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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시골 흙집 방안에서 내복을 입고 먹는 맛이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별미이자 내겐 둘째가라 하면 서러운 겨울철 보양식이다. 산란을 준비할 때라 마침 명태가 살이 토실토실 올라 있다. 한 솥 가득 끓이면 한 그릇으로 모자라 식구마다 두세 그릇을 비울 때가 많았다. 국을 먹고 있는 동안에도 당연히 밑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예고 없이 한파가 몰려오면 동태국 생각에 그 어떤 진수성찬도 이 간절함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잊을라치면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고 생태라 한들 값만 비싸지 그 맛을 재현하기가 쉽지 않고 늘 가격과 맛이 한결같다.
이렇듯 캘리포니아 해역에 이르는 날짜변경선 양쪽이 원산지인 명태(明太)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생물을 생태(生太)라 하고 얼린 걸 동태(凍太)라 한다. 황태(黃太)는 덕장에서 기화(氣化) 과정과 얼고 녹기를 수회 반복해 노랗게 발효된 것이다. 코다리는 반쯤 말려 졸여 먹는 것이고 북어(北魚)는 글자 그대로 북쪽해역 즉, 북태평양에서 나는 생선이라는 뜻이다. 건태(乾太)는 황태나 진배없지만 정성이 꽤나 생략된 덜떨어진 맨송맨송한 맛이다. 노가리는 명태 새끼를 이르는데 요즘엔 말린 명태 새끼로 바뀌었다. 수입산은 그 작은 대가리를 무슨 명목으로 잘라버렸는지 우리들 추억의 맛을 앗아갔으니 맥주집에서마저 인기가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마침 요 며칠 새 발을 동동 구르게 하고 볼과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춥다. 치가 떨린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쳐서 추워 죽겠는데 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오로지 절절 끓는 집으로만 기어들어가고 싶다. 집안에선 청국장이나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사람 발길 잠시도 멈추지 않도록 끌어간다. 뭔가는 끓고 있어야 들어가고 싶은 맘이 생기는데 국민생선 고등어가 제아무리 맛있다 한들 비린내가 덜한 동태 한 마리를 따라올까.
후루룩 먹어치우던 우리들 고깃국이 그립다. 식구가 서넛이라면 한 마리면 족하고 대여섯이면 한 마리만 더하면 너끈하다. 토막토막 동태를 자르는 생선장수의 손놀림과 손님인 내 발 구름 박자가 척척 맞다. 발끝으로 재촉을 하니 금방 탁탁 쳐서 쓸개 빼고 봉지에 담아준다. 달큰한 가을무 한 뿌리 사서 털레털레 걸음 재촉하면 사랑스러운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게다. 대가리도 국물엔 최고니 절대 빠트리지 말자. 머리엔 아가미와 혀, 골이 들어 있으니 국물을 맑게 낸다고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장도 중요하지만 실제 진한 국물을 먹고 싶으면 같이 넣고 푹 삶아내야 한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집안 제일 어른이 쏙쏙 소리를 내며 빨아먹다가 눈알은 아이에게 추억으로 물려준다.
아가미와 눈알, 턱과 껍질, 뼈가 고루 섞인다. 넓게 펴지면 칼날로 쭉쭉 모아 두어 번 더 쪼아주면 웬만한 뼈도 바스라진다. 이걸 끓이든지 생으로 하여 그냥 체에 밭이든지 상관없다. 큼지막하게 일정하게 사각으로 썬 무에 갖은 양념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한데에 두면 밤새 설컹설컹 얼면서 맛이 드니 이보다 시원하고 깔끔하여 입맛을 사로잡는 깍두기는 여태 먹어보질 않았다.
다만 미리 곤이(鯤?)가 생선 뱃속에 있는 알을 뜻하고 '이리'는 정확한 한자가 나와 있질 않으나 추측컨대 사투리로 흔히 '속창알이'나 '속창시'라 하는 야들야들한 라면면발이나 동물 골을 닮은 것쯤으로 짐작하고 이리(裏?)로 한다 치자. 이쯤 알아두면 둘을 헷갈릴 일은 아니다. 요것저것 있는 고깃덩어리를 각자 두 번은 떠먹는다 가정하고 푸짐하게 끓여보자. 뜨물이 한번 비린내를 제거했으니 생강을 맛보이기만 하고 마늘과 양파 약간만 넣고 솥뚜껑이 들썩거릴 정도로 마구 끓이면 된다.
무를 얇게 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 뿌리 한 개를 통째 들고서 저미듯 준비된 그릇에 살짝 얇게 뻐서(쳐서) 막판에 국물이 시원하게만 조금 넣으면 된다. 굳이 이렇게 흔치 않는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얇게 썬들 제 맛이 나지 않은 까닭은 두께가 약간씩 달라야만 잘 익은 쪽과 설컹설컹 익어가는 맛의 차이를 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센 불에 웬만큼 끓었다 싶으면 불순물을 국자로 몇 번 떠내고 준비해 둔 무를 넣고 2~3분만 마저 끓이다가 말라가는 썬 대파만 넣고 굵은소금-천일염으로 최종 간을 보면 뽀얀 동태국이 완성된다. 밥을 푸고 소금종지와 김치 한 가지면 더 바랄 게 없다. 후후 불며 국물을 한번 떠서 시원하게 속풀이를 하고 풀어지기 전에 이리를 '후루룩 훕' 국물 속에서 훔치듯 젓가락질을 서둘러보자. 이어 제법 큰 알 덩어리, 곤이를 씹으면 수많은 포자가 드글드글 터지는 감흥을 맛보리라.
무까지 넣었으니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맑고 순수하다. 열댓 소년소녀 살갗처럼 뽀얗다. 흰쌀밥을 한 그릇 모두 말지 말고 두어 숟가락만 말아 살코기와 함께 국물이 식기 전에 허겁지겁 떠먹고 다시 떠먹어야 마지막 남은 생선비린내가 덜하다. 아직 국솥엔 잔불이 타고 있다. 주방 가까운 쪽에 사람을 교대로 앉혀놓으면 골고루 맛있는 한 끼를 함께 할 수 있다. 밥 한 그릇에 솔솔 밀려들어오는 바깥바람도 두렵지 않게 땀을 한번 쪽 쏟고 나면 정말이지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한껏 든든하게 배부르지만 쉬 꺼지고 마니 영양 듬뿍, 소화 걱정 끝이다. 밥상 위에 나뒹구는 동태 가시 치울 일만 남았구나. 이 맛에 우린 날씨가 추워도 별 상관없는 건가. 오늘 저녁에도 맑은 동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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