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6) 방아다리 약수와 탑동리 삼층석탑 | ||||||
입력: 2006년 08월 25일 15:10:46 | ||||||
월정 삼거리에서 6번 국도를 따라 진부로 향하는 길은 예전부터 강릉에서 한양이나 혹은 그 반대로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인 관동대로, 곧 평해대로의 한 부분이다. 경북 울진군의 평해읍에서 시작된 길은 지금의 7번 국도인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강릉에 닿고 다시 대관령을 넘어 횡계를 거쳐 월정 삼거리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오대천 물길은 진부의 청심대를 바라보며 정선으로 흘러가지만 관동대로는 청심대를 에돌아 장평 그리고 대화를 거쳐 안흥과 원주, 양평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사람이 다니던 길이나 물길이나 모두 서쪽, 곧 한양으로 이어졌지만 진부에서 서로 헤어진 길은 한양에 거의 다다른 양평의 양수리에 가서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삼거리를 지나 진부로 향하는 길가의 밭에서는 여름내 무지막지하게 퍼 부은 큰 비를 용케 견딘 파 수확이 한창이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 울긋불긋한 파라솔을 펼쳐 놓고 그 아래에 앉아 파를 다듬건만 향긋한 파 냄새는 길 위에까지 올라와 발길을 멈칫거리게 했다. 이 일대는 드문드문 논이 있을 뿐 대파, 양파 그리고 당근과 감자와 같은 밭작물이 주를 이룬다. 옛사람들이 횡계에 대해 말하기를 4월이 되어서나 얼음이 녹고, 8월이면 이미 서리나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곡식이라고는 귀리만을 심는다고 했으니 진부는 그곳과 맞닿은 곳이니 크게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도 새벽에 산으로 들어가면 결코 20도를 넘지 않는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곳이니 말이다. 월정 삼거리에서 6㎞ 남짓, 오대천 물길 곁으로 걷다가 가우 삼거리에서 물길을 버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탑동리에 석탑이 있는가 하면 척천리에는 방아다리 약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골짜기로 접어들자 길섶에는 노란 원추리가 하늘거리고 벌개미취가 연보라색 꽃을 피워 놓고 지친 다리를 붙들었다. 그도 한 철인데 어쩔 것인가. 그가 한 철이면 나에게도 한 철인데 말이다. 마음껏 그들과 어울렸다가 탑동리로 향했다. 탑동으로 가는 길에도 파 수확이 한창이어서 좁은 골짜기는 파 냄새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양배추 밭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가 한갓진 정경을 내놓았다. 하지만 수해로 인한 험한 풍경을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마음은 심란하고 풍경은 스산함이 배어 있었다. 탑은 마을회관 곁에 있었으며 삼층이다. 한눈에 봐도 고려 중기 즈음의 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탑 전체의 비례가 제법 홀쭉하며 안정된 삼각형보다는 일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중기단의 상대갑석이 연화문으로 둘러져 있는 연화대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굄돌을 사용해 탑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형식이다. 굄돌은 따로 둔 것이 아니라 연화대 위에 잇대어 조각해 놓았으며 연화대의 네 모퉁이에는 앙증맞은 귀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기도 하다. 또한 하대 중석에는 형체가 희미하기는 하지만 안상(眼象)이 각 면마다 2개씩 모두 8개가 조각되어 있기도 하니 그때 즈음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상륜부의 노반이며 복발도 남아 있어서 탑의 형체는 온전하지만 탑 외에는 절에서 사용했던 다른 석물을 찾아보기가 힘들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조차도 이곳에 있었던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아쉬운 일이다.
흥겨운 마음으로 방아다리 약수로 향했다. 그러나 떠돌아다니면서 이 맛 저 맛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음미했지만 아직도 요원한 것은 물맛이다. 그것까지 가늠할 줄 알면 더할 나위 없으련만 나의 둔감한 미각으로는 물맛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물을 어디 맛으로만 먹는가. 정성 가득한 마음으로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물이다. 마침 지금이 이른 새벽이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이슬까지 머금었을 첫물 한잔 떠서 바위 위에 놓아두었을 것을 말이다. 그리고는 내가 아는 사람 모두 오늘 하루만이라도 복 많이 받으라며 빌었을 것이다. 새벽 첫물, 그것은 정화수(井華水)이다. 요새 사람들은 그저 돈이나 많이 내놓아야 정성을 크게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옛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새벽마다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뒷마당 한 쪽에 떠놓은 맑은 물 한 그릇과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전부였지 않았겠는가. 그깟 물 한 그릇 놓고 천지신명을 상대하려 한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옛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정성이면 충분했다. 그들이 떠놓은 맑은 물 한 그릇은 사실 따지고 보면 신에게 드리는 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흐트러진 마음 따위를 신을 대하기 전에 다잡기 위한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사람들에게 신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맑은 정화수에 비친 그들의 맑고 담백한 마음이었지 않았겠는가.
빼곡한 전나무 숲길을 걸어 다다른 약수터, 물부터 한 잔 들이켜고 용신당을 기웃거렸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전에 같았으면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고 그나마 한 잔 물이지만 그것을 용신당에 올리는 사람들을 적잖게 봐 온 터였다. 하지만 용신당 위에 있는 산신당의 문도 닫히기는 마찬가지여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말인즉 약수가 있는 일대의 습기가 너무도 심해 나무로 지은 용신당 안이 상한 탓이라고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용신당 안에 신체(神體)로 모신 이는 할머니다. 용신할머니인 것이다. 그것은 약수의 발견 설화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방아다리 약수의 발견설화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여자와 관계된 사실성에 입각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남자와 관계된 현몽성(現夢性)에 따른 것이다. 방아다리라는 지명과 무관하지 않은 여성과 관계된 설화의 이야기는 이렇다. 화전을 일구며 살던 가난한 아낙네의 집에는 절구가 없었단다. 그래 집 근처에 있던 움푹 파인 돌에다 곡식을 넣고 찧어 먹곤 했는데 하루는 곡식을 찧다가 절구통처럼 생긴 바위가 갈라지면서 그곳에서 물이 솟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물이 지금의 약수라는 것이다. 곧 방아를 찧다가 발견한 약수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꿈이 개입함으로써 신성성(神性性)이 강해지는 이야기인데 팔십년 전쯤, 몸이 좋지 않았던 경상도 출신의 이씨가 산수가 수려한 이곳에 이르러 지친 몸으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산신령은 몸을 치유하려면 그이가 잠자고 있던 바위를 석자만 파 보라고 했는데 과연 그곳에서 물이 솟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내가 용신당 안을 들여다봤을 때도 용신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진 용신도는 없었다. 떡하니 용을 목에 휘감은 할아버지가 그려진 용신도가 걸려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약수터에 기도하러 오는 이들이 많아 그들에게 물어봐도 용신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진 용신도는 자신들이 본적이 없으며 대신 약수를 지켜주는 이를 약수할머니라고 하고 있었으며 약수가 솟아나는 샘을 ‘솟을용궁’이라고 부른다고 했었다. 일제강점에서 벗어 난 직후까지도 이 약수를 위한 별신굿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샘이 그저 샘이 아니고 흐르는 물이 그저 물이 아닌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월정사 앞에 있는 금강연에서도 고을의 관원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물 한잔을 다시 들이켜고 10㎞를 걸어 나와 물길과 함께 상진부에 닿았다. 진부는 작은 곳이긴 하지만 상진부와 하진부로 나뉘어져 있다. 오대산 쪽으로 치우친 곳이 상진부이며 지난 물난리에 큰 피해를 본 곳은 하진부 일대이다. 아직 오대천을 건너는 다리에는 그날의 흔적이 걸려 있었다. 더구나 하진부를 지나 청심대로 가는 길에는 끊긴 도로를 임시로 복구해 놓은 곳들이 산재해 있으니 이제부터는 마음이 편치 않은 길이 될 것만 같다. 〈이지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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