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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아파트촌과 마주한 동편마을은 농가모습을 간직한 자연부락이다. 여름이 온 듯 후텁지근한 한낮, 동편마을 끝자락 도로변에는 물레방아가 유유히 돌고 있었다. '동편마을입구 관양동 청동기 문화유적지 70m→'란 안내판을 따라간 산자락. 싱그러운 초록이 물결치는 유적지에는 까치와 찌르레기의 함성만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빽빽한 참나무를 사정없이 휘감은 담쟁이 넝쿨과 함께 사방은 온통 태고의 원시림을 보는 듯 울창한 숲이다. 과연 여기가 도심 속 안양이란 말인가! 청동기 유적지 발굴과 복원
옛 삶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생활 도구들이 유구에서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종류별로 선사시대의 토기류와 석기류, 조선시대의 자기류 등이 출토됨에 따라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복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발굴된 2기의 청동기주거지 유구는 올해 3월, 원형을 복원하여 시민들을 위한 역사와 문화재 교육 공간으로 완공되었다. 능선을 따라 오르자 호젓하고 나직한 구릉지대에 위치한 3, 4호 주거지와 안내판이 보였다. 원래는 지붕이 갈대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4호 주거지는 볏짚으로 내부를 볼 수 있게 절반을 복원한 상태였다. 보호각 내부에 조성된 반각 움집은 청동기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바닥은 단단하게 불다짐으로 다졌으며 둥글게 파인 기둥구멍과 벼, 보리, 조, 수수, 콩 등의 곡물을 저장했을 둥근 구덩이와 음식을 조리하며 검게 그을린 동그란 화덕자리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동행한 김지석 안양시청 향토사료실 상임위원은 "4호 주거지는 면적이 작으면서도 기둥이 3개인 반면, 3호 주거지는 면적이 넓으면서도 기둥자리가 2개인 이유는 건축기술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또 이 일대는 "관악산을 등지고 학의천이 흐르는 평야지대인 관계로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높은 산과 앞으로는 넓은 곡창지대와 하천이 있어 수렵과 곡물채취, 어로 활동을 하기 좋은 지역으로 집단취락 주거지가 형성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출토된 유물을 찾아서
석기시대의 뗀석기 종류인 찍개, 찌르개와 청동기 시대의 돌창, 돌화살촉 등의 사냥 도구가 전시되어 있고, 실을 꼬았던 가락바퀴도 볼 수 있었다. 곡물을 가는데 쓰인 맷돌과 같은 역할을 했을 돌갈판의 중앙은 금이 가있었다. 특히 청동기 시대곡물을 수확했던 반원형 돌칼과 돌도끼는 돌을 갈아 만든 것으로, 점차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뗀석기에서 간석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양천을 낀 평야지대의 평촌과 관양동 일대는 선사시대 문화적 성격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양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적지로 손색 없어보였다. 유적지를 탐방하며 불교에서 "마음이 편안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으로 통하는 안양(安養)"은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지역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청동기시대 조상들의 원초적인 삶과 생명의 본능이 정겨운 숨결로 다가오는 가슴 벅찬 하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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