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7) 하진부와 강무장 | ||||
입력: 2006년 09월 01일 15:09:00 | ||||
눈을 뜨니 창문에 빗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푸른 새벽 하늘에 한 점 붉은 기운이 스미는 황홀함을 기대하며 눈을 떴건만 먼 산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땅은 살포시 젖은 것이 밤새 도둑비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대산과 박지산에 피었다간 스러지는 안개의 향연 또한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창틀에 턱을 괴고 천변만화의 신비로운 모습에 얼마나 취해 있었을까, 슬그머니 동쪽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했지만 해는 머뭇거릴 뿐 단박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쭈뼛거리며 구름 뒤에 숨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저지레를 부리고 할머니 치마폭 뒤에 숨어서 조심조심 어머니 눈치를 살피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도 같았다. 여름 큰 비가 끝나고 개부심마저 지났지만 마치 건들장마인 양 비는 이어지고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내 발길은 강을 따라 걸으려고 하니 이 무슨 운명인가. 진부 장터거리에서 든든한 아침으로 국밥을 먹고 시가지를 벗어났다. 오대천에 잇대어 있는 진부서낭당을 지나 정선, 곧 나전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7월15일, 물난리가 났을 때 이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집은 지붕만 남기고 토사에 파묻히거나 부서졌고 도로는 끊어져 용케 빠져 나온 사람들조차 거센 물결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모습이 너무도 또렷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나 또한 오도 가도 못한 채 동행한 지인에게는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곧 넘칠 듯 몸부림치는 오대천을 바라보며 불안에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찌 그 짧은 순간의 내 불안함을 집을 잃고 가족마저 잃은 사람들의 마음에 견주겠는가. 잠시 오대천을 따라 걸었을까, 나는 걸으려던 생각을 접고 말았다. 논은 쓸려 사라지고 밭은 언제 그곳이 밭이었는지 가늠할 길 없이 토사에 묻혀버렸으며, 그날 물결에 떠밀려 내려온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잔인한 풍경 앞으로 걸어 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강은 아름답거나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물은 무자비했으며 그날 내가 본 것은 겨우 코끼리 다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려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 왔다. 그날 길이 끊어져 가보지 못했던 상월오개마을에서부터 거문리까지 돌아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진부에서 속사로 향하다가 상월오개마을로 접어들어 오대천가의 외거문리로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나는 그저 탄식만을 내놓을 뿐 말을 잃고 말았다. 이 길에서 봄이면 하얀 감자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밭을 볼 수 있음에 그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고개 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질박한 아름다움의 풍경이 무엇인지 알려주던 고즈넉한 마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내 기억 속의 정경은 그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초토화된 스산한 풍경만이 끝없이 펼쳐졌던 것이다. 외거문리, 인락원에서 나전 방향으로 1㎞남짓이면 청심대가 있지만 그곳으로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새벽에 길을 나서면서 청심대에서 바라보는 오대천의 아름다운 물줄기를 만끽하려고 했던 내가 순간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그날의 일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고요히 흐르는 오대천가에 자동차를 세웠다가 마음이 다시 급해졌다. 그곳, 봉산리는 어떤지 자못 궁금했던 것이다. 진부방향으로 자동차를 몰아 신기리에서 봉산재로 향하기 시작했다. 골짜기로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가 불통인 곳, 툭하면 자동차를 타거나 혹은 걷기도 하고 또 자전거를 탄 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 아닌가. 길섶에 놓인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도 기억할 만치 말이다. 더구나 봉산재를 넘어 자개골을 걸어 정선의 구절리로 나가면 그곳이 곧 아우라지로 흘러들어 또 하나의 한강 줄기를 이루는 송천의 상류에 닿을 수 있는 길이어서 더욱 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이 땅의 누군들 그곳에 다녀 온 사람들이라면 입을 모아 그 황홀경에 대해 노래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넘실거리는 숲이 바다를 이루고 한 가닥 험한 길은 그 사이로 흐르는 계류를 따라 이어졌다가 고개 마루에 걸려 있던 그 곳, 그 순정한 장면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나는 골짜기로 접어들어 봉산리까지 가는 12㎞의 길에서 놀란 눈이 더욱 커졌고 벌어진 입은 아예 다물 수가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장면들은 그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고 길은 어디 한 곳 온전한 곳 없이 모두 새로 닦은 자갈길이었다. 순간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았다고 하면 지나칠까.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던 계곡은 폭이 대여섯 배는 됨직하게 넓어졌고 깊이 또한 가늠할 길 없이 푹 패어 있었다. 필시 이곳으로 바다와 같은 큰물이 요동을 치며 흐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 몇 마디 말이며 몇 줄 글로 그 처연한 아픔의 장면을 위로할 재주가 나에게는 없다. 그저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 봉산천을 빠져 나와서도 무심하게 흐르는 하진부의 오대천 곁에 자동차를 세우고 망연히 생각에 잠겼을 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연에게나 사람에게나 골이 깊은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상처가 난 그 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설사 그것이 아문다 하더라도 흔적은 남는 법, 나라 안에서 드물게 남아 있던 보물과도 같은 곳이었건만 이제 내 기억은 깡그리 지우고 지금의 모습에 대한 사랑을 또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 싶었다. 비록 그의 겉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아름다움 자체를 잃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처럼 진부는 밖으로는 1,0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였고 그 한 가운데를 오대천이 뚫고 지나가는 형국이다. 산들은 오대산과 마찬가지로 모두 육산이어서인지 숲이 빼어나고 그 사이를 흐르는 계류는 어느 곳이나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러한 천혜적인 자연조건 덕분에 산짐승들이 많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이 참가하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가 벌어지던 강무장(講武場)이 있기도 했던 곳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3년인 1421년 2월25일, 상왕인 태종과 함께 강원도로 강무에 나선 세종이 지금의 양평, 여주, 원주, 횡성, 안흥, 방림 그리고 대화를 거쳐 진부에 다다른 것은 3월4일이었으며 3월6일까지 진부에 머물며 강무를 하고 3월7일에 한양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진부에 머무는 동안 상왕인 태종이 삐친 것이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3월5일, 태종이 비가 오는 가운데 효령대군 이보(李補, 1396~1486)와 우의정이었던 용헌(容軒) 이원(1368~1430) 그리고 관찰사인 목진공(睦進恭)과 함께 신당산(神堂山)에서 사냥을 즐길 때였다. 날이 궂어 우의까지 입고 사냥에 열중하던 태종이 몰이에 성공하여 활을 쏘려던 순간 그를 따르던 무신들이 주제넘게도 태종이 쳐 놓은 포위망 안으로 말을 타고 들어와 갇혀 있는 짐승을 쏘아버린 것이다. 눈앞의 사냥감을 황당하게 잃은 태종은 진노했고 화살의 주인을 찾은 즉, 첨총제(僉摠制)인 심보(沈寶), 김월하(金月下), 이원길(李原吉)과 상호군(上護軍)인 양춘무(楊春茂) 등 일곱 사람의 화살이었다고 한다. 상왕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세종은 그들에게 갓을 벗고 걸어가게 했으며 환관인 엄영수(嚴永守)와 유실(兪實)도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았으므로 그들 또한 갓을 벗기고 손을 묶어 걸어가게 했다. 그 다음날인 3월6일에도 왕의 일행은 송동산(松洞山)에서 몰이를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상한 상왕은 사냥터로 나서기는 했지만 아예 활과 화살을 가지지도 않은 채 개를 풀어 짐승을 잡는 것을 구경만 했을 뿐이라고 하니 단단히 삐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지 싶다. 강무장으로 지정된 후 그에 따른 폐단도 만만치 않았다. 세종 31년인 1449년에는 경호(鏡湖) 최치운(1390~1440)의 아들인 최진현(崔進賢)이 진부현 강무장의 지정을 풀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고을 주민들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기 때문이다. 강무장으로 지정되면 그 안에서 수렵은커녕 농사조차도 짓지 못하게 했으니 눈앞에 펼쳐진 넓은 땅을 노루와 사슴에게 내준 채 주민들은 피폐하고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발전은커녕 고을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문신인 권적(權適, 1094~1147)이 이곳을 지나며 “옛 역 이름이 진부인데, 진부라는 명칭은 무슨 뜻일까. 눈이 무더기지니 산에 옥(玉)이 가득하고, 버들이 스치니 길에 금(金)이 많아라, 시내에 잉어는 붉은 비단이 뛰는 듯, 마을 연기는 푸른 비단을 흩는 듯하다”라고 노래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곤궁한 산간마을의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싶다. 〈이지누〉 |
[한강을 걷다]1,000m급 고봉들 지나 조양강에 합류 | ||
입력: 2006년 09월 01일 15:08:52 | ||
신기리에서 시작되는 신기천과 봉산천은 박지산(1,391m), 두루봉(1,225.6m), 상원산(1,421.4m), 옥갑산봉(1,302m), 다락산(1,018m), 발왕산(1,458.1m) 등 1,000m급의 고봉들 사이를 흐른다. 그 중 신기천은 진부면 신기리에서 오대천에 합류하며 봉산천은 자개골을 지나 정선의 구절리로 흐른다. 신기리 들머리에서부터 봉산재를 지나 봉산리, 봉두고니까지는 12㎞남짓 하며 봉산재를 기준으로 신기리로 흐르는 골이 신기천이며 봉산리 쪽으로 흐르는 골은 봉산천이다. 또 봉산리, 봉두고니에서부터는 자개골이라 불리며 끝머리인 구절리까지는 14㎞남짓 하지만 골을 따라 가는 길이므로 평탄하다.
더구나 폐광촌인 구절리 앞을 흐르는 송천은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태백의 검용소로부터 흘러온 암강인 골지천과 만나며 숫강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니 한강에 관심이 있어 답사를 한다면 반드시 이 골짜기를 걸어 봐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항목이다. 오대산 우통수나 태백의 금대산 검용소 중 그 어느 곳을 발원지로 생각하더라도 상관없다. 신기천은 오대천으로 또 봉산천과 자개골은 송천으로 흘러들어 골지천과 합하여 정선군 북면 나전리 앞을 흐르는 조양강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오대천이나 골지천이라는 천(川)의 이름을 버리고 강(江)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그만큼 물줄기가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혹, 봉산리에 가거든 하루 묵어서 가는 일정을 잡는 것도 좋다. 한적하기만 한 마을에서 허드렛일이라도 거들고 거문골(琴谷)이 어디냐고 물어보고 애련(愛蓮)이라는 기생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해 봐라. 그리고 별을 보고 누워 귀 기울이면 애련이 퉁기는 거문고 소리가 골짜기에 가득할 것이다. 〈이지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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