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8) 청심대 | ||||||
입력: 2006년 09월 08일 15:30:02 | ||||||
-발밑 벼랑 못보니, 삶과 닮았구나-
하진부 일대를 톺아보고 다닌 어제는 마음이 헛헛했다. 그 탓에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하고 온 밤을 뒤척이고 말았다. 지금과 같은 생량머리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봉산리로 향하던 그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의 잔상이 떠올랐다간 스러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 골짜기를 찾을 때마다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반겨주던 나무 한 그루며 땀을 훔치며 걸터앉던 바위에의 그리움이 어찌 사람에 대한 그것보다 덜 하겠는가. 모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연민은 결코 한 잔 술로 떨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끈질기게 마음속에 잠상(潛像)으로 남아 불현 듯 샘물처럼 솟구쳐 나를 관통하며 뒤흔들어 놓는 무엇이다. 그에게 흔들리는 밤은 언제나 길었으며 어제도 다르지 않았다. 해가 동창에 비쳐들고도 한참 후에나 길을 나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제 자동차로 지났던 길을 되짚어 인락원(仁樂院)으로 향했다. 인락원이 있었던 마평리 일대는 아직 복구공사가 한창인 때문인지 오대천으로 흘러드는 물은 맑은 하늘빛을 머금기는커녕 누런 흙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신도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이 깃들여 살던 곳을 아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버리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이어져 오는 옛길 언저리의 모습들은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곳 또한 오대천을 따라 정선의 나전리로 향하는 길에서 처음 만나는 저잣거리와도 같은 모습을 한 것은 길 떠난 이들이 묵어가던 인락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락원이 있던 자리는 한양으로 오가던 관동대로의 길목이었다. 강릉에서 대관령의 대령원을 지나고 횡계와 진부를 거쳐 인락원에서 모로현(毛老峴), 지금의 모릿재를 넘어 평창의 대화로 향했으니, 큰 고개를 넘기 전에 나그네들이 머물렀던 곳인 셈이다. 인락원에 대한 기록은 드물지만 호를 송재(松齋)로 쓰던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우(1469~1517)가 1510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1511년 강원도 일대를 유람한 후 쓴 ‘관동행록’(關東行錄)에 ‘아침 일찍 인락원으로 향하다’라는 시로 그 흔적을 남겨 두었다. 그는 진부에서 인락원으로 향하는 길을 두고 한 가닥 길이 긴 절벽 사이로 뚫렸으며, 원은 큰 바위 아래에 기대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드문드문 상점들이 문을 열었으며 여남은 호 정도의 집들이 머리를 맞댄 채 부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는 권한다. 이 길을 걷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아래에서만 올려다보고 지나치지 말 것을 말이다. 힘에 겹더라도 부득부득 올라보라. 과연 이곳에 오르지 않고는 오대천을 걸었다고, 봤노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볕은 순하고 하늘은 싸리비가 쓸었는지 구름이 가지런하게 떠가고 있었다. 아련히 내가 걸어 온 마평리가 보이고 길은 한 줄기 띠처럼 강물 곁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비록 강물은 황토 빛이지만 저 강물이 하늘빛을 머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 것은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러 다시 이곳에 오를 핑계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길 떠나서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나의 탐닉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다. 그것은 계절을 달리해서 또 서로 다른 시간에 만나는 서로 다른 장면에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반복이다. 그 반복이 가져다주는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아주 단단하다. 그것은 나의 감성이 굼뜨기 때문이며 그렇게 보고, 다시 보고 또 보며 깨어난 감성은 결코 저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나에게 오늘 물빛이 탁하면 그것대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정자 마루에 벌렁 누워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쏘다니기보다 으늑한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웃자라 시야가 막히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고요함을 만끽 할 수 있으니 계곡(谿谷) 장유 선생의 시 한 편을 떠 올렸다. 비록 이곳에서 지은 시는 아니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시편이다. “정자 아래 맑은 강물 백 길도 넘고(亭下澄江百丈深) / 군데군데 시골 마을 푸른 숲을 끼고 있네(數村籬落帶靑林) / 맑게 갠 날 산 능선은 수묵화를 펼쳐 놓은 듯(連山霽色開圖畵) / 연무 깔린 먼 들판 한눈에 들어오네(逈野煙光入瞰臨) / 내 몸 말고 어디에서 도를 찾으랴(身外不須勤覓道) / 세상에서 그 누구와 마음을 논해 볼까(世間誰與共論心).” 아마도 장유 선생은 어느 높은 강 위의 정자에 앉아 스스로와의 대화에 몰두했었나 보다. 그렇게 나 또한 생각이 깊어져 정자 근처를 배회하느라 늦은 오후가 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동쪽, 박지산에서 건들거리며 다가 온 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가거나 서쪽, 모릿재를 넘어 온 선들바람이 몸을 감싸도 모른 체 했으며 오로지 문필봉 아래를 감돌아 흘러오는 오대천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자가 있는 곳은 손바닥만한 공간이 있을 뿐이지만 바로 코앞에 우뚝 솟은 예기암(禮妓巖)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면 북쪽 문필봉에서 흘러 온 오대천이 남쪽으로 흘러 나가는 모습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으니 오대천 가에 이처럼 빼어난 조망을 지닌 곳은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덮을 수는 없다. 고요하고 으늑한 정자에 머무노라니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되 머릿속에는 그간 살아 온 삶의 궤적이 그려지고 그 궤적은 씁쓸할 뿐 유쾌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앞으로 그려 낼 궤적은 그나마 지나 온 그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지만 삶속에서 그것을 가늠하여 제대로 처신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저 아래로 흐르는 오대천처럼 지나 온 궤적은 이미 알 수 있으되 앞으로 흘러 갈 강물이 그려 낼 궤적은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망연히 이미 지나온 물길과 앞으로 흘러 갈 물길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 말이다. 고개 돌리면 지나 온 곳이요, 돌아서면 앞으로 가야 할 물길이건만 그 길은 모두 구절양장으로 휘어있어 도무지 앞을 내다보거나 쉽게 되돌아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자칫하면 앞으로 가야 할 길뿐 아니라 이미 지나온 곳조차도 어떻게 지나왔는지 잊어버릴 지경이다. 더구나 양쪽은 그나마 뚫렸으되 깎아지른 벼랑 탓에 내가 서 있는 발밑은 아예 볼 수 없으니 그 아니 답답하겠는가. 분주히 어디론가 향하여 가다가 멈추어 서는 것도 쉽지 않지만 자기의 발밑인 지금 바로 여기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은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것만 잘 헤아려도 삶은 한결 아름다운 순간들로 점철되지 않겠는가.
모릿재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대화에서부터 가파르게 올라서는 고개의 끝에 서면 그 누군들 이곳이 첩첩산중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인적은 드물어 고요하고 지난 비에 터져 나간 계곡들의 상처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4㎞ 남짓 내려오자 청심대가 눈앞을 가로 막고 섰다. 깊은 산중을 빠져나와 마주치는 물줄기와 우뚝 솟은 바위는 몹시 매혹적이었으며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다시 청심대에 올라 어둑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바로 곁을 에돌아가는 자동차 소리가 잠시 멈추면 간혹 개 짖는 소리만 멀리 들릴 뿐 물소리조차 이곳까지 올라오지는 못했다. 그 때문인가. 이곳을 지나친 시인묵객들은 한결같이 호젓하게 솟아오른 청심대의 높이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호를 십청헌(十淸軒)으로 쓴 김세필(1473~1533)은 청심대는 백척간두와도 같아서 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으며, 바위 아래는 아득하여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굼뜨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정작 두렵고 아득한 것은 청심대의 높이가 아니라 내 마음의 높이이자 깊이이다. 그것, 어디에 가면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이지누〉 |
[한강을 걷다]애틋한 기생의 전설 |
입력: 2006년 09월 08일 15:30:16 |
오대천 가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이 청심대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강릉대도호부부사로 있던 양수(梁需)가 한양으로 돌아갈 무렵인 1418년부터이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병조 참의로 있던 양수가 강릉대도호부부사로 임명된 것은 1412년인 태종 12년이다. 그 이전, 양수가 형조참의로 있을 때 잘못 내린 판결에 따른 좌천이었던 것이다.
강릉에 머물던 그는 정실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 내용 또한 같은 해의 실록에 나와 있으며 자식이 없음을 안타까워 한 양수가 강릉에 있는 동안 청심이라는 기생과 정을 나누었다. 드디어 임기가 끝나 떠나는 양수를 잊지 못한 청심이 대관령을 넘어 오대천까지 배웅을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부사 일행이 오대천 가의 경관이 빼어난 높은 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하는 동안 아쉬움을 달래지 못한 그녀가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기생의 이름 따서 청심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대 뒤의 정자는 진부의 남상철옹이 1927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 아래는 청심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인락원은 59번 도로를 따라 거문리로 들어가는 초입의 오대천 가에 있는 마을이다. 강을 따라 가는 길이지만 옛글에 따르면 벼랑 가운데로 길이 뚫려 있었다고 하니 진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나그네들이 묵어 갈 수 있는 곳을 마련했던 것이지 싶다. 인락원에서 청심대를 에돌아 모릿재로 향하면 고개 아래에 모로원이 있었으니 그곳 또한 인락원에서 멀지 않지만 산이 험한 탓에 쉬어 갈 수 있는 곳을 만들었던 것이리라.
모릿재는 진부에서 대화로 혹은 그 반대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며 진부로 드나들었던 왕의 거둥길에도, 혹은 과거를 보러 오가던 선비들이며 장꾼들도 모두 이용했던 길이다. 그러나 신작로가 대화에서 장평, 그리고 속사로 이어지고 고속도로마저 그 곁으로 뚫리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길이다. 지금은 비록 지난 여름 입은 수해 때문에 길이 고르지 못하지만 한번쯤 가보기를 권한다. 더구나 모릿재를 넘어서 맞닥뜨리는 청심대와 오대천은 색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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