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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상만 연출가

이상만씨 IDC 총회 3대 위원장 선임


이상만(李相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이

최근 필리핀 바기오에서 열린 국제델픽위원회(IDC) 총회에서 3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건용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12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고대 델픽게임(문화예술올림픽)을 재현하기 위해 1994년 결성된 IDC는 현재 31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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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11/21 19:17:09
수정시간 : 2007/11/21 19:30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자 선정·발표

서울시는 2007년 제56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자 10명을 선정하고, 서울의 학문과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고자 12. 26(수)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이날 시상식에서 오세훈 시장은 연극 분야의 송승환씨 등 10개 분야별로 각1명에게 시상한다.
자연과학분야의 이혜숙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미술분야의 김봉구 (조각가,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명예교수)
국악분야의 박범훈 (중앙대학교 총장)
서양음악분야의 이상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
연극분야의 송승환 ((주)PMC 프로덕션 대표)
대중예술분야의 도동환 ((사)민족문화영상협회 회장)
언론분야 노진환 (서울신문사 대표이사·사장)
문화재분야의 (사)서울무형문화재기능보존회
관광분야의 임화영 (파나관광교통(주) 대표이사)
체육분야의 강태선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회장) 등 10명(단체)이다.

서울특별시 문화상은 매년 14개 분야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시상해 왔으며, 금년의 경우 신문 공고와 330여개 문화예술관련 기관·단체·대학·학회 등에 추천을 의뢰하여 52명(단체)의 후보자를 접수받아 11월 22일 관계분야의 학자, 전문가등 82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엄정한 공적심사를 거쳐 10명의 수상자가 선정되었다.
※ 인문과학, 문학, 무용, 문화산업 등 4개 분야 : 금년도 수상자 없음으로 결정됨

특히, 이번에는 전세계 24개국 206개 도시에서 공연된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의 제작자 송승환 씨가 연극분야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 밖의 수상자별 공적은 별첨 자료와 같다.

서울특별시 문화상은
서울의 문화발전과 문화예술진흥에 기여한 공로자를 발굴하여 시상하는 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도에 제정된 이래, 한국전쟁 3년을 제외하고 매년 시상하여 2006년(제55회)까지 모두 553명의 공로자에게 수여해 온,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다.

시상식은,
오는 12월 26일 (수) 오전 11시에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수상자 가족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한다. 영예의 수상자들에게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직접 상패와 메달을 수여한다.

담당부서 : 서울특별시 문화국 문화정책과(☎2171-2563)

[책 읽는 대한민국/21세기 고전 50권]<48>내일의 이정표



최근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이 번역 출간됐다. 그의 저서는 경영학, 미래학, 기업인,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영향력 있는 책들이다.

‘21세기 지식경영’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지식 경영자’ ‘미래의 결단’ ‘미래기업’ ‘비영리 단체의 경영’ ‘변모하는 경영자 세계’ ‘차세대 기업 리더의 양성’ 등 한국의 신지식인들에게 회자되는 책 이름이다.

그런데 막상 그의 중요한 저서인 ‘내일의 이정표’는 우리나라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이 책을 1960년대 중반에 읽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964년에 ‘변모하는 산업사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초판 25만 부가 팔렸다. 일본에서 당시 비소설 부문에서 최고 판매부수를 기록하였다.

1966년 일본 정부는 드러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 책의 영향이다. 이 책은 ‘산업인의 미래’(1942), ‘새로운 사회’(1950), ‘미국의 다음 20년’(1957) 등 깊고 넓은 그의 지식과 의지를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계획하고 예견한 걸출한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가 40대 초반의 왕성한 나이에 쓴 이 책은 인문학적 학문의 깊이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강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특히 인접 분야 학문 즉, 문학 역사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생태학 문화인류학에 대한 섭렵과 심지어 예술적 심미안에 이르기까지 총화를 이루어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혀를 찰 만큼 찬탄을 보내는 저서이다.

드러커는 이 책에서 미래 산업사회에 대한 그림을 간명하게 그려 독자들에게 보여 준다. 굴뚝산업이 무너지고, 지식과 기술이 집약된 새로운 형태의 산업사회가 온다는 점을 1959년 발간된 이 책에서 일찍이 예견한 것이다. 드러커는 인간 생활에 닥쳐올 변화를 세 가지 영역에서 전망한다. 첫째, 기계적 인과관계로 이뤄진 데카르트적 우주에서 패턴과 목적, 과정이라는 새로운 우주로의 철학적 변화다. 둘째, 자유세계 사람들에게 닥쳐 올 네 가지 도전 즉, 교육된 사회의 도래, 경제발달, 정부의 쇠퇴, 동양문화의 쇠퇴를 예견한다. 이어 드러커는 인간존재의 정신적 실체에 닥칠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드러커는 유대계지만 합스부르크 정권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1909년 빈에서 태어났다. 20대 젊은 시절 영국에서 일하면서 경제학자 케인스를 만났다. 케인스는 한때 미국의 경제정책 수립(뉴딜)에 기여했고 돈도 벌어 그 당시 피카소 등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해 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의 피츠윌리엄 박물관에 기증했다. 드러커는 케인스의 이런 모습을 배웠다.

22세에 프랑크푸르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천재였고 신동이었던 드러커는 첼로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대가이다. 또한 그는 일본과 잉카 미술품의 이름난 수집가이고 탁월한 감식가이다. 현재 97세의 고령으로 여전히 저술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통이기도 하다. 1952년 6·25전쟁 때 한국교육부흥계획을 세우기 위해 미국 정부 요원으로 한국에 온 적도 있다.

이상만 고양문화재단 총감독


경기 고양시의 ‘덕양 어울림누리’는 세종문화회관을 능가하는 7만평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오페라, 오케스트라, 뮤지컬, 연극 등을 할 수 있는 어울림대극장(1218석)과 별모래소극장(374석), 전시공간인 어울림미술관 등의 문화시설을 갖추고 있다. 올 10월에는 아이스링크, 수영장, 체육관 등의 체육시설도 갖출 예정이다. 공사비만 2240억원이 들었다.


실제로 대극장을 둘러보니 무대가 객석의 2배나 되고 위, 아래로 움직일 수 있어 웬만한 뮤지컬 공연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고양문화재단 홍보계발부 박수용 부장은 “기존의 VIP석, R석, S석 등으로 나누지 않고 으뜸자리, 좋은자리, 편한자리로 나눴다”며 “객석 구조 자체가 사석(死席)이 없어 편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지난 3월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단독 초청하고, 일본 3대 오페라단인 도쿄 실내가극장이 연출한 실내오페라 ‘소네자키 연가(戀歌)’를 선보이며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러시아 줄인형극 ‘서커스’를 시작으로 연극 ‘우리는 친구다’, 체코 프라하 소년소녀합창단 등 어린이ㆍ가족 공연을 많이 유치해 평균 85%의 유료 관객점유율을 보였다. 젊은 주부가 많이 거주하는 고양시의 특성을 반영한 기획공연이 주효한 셈이다.

이상만 총감독은 “고양시는 인구가 10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커졌지만, 그동안 지역주민의 문화적 욕구를 해소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며 “관객의 열띤 호응을 보면서 지방에서도 좋은 공연을 유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성우-그 시절, 그 목소리, 그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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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terday |2007/05/20 (일)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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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에 밀려 떠돌이 방송
국민언어 생활의 한몫을 차지하는 방송관련자는 아마도 아나운서와 성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방송이 시작된 후 입체낭독으로 출발해서 현재의 밀도 있는 드라마가 전개될 때까지 마이크에 서린 입김만큼이나 시간의 먼지가 쌓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우 공채가 시작된 것은 1947년이었다. 그 해 성우 1기로 출발한 사람들은 대강 장민호, 민 구, 조남사, 최선애, 위진록, 강 영씨 등으로 현재 방송에 남아 있는 조남사(작가, 연출가)씨는 관록있는 작가로서 더 알려져 있다. 또한 장민호씨는 현재 국립극장에서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고, 연기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방송활동을 하던 민 구씨와 위진록씨는 현재 일본에 거주하며 살고 있고, 민 구씨는 재일 거류민단장으로 있다. 그 밖의 여자 성우들은 방송에서 은퇴한 후 가정으로 돌아가 생활하고 있다. 이후 48년 성우 2기를, 그리고 매해 기별로 성우 선발을 했는데, 입체낭독 일백회를 끝냈을 무렵 서울은 뒤숭숭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초조하고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괴뢰군이 미아리고개 너머까지 쳐들어 왔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6·25 발발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성우들은 제 몫을 해야만 했었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마시고……" 방송을 하는 방송인이나 국민들까지도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6·25가 터지고 방송국은 전세를 따라 대전 · 대구 · 부산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다시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불타버린 정동 방송국 자리에는 친숙하고 그리웠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방송협회건물에 방송기자재를 설치하고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무렵 방송 제목은「대북방송」,「서울 시민을 위한 프로」등으로 출연자는 복혜숙씨, 조백봉씨, 최요안씨, 조남사씨, 윤일봉씨, 서월형씨, 김신재씨, 허 영씨, 주증녀씨, 최은희씨 등이고 작가, 연출가로는 김영수씨, 최화랑씨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방송은 중앙방송국에서 서울지방방송국으로 재편되어 더욱 다채로와졌다.

우리들의 사랑방 모나리자 다방
예나 지금이나 프로가 다양해지면 가슴 부푸는 사람은 연기자들이다. 그 다채로와진 프로에는, 이를테면, 전쟁을 치르고 피폐해진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꿔줄 수 있는 정화프로와 유머가 담긴 프로들이었다. 예를 들면 매주 토요일 밤 골든 아워에 방송된 「유머 극장」은 최요안씨의 작품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소설가이며 작가인 최요안씨는 피난시절엔 마이크 앞에서 낭독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성우로 알고 있기도 하다.
어찌됐든 방송은 맥을 이어왔고, 「유머 극장」이란 프로에 등장했던 작품은 노랑꽃에, 하나둘셋, 결혼중매회사, 행복의 일번지, 부자가 되면, 보물이 있는 곳, 동지섣달 꽃본듯이, 시어머니와 달걀, 정신 세탁소 등 그 시대의 생활을 파고드는 웃음거리의 소재가 대부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요즈음 교양프로와 같은 퀴즈를 드라마 형식으로 바꾼 성인을 위한 방송도 있었다. 또한 인기 절정의 어린이 프로인「똘똘이의 모험」은 6·25전부터 시작한 프로그램으로 6·25이후 사변전에 출연했던 이인형군의 여동생 이홍재양이 뒤를 이어 어린이 프로인 「똘똘이의 모험」은 계속되었다. 당시 출연진으로는 오경자, 한옥희, 김원순, 이은주씨 등이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방송은 출연할 아이들이 일이 생겼을 때는 연출자가 갑자기 엉뚱한 아이를 데려와 연습할 겨를도 없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당하게 들어온 아이는 일단 방송이 시작되면 긴장한 탓으로 웃음 연기마저도 제대로 못할 정도여서 웃음소리 '하하','호호' 따위도 그냥 다른 성우들이 대역해주는 일도 벌어졌다. 성인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정돈되지 않았던 방송은 1953년 7월 서울중앙방송국에서 테이프와 녹음기, 레코드판이 이용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그 시절이 성우들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방송시간이 아침 5시부터 9시까지, 그리고 낮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저녁 5시부터 12시까지 장장 14시간을 그리 많지 않은 성우들이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 김성민 작 조남사 연출의「3·8선의 소」는 단막극이었지만 많은 인기를 누려 남해연씨를 비롯한 성우들은 마치 영화·연극배우 같을 정도였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과는 달리 무척 가족적이었는데 지금처럼 로비나 휴식 공간이 갖춰지지 않은 방송국 사정 때문에 성우뿐만 아니라 방송 관계자들까지도 다방(모나리자)에 모이곤 했다. 그곳에서는 배역이 결정되기도 하고, 작품 분석이나 토론이 벌어지기도 해서 사무실 역할까지 함께 한 셈이 되었다.

생방송 중에 느닷없이 '컷트!' 연발
방송국 개편이 시작되면 흔히 있어온 일이지만 6·25 이후 재편성된 방송국에서는 1954년 12월 22명의 성우들을 1기라는 명칭으로 선발하게 되었다. 이때 합격자 가운데는 신원균, 심영식, 박용기, 오승룡, 김수일, 이창환 씨 등이 있었고 여자 성우들로는 김소원, 윤미림, 고은정, 정동은씨 등이 뽑혀 첫 작품「무도회의 수첩」이 연구 발표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그 시절 만해도 방송극이 활발하지 못하던 때인 만큼 신원균씨는 시청에 근무하면서 방송일을 하였고, 김소원씨도 해무청에 재직하면서 방송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우활동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얼마 후의 일이다. 그 후 방송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침 8시30분에 출근하면 끝날 때까지 스튜디오 안에서 장장 6시간이란 시간을 방송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마이크 앞에 매달려 있자니 녹음방송, 생방송의 구분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언젠가는 무대 출신의 모씨가 대본 없이 스튜디오에 들어서며 "그깟 대본 같은 것은 난 필요없어. 몇자 안되는 거 외우면 되지"라고 호언했다. 그를 본 우리 성우들은 의기양양해진 모씨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조금 후에 방송이 시작되고 차례대로 자리를 바꿔서며 마이크 앞에서 대사를 주고받는데 그렇게 장담하던 모씨는 입을 딱 벌리고는 말을 않고 웃고만 있는 것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나직이 "선생님 차례예요"라고 속삭여주었는데, 그제서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남의 대본을 들여다보면서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진 다음이었다. 그런 순간은 조백봉씨에 의해 재치있게 음악으로 메워져서 위기가 모면되었다. 연출자였던 조남사씨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한 상태였고, 급기야 웃음보다는 무서운 긴장감으로 일관된 프로 제작이 되고 말았다. 이런 에피소드는 어린이 생방송 시간에도 벌어졌다. 한참 방송 중이던 염석주씨가 갑자기 주춤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유인즉, 대사가 바뀌고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손을 내저으며 연출자를 향해 "다시 합시다. 컷트! 컷트!"를 연발했다. 순간 복혜숙씨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미봉책을 썼다. "아이구, 깜짝이야. 별안간 웬 고함을 지르슈? 간 떨어지겠수…" 대사 중 눈짓으로 그에게 생방송임을 알렸기 대문에 이후 순서는 무사히 진행 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무척 우스웠던 일이다. 1955년 가을에는 제1회 전국대학생 방송극 경연대회가 열렸었다. 참가한 대학은 8개교였고 많은 연기 지망생이 몰려들었었다. 여기에 정치대학 팀으로 참가한 이창환씨는 연기상을 받기도 하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우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고통과 허기를 방송으로 달래며
6 ·25 이후 얼마 동안은 시국에 알맞는 드라마 즉, 피난시절에 얽힌 여러 사연들이 주를 이루었고 거의가 단막극 형태였다. 그 후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드라마가 선보였다. 성우들도 이젠 한 프로그램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되어 하루 세네편 정도는 보통이었고, 많이 출연하는 사람은 대여섯편에 출연하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되는 시절이 온 것이다. 60년에는「박서방」(김영수 작 · 이상만 연출로 주상현 · 장경일 · 윤미림 · 이창환씨 등 출연)이 많은 인기를 끌었고, 그 외에도 「사랑의 문을 두드릴 때」,「당쟁비화」등 많은 드라마가 있었다. 61년에는 그 유명한 「아낌없이 주련다」(한운사 작)가 주인공 하지송씨를 나레이터로 하여 사건 전말을 알려주는 형식으로 방송극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64년 봄부터는 5분극「김삿갓, 북한 방랑기」를 시작했는데, 북한의 실정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에게 반공사상을 굳힌다는 의도서 제작되어졌다. 이 프로는 많은 애청자들의 인기를 모았는데, 이상만씨 연출로 오정한씨, 최 흘씨, 마욱자씨, 김민규씨, 임종국씨, 김인배씨 등이 열연했다. 그 후 24년 동안 계속된 이 프로는 한 연출자에 의해 8천회 가까이 진행되면서 많은 연기자들이 참여했고 지금은 구 민씨가 김삿갓역을 맡고 있다. 방송국을 내집처럼 지내던 그 시절의 성우들은 형제자매처럼 지내면서 부족한 기자재나 모든 불편한 여건을 재치와 유머로써 극복해왔고, 어려운 시절에는 고통과 허기를 방송으로 달래며 오직 방송에 집착했다. 방송인으로서의 길을 천직으로 여긴 것이다. 애잔한 방송이 나갈 때는 방송에서도 울며, 밖에 있는 애청자들은 가슴으로 울고, 유머가 있는 방송은 전쟁과 가난에 찌들어온 애청자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제 시간이 흐르고 방송을 떠난 사람도 많지만 방송국 구석구석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스며 있다.
(글: 이혜경. 성우 KBS 방송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