은 배를 통째로 항아리 밑에 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무는 소금을 쟁반에 펴놓고, 궁굴린 후 차곡차곡 쟁인다.
그리고 이틀 후 파뿌리, 생강, 마늘 저민 것이 들어 있는 주머니와 실로 한 움큼 묶은 쪽파를 넣고, 풋고추와 홍고추를 고명으로 올려놓았다. 한나절 정도 풀어놓은 소금물을 체에 밭쳐 부었다.
소금물에 동동 뜨는 재료가 떠오르지 못하도록 대나무 가지를 가로질러 놓으면 동치미 담그는 일은 모두 끝난다.
"여보, 동치미도 꽤 정성이 들어가네." "그럼요. 맛이 그냥 나오나요?"
옹기그릇을 뚜껑을 덮고 얼지 않을 곳에 옮겨놓았다. 잘 숙성되면 국물이 시원하고 정말 맛있는 동치미가 될 것 같다.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게 한다. 일을 다 마친 아내의 입가에도 미소가 넘쳐난다.
"올 겨울은 걱정 없네. 시래기 말려놨지. 배추김치, 순무김치, 동치미까지 담갔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