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사활이 걸린 소금산지의 확보]
만주에서 남하해온 온조와 비류형제가 나라의 터전을 잡는데 부여왕으로 불리었던 북한산에 올라 사방지세를 살피면서 수도를 선정하는데, 의견이 달랐다.
온조는 지금의 서울을 가리키는 위례성에 국가를 형성했고, 비류는 지금의 인천으로 비정되는 미추홀에 국가를 만들었다.
두형제가 세운 국가가 한동안 같이 존재하였지만, 온조가 터를 잘 잡아서 나라의 주춧돌을 잘 놓았다고 판정이 나서 비류백제를 흡수하였다.
비류가 미추홀에 수도의 소재를 택한 건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연맹단계를 벗어나 고대국가를 이루는 터전을 이루는데 중요한 부국강병의 하나인 대외교역이 유리하다는 점과 소금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류는 아마도 강성한 해상국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상재의 자질을 있는 비류였지만, 수도선정에 있어서는 성공을 하지 못했다.
고구려나 신라 모두 영토팽창과정에서 맨처음 확보한 지역이 소금산지인 해안선이었으므로 백제또한 중요시한 것은 당연하다.
백제가 수도와 가까운 서해안 일대를 개척하여 소금산지를 확보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백제가 서해 방면에 진출하여 개척하였을 여러 소금산지 가운데서도 지배층이 공급받았던 소금은 인천일원이 산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금은 인간생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식품이었던 만큼, 국가의 성장 또한 부의 요체가 되는 소금산지의 확보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의 소금은 염전에서 생산되지 않고, 가마나 토기에 해수를 넣고 끓여서 결정염을 얻어내는 방식이였으므로 해변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백제가 인천방면의 세력집단(=沸流系)을 병합함으로써 소금산지를 확보하고, 소금 교역을 통해 세력을 성장시켰다는 추론까지 제기된다.
소금을 다른 나라들에게 제공해주는 대가로 재력을 키운 백제는 삼한에서 생산된 철을 수입하여 농기구를 만듬으로써 이를 통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어 다른 세력을 지배하여 두는 위성국가의 형태가 가능했다.
백제는 서해연안을 따라 계속 잠식해가면서 소금산지의 독점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노령산맥이북의 마한제국이 가지고 있던 중국과의 해로를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통합의 규모가 소금통로를 통한 교역체제의 범위에 의해서도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다.
소금이 염전에서 생산되지 않고 결정염을 얻어내는 방식이었으므로, 이를 효과적으로 얻기 위한 대량생산과 분업화가 추진되어 해수를 넣고 끓여야 하기 때문에 소금 결정염을 만드는 인원, 연료채취와 화덕, 가마를 이용하여 화덕을 만드는 인원으로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낙랑군에 거주하는 한인 수천명이 진한에서 벌목을 하다가 붙잡혀 노예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적이 있다.(삼국지 한조)
그러므로 제염산업은 분업화를 통하여 사회분화와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생산지를 먼저 확보한 나라가 그 지역에서 맹주가 된 경우는 신라와 가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소금산지의 확보는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만한 고대국가에서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였다.
■ 일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을 이루며 계곡속에 자리잡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때(577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백제시대에 세워진 선운사 주변에는 그 당시 도둑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검단스님이 도둑들에게 천일염 제조방법을 가르치고 바르게 살 터전을 만들어 주자 자리를 잡은 도둑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새사람이 되어 스님께 은혜를 갚기위해 그 마을을 검단리라고 부르고
봄 가을에는 절에 소금을 갖다 바쳤는데, 그 소금을 보은염(은혜에 보답하는 소금)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엮었다고 전해지는《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의약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약물 중독의 해독제로 소개되어 있고, 그 밖에 BC 27세기 재상 숙사씨(宿沙氏)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다.
신라나 백제도 소금을 생산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백제 초기부터는 현재의 공촌동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을 계양산에 있는 고개를 넘어 서울 신정동 토성을 거쳐 운반했다고 한다.
신정동 토성은 백제가 한강변에 나라를 세우면서 소금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쌓은 초기토성으로 추측되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