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움직인 주몽, 그들의 운명은? [스타뉴스] 2006-10-18 11:32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김관명 기자]
주몽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MBC 월화사극 '주몽'의 느린 전개에 불만이 쌓였던 시청자들이라면, 17일 제43회 방송분에서는 어느정도 숨을 쉴 만했다. 주몽(송일국)이 부여에 정착한 옛 진번 임둔 유민들을 '색출'로 위장, 끌어모으며 고구려 건국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주몽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졸본에 고구려를 건국할 것이며, 대소(김승수)는 이 철썩같이 믿었던 주몽의 '배반'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 또한 부여와 계루국에 남는 예소야(송지효)와 유화부인(오연수), 소서노(한혜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김부식의 정사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운명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후 처음으로 운명이 갈리는 이가 바로 생모 유화부인이다. '동명성왕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끝내 부여를 떠나지 못한 채 아들의 임종도 없이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때 '그 나라 왕 금와가 그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하고 드디어 그의 신묘를 세웠다'.
그 다음엔 예소야가 등장한다. 5년 후다. '동명성왕 19년,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세워 태자를 세웠다'. 여기서 어머니는 물론 예소야다. '유리명왕은 주몽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예씨이다'. 물론 유리왕은 향가 '황조가'를 지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면 대소는? 주몽 재위시에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지만, 아들 유리왕 14년에 나온다. '14년, 봄 정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방문하고 볼모교환하기를 청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주몽을 미워했던 대소가 고구려는 물론 그 아들 유리왕까지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유리왕 28년, 가을 8월에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책망하여 말하였다. "우리 선왕(금와)이 그대의 선대임금 동명왕(주몽)과 서로 사이가 좋았던 터에 지금 우리 신하들을 이 곳에 도망하여 오도록 유인하여 성곽을 만들고 인민을 모아 나라를 이루려 하고 있다..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절이요,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도리이다"'.
주몽에 대한 금와의 편애, 한나라 노예로 보낼 유민을 색출하랬더니 '인민'을 모아 부여를 탈출한 주몽에 대한 대소의 앙심이 적나라하다. 이런 대소도 유리왕의 셋째아들 무휼(대무신왕) 통치 당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니 안되긴 안됐다. '대무신왕 5년, 괴유가 칼을 뽑아들고 부여의 1만여 군졸이 넘어지고 쓰러져 부지하지 못하게 되매 이때에 바로 내달아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소서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일설(一設)' 형식으로 나온다.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를 주몽, 어머니를 (소서노가 아닌) 한 왕의 딸이라고 기술한 백제본기와도 내용이 다른데다, TV사극 '주몽'의 지금까지 이야기와도 달라 이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김부식도 이런 소서노 이야기를 전하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소서노에 얽힌 '일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백조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후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고 주몽은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결국 소서노의 아비가 연타발이고, 그녀는 우태와 결혼했으며, 훗날 주몽과도 인연을 맺었다는 내용은 전후시기만 다를 뿐 드라마와 삼국사기나 엇비슷하다. 어쨌든 이 일설에 따르면 소서노의 아들이 백제를 세운 것이니 그녀의 삶 또한 대단하기로는 주몽이나 대소 못지 않다.
그러면 주인공 주몽은? 대소가 주몽을 미워해 죽이려 했고, 유화부인이 주몽에게 부여를 떠나라고 한 것은 드라마나 삼국사기 기록이나 매한가지다. '주몽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몽은 이에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더불어 벗을 삼아 엄호수까지 갔다.."
주몽이 옛 진번 임둔 유민들을 규합해 이끌었다는 드라마 내용은 앞서 '유리명왕'편에서 유추한 셈이다. 어쨌든 22세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건국 19년 가을에 향년 40세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예소야 사이에서 난 아들 유리가 고구려에 온 지 5개월 후였다.
PS. 한나라 볼모로 가게 된 영포(원기준)는 어떻게 될까. 제작진에 따르면 영포는 한나라 수도 장안에 가서도, 그것도 술자리에서도 푸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영포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금와왕의 아들이 7명이었다, 이들이 주몽을 미워했다 등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몽의 손자인 대무신왕 5년 '삼국사기'에는 이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대소가 죽은 후의 일이다.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자기를 왕이라 하니 이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이다.' minji2002@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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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수급잃은 해모수 앞에서 오열! 브라운관 안팎 눈물바다
5시간 10분전 업데이트 | 기사제공 : |
[뉴스엔 고홍주 기자] 주몽(송일국 분)이 친부 해모수를 떠올리며 통탄의 오열을 했다 17일 방송된 MBC 월화극 ‘주몽’에서는 대소(김승수 분)가 양정(윤동환 분)에게 해모수(허준호 분)의 수급(싸움터에서 벤 적장의 머리)을 바쳤다는 사실을 안 주몽이 오열을 금치 못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대소는 주몽과 부여의 태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을 당시 소금교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토성에 찾아갔지만 양정의 마음을 쉽사리 얻지 못하자 ‘해모수의 부관참시’를 감행, 해모수의 수급을 양정에게 거래의 조건으로 내세운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금와의 충신 송주(김원석 분)의 고백으로부터 밝혀졌다. 송주는 주몽에게 대소의 협박에 못이겨 해모수의 묘가 있는 위치를 알려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 죽음으로써 용서를 구하려 했다. 주몽은 해모수의 묘 앞에서 친부의 수급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한나라와 대소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하고 통탄의 눈물을 쏟았다. 이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해모수를 떠올리며 통곡하는 주몽의 눈물에 나조차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주몽의 한에 감정이입이 된 한 회였다” “천무산 자락에서 오열하던 주몽, 정말 뭉클했다” “보는 내내 어찌나 슬프고 안타깝던지 주몽의 눈물에 같이 울었다”는 소감을 적었다. 한편, 이날 방송에서는 해모수의 수급건이 밝혀지면서 주몽이 본격적으로 해모수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 한나라의 노예로 보내기 위해 색출했던 유민들을 이끌고 부여를 떠나려는 준비 과정이 전개됐다. 시청률 조사회사 TNS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17일 방송된 ‘주몽’은 전국 기준 42.4%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16일 43.1%, 10일 43.6%에 비해 다소 하락한 수치다. 고홍주 becool@newse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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