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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암경찰서 앞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터널 앞에서 하차 터널 쪽으로 약 20여 미터 더 가서 우회하니 구기사로 가는 등산로 입구가 나왔다. 등산로 좌우 측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등산 초입에서부터 기분 좋은 산행을 예고한다. 구기사 뒷길로 조금 가니 탕춘대통제소가 나왔으며 탕춘대능선 길 좌측은 성곽의 흔적이 있었고, 건너편으로 바라보니 우뚝 솟은 족두리봉이 버티고 있었다. 정면으로는 내가 가야할 향로봉이 보인다. 향로봉에서 우측으로 바라보니 비봉능선과 멀리 보현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하필이면 내가 쉬는 날마다 비가 와 거의 한 달 동안 산행을 못한 탓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피로가 찾아온다. 잠시 휴식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니 향로봉이다. 그런데 위험하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바로 오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초행길인지라 우회하기로 했다. 우회 길을 한참동안 가는데 자꾸만 끌리는 향로봉 능선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마침 좌측으로 사람들이 넘어간 흔적이 있어 슬쩍 통제선을 넘어 암벽으로 올랐다.
향로봉을 지나 조금 가니 맞은편에 길게 뻗은 의상능선이 눈앞에 나타났고, 멀리 백운대, 노적봉, 인수봉, 만경대 등을 조망할 수 있는 넓은 마당바위에 여러 명의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고 있었다. 관봉을 뒤로 하고 앞을 보니 내가 가야할 비봉이 지척에 보인다. 지난주에도 비봉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도중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는 했으나 일기예보에서는 한차례 약간의 비가 온다고 해서 오다가 그치려니 생각하고 구기터널입구에서 내렸다. 정류장에 내리니 비는 더 많이 와 피할 수 있는 곳에서 30∼40여 분간 기다렸으나 비는 계속 내려 어쩔 수 없이 돌아가고 말았는데 오늘은 날씨가 너무나 좋다.
조금 가파르긴 해도 디딜 곳과 잡을 곳이 있어 쉽게 오를 수가 있었다. 여기서 주변을 살피니 기암들이 즐비하고 능선 아래 구기동과 좀 더 멀리는 세검정 일대의 시가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이 보인다. 그리고 멀리 우측에 인왕산과 좌측에는 경복궁과 청와대를 안고 있는 북악산도 보인다. 몇 발짝 더 올라서니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 정상이다. 진흥왕순수비가 어떻게 생겼을까 그동안 많은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복제비를 세워놓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비(碑)가 너무나 깨끗하고 때 묻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碑) 옆면에 적힌 글을 보니 "이 비는 문화제청이 복제하여 이천육년시월십구일에 세우다"라고 한글로 적혀있었고, 비문 전문은 한자로 쓰여 있었는데 나로서는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모양만 대충 훑어보고, 내용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이곳에 세워져 있는 비(碑)는 원래의 비가 아니고 원형과 같은 모양으로 원래 세워져 있던 자리에 세워진 모조 비(碑)이다. 원래의 비는 광개토왕비 다음가는 귀중한 금석문으로 1934년에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진흥왕순수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보관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산비는 비를 세운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 오다가 19세기 전반(1816, 순조 16년)에 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 김경연에 의해서 발견되고 판독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사모바위 입구는 돌을 바닥에 깔아 정리가 잘되어있었고, 사모바위 주변은 작은 공원형태를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사모바위가 왜 사모바위인지 궁금 하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일단 바위에 올라섰다.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와 주변 조망하는 사이에 등줄기에 흘러내린 땀이 순식간에 식는다.
시간이 흐르고 전쟁이 끝났어도 그녀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어 허탈한 그는 당시에 포로에서 풀려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인들이 모여 살던 북한산 자락(지금의 홍은동 주변)을 떠돌며 그녀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자는 북한산에 올라 그녀가 포로로 끌려간 북쪽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모바위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장군바위, 사각의 바위라는 뜻의 사모바위, 1968년 북한에서 청와대 폭파 기도로 남파되었다가 생포된 무장공비 김 신조의 1차 목적점이었다 해서 김신조바위라고도 한다고 한다. 사모바위에서 땀을 식히고 다음 목적지인 승가봉을 향했다. 승가봉에 도착하여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보니 사모바위와 비봉으로 이어지는 경관은 과연 너무나 아름답다. 비봉능선 좌측 아래는 승가사가 있다. 승가사는 인도의 고승으로 불교 전교에 큰 획을 그은 승가대사를 봉안한 사찰이다. 중국 당(唐)나라에 법을 전수하여 이름을 떨친 승가대사는 인도의 고승(高僧)으로 관음보살로까지 칭송받았다고 하며, 중국 각지에도 승가당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산행에서 만나는 사찰은 그저 편안하고 아늑하며 그 안에는 평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바위산을 타다 보면 가끔 석문(石門)을 만나게 되는데 석문을 지날 때면 뭔가 모르게 나 자신이 새롭게 되는 것도 같고 석문을 통과하면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석문을 지나면 좋은 일이 생기를…. 이곳 석문을 지나 어느새 문수봉에 도착했다. 지친 몸도 쉬어야 하겠지만 우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부터 채우기 위해 좋은 자리의 식당을 찾았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 적당한 곳에서 식사와 휴식을 취했다. 비봉능선을 아름답게 장식한 기암들과 첩첩이 쌓인 북한산의 웅장하고 멋진 모습에 감탄하면서 오다 보니 대남문이다. 이제 힘든 구간은 다 지나왔고 하산할 일만 남았다.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은 문수봉에서 대남문 구간만 빼고는 모두가 초행길이다. 하산길인 구기계곡 역시 처음 가는 구간이라 기대된다.
요즘 계곡에는 어딜 가나 물이 풍부하다. 빨리 물을 만나 시원한 족탕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한참을 가도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들릴 뿐 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한참을 걸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든가 푸르디푸른 물이 나타났고 와∼!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대로 알탕을 즐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아쉽게도 출입통제 푯말이 나를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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