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발해(渤海)>

<발해(渤海)>

고구려의 대조영이 699년 세운 나라. 만주 동부, 얀해주,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다. 발해는 14대 227년까지 계속되었으나 926년 2월 21일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ㆍ연해주ㆍ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926년).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 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ㆍ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대조영은 고구려유민ㆍ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天門嶺)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과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바로 그 유적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ㆍ․거란ㆍ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었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병존한다. 종래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편, 한국측의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문제를 둘러싼 외교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 산동성 봉래)를 급습하였다. 당은 유주(幽州: 북경)에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남동쪽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ㆍ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1∼2대 왕을 거치면서 국가기반이 확립되자,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ㆍ중대성ㆍ선조성) 6부(충ㆍ인ㆍ의ㆍ예ㆍ지ㆍ신부)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ㆍ주(州)ㆍ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문왕은 750년대 전반경에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로 옮겼다. 그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북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하여 국력이 향상되자, 762년 당은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작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成王)ㆍ강왕(康王)ㆍ정왕(定王)ㆍ희왕(僖王)ㆍ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별다른 치적은 없다.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從父)이며 대조영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ㆍ현토주(玄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로써 15대 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의 역사는 끝이 났다. 거란은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그것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발해유민 가운데 수만 명은 고려로 투항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 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

【발해의 건국】

발해는 699년에서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 만주 동부 연해주에 걸쳐 있던 나라이다.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 말갈족이 함께 새웠으며,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복합민족주의국가였다고 한다. 68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당의 영주에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696년 랴오시지방 에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혼란이 일어나자, 대조영은 이 틈을 타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지금의 지린성 둔화현 육정산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이라 칭하였다. 그후 대조영의 세력이 계속 커지자, 당은 외교관계를 맺고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함으로써 국호를 발해라 부르게 되었다.

【발해의 발전】

발해는 문왕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문왕은 무왕의 대ㆍ내외 정책을 계승하면서 국내 문제에 집중하였는데, 수도를 동모산에서 300리 떨어진 상경용천부(대흥 18년: 755년)로 옮기면서 발해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 활동 규모가 커지자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5경15부 62주라는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등 문왕 시대에 이르러 발해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신라는 발해에 의식하여 경덕왕 21년(762) 여름 5월에 황해도 지역에 6성을 축조하고 성에 태수를 두는 등 발해에 대비하였고, 발해는 북청 지역의 남경남해부를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였다. 문왕 시기에 발해는 일본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고, 요동 지역 및 남부 지역의 영토 확장에도 주력하였다. 758년 일본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협공계획'을 제의하였고, 적극적인 일본은 5차례나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이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던 것은 일본사신이 신라 정부에 무시당하고 돌아온 이유였지만 실상은 내부 문제를 대외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발해는 당의 안록산 난(755-763)을 계기로 신라보다는 요동 지역 진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또한 발해는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방어의 부담을 벗어나고자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다. 무엇보다도 군사력을 두 군데 나뉜다는 부담이 크게 작용하였다. 발해는 일본의 파견 사신을 무관(759)에서 문관(762)으로 바꾸어 사실상 신라 협공 계획을 포기하였다. 일본 역시 그 이후 흐지부지 되어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790년 문왕 말년 적대국이던 신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 문왕은 대흥48년(785년) 수도를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며,794년 수도를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기는 등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문왕 말기의 귀족들과 왕족들간의 내부 투쟁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발해의 멸망】

발해는 926년 거란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부여성이 4일만에 함락되고 6일만에 거란군이 상경에 이르러 상경을 포위한지 5일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이 항복함으로써 220여년간 동만주를 지배한 발해는 어처구니없이 멸망하고 만다.

그 이유를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발해내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과의 이질감에 의해 발해는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고 다음으로는 지배층간의 내분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의 주장은 앞서 건국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구려 유민과 그 피지배층으로서의 말갈이 가지는 의식은 종족적인 감정이 아닌 국가의식이며 이러한 부분을 양 집단은 공유하며 종족적 이질감을 극복한 상태라고 보여지며 따라서 종족적인 이질감이 멸망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즉 발해의 멸망 원인은 이와 같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과 반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간의 내분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