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9 - 무뢰배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혼자 걷는 밤길은 대체로 무섭다. 어둠 자체가 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틈 타 나타날 지도 모르는 그 무엇이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각각 다른 대상에 두려움을 느낀다. 밤에 호젓한 시골길을 걷다가 불현듯 섬칫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 본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놀란 가슴을 달랠 겸 큰 소리로 외쳐본다. ‘게 누구요, 사람이요 귀신이요’. 당연히 대답은 없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가시는 것도 아니다.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종당에는 미친 듯이 뛰어 도망가게 마련이다. 시골에서는 귀신이 무섭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던 화성과 같은 곳에서는 다르겠지만 - 그 곳에서도 이즈음에는 피해자들의 원혼에 대한 기담(奇談)이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 시골의 밤길에서 마주치는 두려움은 대개 귀신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밤길에서 두려운 존재는 사람이다. 밤의 도시에서 겪는 두려움은 탁트인 논뚝길에서 마주치는 두려움이 아니라 으슥한 골목길에서 대면하는 두려움이다. 밤의 골목길을 걷는 도시 사람들은 혹시나 퍽치기 강도, 깡패, 양아치, 건달, 불량배, 치한(癡漢) 등이 뒤따르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해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자들같이 생긴 자, 심지어는 단지 같은 방향으로 뒤따라 걷고 있는 멀쩡한 사람에게까지도 겁을 낸다. 도시가 부여하는 익명성의 가면이 타인을 ‘정체불명’의 존재로 지목하게 만들고, 그 ‘정체불명성’이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사실상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지만, 이렇듯 막연한 불안감을 조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통칭하여 예전에는 ‘무뢰배(無賴輩)’라 불렀다. 무뢰배(無賴輩)를 글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기댈 곳 - 또는 의지할 사람 - 이 없는 무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이 오히려 상정(常情)일 터인데, 도대체 왜 이들을 배척하고 지탄하며 두려워했을까. 무뢰배를 불량배나 우범자(虞犯者)와 동일시하는 것은 유교 문화권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기대어 생활할 근거가 없다는 것은 곧 항산(恒産)이 없다는 것이며, 항산(恒産)이 없는 자가 항심(恒心)을 가질 수 없으니, 맹자의 말을 금과옥조로 떠받들던 시대에 그런 자들을 믿을 수 없다는 통념이 형성되는 것은 필연이었을 게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무뢰배’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범주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초기에 무뢰배로 지칭된 자들은 주로 중이나 백정, 도망노비, 산간이나 절간에 숨어든 도둑떼 등이었다. 호패제가 시행된 뒤에는 여기에 ‘호적에서 누락된 자’가 추가되었다. 생계를 지탱할 직업이 없고, 신분을 고준(考準)할 증빙이 없으니 이들이야말로 명실이 상부한 무뢰배였다. 그런데 조선 중엽에 접어들어 양반 사대부들이 자신들만의 세계에 높은 담장을 쌓고 단단히 빗장을 걸기 시작하면서 그 밖으로 밀려난 자들이 무뢰배 대열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서자(庶子). 기술직 관리, 무반(武班)이 축차로 무뢰배가 되었다. 연산군은 후대 식자(識者)의 눈으로 볼 때에는 ‘무뢰배의 전형’이라 할 만 했는데, 그가 왕위에 있으면서 등용한 사람들과 그를 왕위에서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당대에 무뢰배로 지목되었다. 연산군대에는 왕에게 자신의 누이나 딸을 흥청(興淸) - 연산군의 방탕한 유흥을 위해 대궐로 불러 들인 미모의 젊은 여성을 흥청(興淸)이라 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 으로 바치고 별감자리를 얻은 자들이 꽤 있었다. 이렇다 할 자격이 있어 별감(別監) 나부랑이가 된 것도 아니요, 하는 일이라고는 흥청(興淸)이 된 누이나 딸을 배경삼아 뇌물을 챙기거나 공갈협박으로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짓 뿐이었으니, 이들을 다른 멀쩡한 별감배와 구분하여 무뢰배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 중에는 무인(武人)이 많았다. 1등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된 박원종(朴元宗)을 필두로 하여 무인들 다수가 공신 지위에 올랐다. 후일 조광조 일파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무뢰배’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그런들 어떠랴. 실패하면 역적이지만 성공하면 공신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반정(反正)’이라는 위험하지만 극히 매력적인 도박의 성공사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무뢰배(無賴輩)라는 지탄을 감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제 무뢰배라는 말은 특정한 신분적, 사회적 위치에 있는 자를 지칭하는 말로써보다는 점차 성격이나 심성(心性), 지식에 하자가 있는 자를 지칭하는 말로 더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무뢰배’라는 이름의 고유한 의미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고 세력있는 자에게 빌붙는 자들, 그래서 충심(忠心) 보다 사심(私心)을 앞세우는 자들은 모두 무뢰배였다. 몰래 담벼락에 괘서(掛書)를 써 붙이는 자는 물론이요 권세있는 자를 대신하여 상소질하는 성균관 유생이나 시골 선비들도 무뢰배였고, 변변한 학식도 없이 과장(科場)에 몰려와 난장을 만드는 거자(擧者)의 무리도 무뢰배였다. 조선 후기 당파간 다툼이 치성(熾盛)하면서는 반대 당파에 속한 자는 모두 무뢰배 또는 무뢰배와 어울리는 자로 지목하는 것이 통례처럼 되었다. 자기 당론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무뢰배가 되니 세상이 온통 무뢰배로 가득 차 있는 셈이었다. 무뢰배가 갈수록 늘어나 드디어는 자신과 친한 자를 제외한 모두가 무뢰배로 보일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래도 세상이 다 아는 대관(大官)이나 종친(宗親)을 자기 당파가 아니라 해서 바로 무뢰배로 몰 수는 없었다. 그 때 붙여 댈 수 있는 핑계거리가 ‘무뢰배와 어울려 무뢰한 짓을 한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지목되는 자들은 대개 그들의 ‘겸인배(傔人輩)’였다. 겸인(傔人)이란 방문객 응대(應待), 문서 수발, 행차 호종(扈從), 재산 관리 등의 일을 하면서 종친이나 대관 가까이 머무는 하인(下人)이자 가신(家臣)을 말한다. 그 중에는 노비(奴婢)도 있었지만, 글 줄이나 아는 사람이 필요한 영역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평민(平民)이나 사족(士族) 출신 겸인(傔人)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에 의뢰하지 않고 사인(私人)에 의뢰하는 만큼 무뢰배(無賴輩)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자들이었다. 1880년대 푸트 미국공사 부인의 나들이 행렬. 가마꾼 네 명에 겸인(傔人) 넷이 붙었다. 조선시대 대관이나 종친의 행차 역시 가마만 달랐을 뿐 따르는 무리는 이와 같았다. 겸인들은 대관, 종친을 항상 따라 다니면서 심부름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대관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책임도 겸인들이 졌다. 본래 천예(賤隸)가 아닌데 남의 집 겸인(傔人)이 되는 자들에게도 나름대로 피치 못할 사정은 있었다. 역을 피하기 위해 투탁한 자도 있었고, 그냥 세도가의 눈에 띄어 마지 못해 끌려간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기꺼이, 자진해서 겸인(傔人)이 되는 자들이 더 많았다. 특히 조선 중엽 두 차례의 반정(反正)이 성공한 일은 능력도 자질도 없으면서 벼락출세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능성 있는’ 종친(宗親)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붙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심사(心思)야 굳이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이다. 왕조 사회에서 남자 왕족(王族)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라고 흰소리를 늘어놓았던 양녕대군조차 실상은 언제 도성밖으로 내쳐질 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서 살았다. 공주나 옹주라면 시집가서도 구박받을 염려 없고 남편에게도 기 세우고 살 수 있었지만, 무슨대군이니 아무개군이니 하는 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처지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학문에 몰두하면 ‘필시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말타고 활쏘면서 소일할라치면 ‘무뢰배와 어울리는 것으로 보아 불측한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저 그림이나 그리고 거문고나 타면서 두문불출해야 자기 주변에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을 잠재울 수 있었다. 예술분야에서 대가가 된 종친은 있어도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종친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놓아 두지 않는 법이다. 줄만 잘 대고 시국만 요상하게 돌아가 준다면 혹시 아는가. 하루아침에 공신록에 이름 올리고 떵떵거리며 세상을 오시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신(功臣) 되는 데에 학문이나 인품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 종친에게 미리 줄을 대 놓는 일은 위험하지만 배당률이 극히 높은 도박이었다. 물론 도박이 성행하는 사회는 결코 건전할 수 없다. 아니 거꾸로 건전하지 못한 사회이기에 도박이 성행하는 법이다. 능력에 따라 대우받고 노력한 만큼 댓가를 얻을 수 있는 - 이런 사회는 과거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기대가 발붙일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라도 있으면 사람들은 이 황당한 성공론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 세상이라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위험한 도박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이미 지나버렸다. 공신, 훈신, 척신의 자제들이 음서(蔭敍)니 대가(代加)니 해서 벼슬자리를 끼고 앉으니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할 길은 갈수록 좁아졌다. 공부 못하는 자, 공부 하기 싫은 자, 공부할 능력이 안되는 자, 그러면서 이렇다할 연줄도 없는 자들이 요행을 바라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말의 별감. 조선 후기에는 나인의 친족이나 종친의 겸인(傔人)들이 별감직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궐내에 출입하는 것을 기화로 이득을 취하는 데 이골이 나 있었고, 그렇게 번 돈을 흥청망청 쓰는 데에도 능했다. 시정의 왈짜, 무뢰배의 두령급이 이 자들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친이나 대관(大官) 주변에 모여 들어 그 겸인(傔人)이 되는 자들 중에는 그같은 요행수를 노리는 자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들은 어린 영감 행차를 호위하면서 위세를 돋우었고, 영감이 무료하지 않도록 갖가지 오락거리를 제공했으며, 그렇게 신임을 얻어 심복이 되고자 했다. 혹시 아는가, 어느날 갑자가 영감이 상감이 될지. 때로 악취미를 가진 영감 비위를 맞추려다 보니 유부녀 납치, 처녀 강간과 같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도 그 짓거리를 즐겼다. 다행히 영감이 대전이나 대비전의 총애라도 받고 있다면 그까짓 포도청 군관이야 무시해도 좋았다. 또 상전(上典)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 별감(別監)이든 찰방(察訪)이든 벼슬자리를 얻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는 못올라가더라도 주인이 지방에 내려가면 그 비장(裨將)이 되어 나름대로 거드름을 필 수도 있었다 - 배비장전(裵裨將傳)에서도, 홍명희의 임꺽정에 삽입된 이봉학전에서도 기생끼고 노는 무뢰배의 대표는 비장(裨將)들이다. 이 자들이 모두 겸인(傔人)으로 사또 영감을 수행한 것이다 -. 이쯤 되면 무뢰배 소리를 듣더라도 양반 팔자가 부럽지 않았다. 세력있는 자의 겸인(傔人)이 아니고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패행(悖行)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들이 무뢰배(無賴輩)의 대표격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런 생활이 안정적일 수는 없었다. 윗전의 총애는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었고 끈 털어진 연 신세가 된 영감이 ‘무뢰한 종친’이나 ‘무뢰한 대신’으로 낙인찍혀 내쳐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심하면 역모(逆謀)를 꿈꾸었다는 죄안(罪案)에 이름이 오르고 단근 압슬의 혹형(酷刑)을 당하다가 변명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물고(物故)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종친과 명유(名儒)를 얽으려는 참인데 겸인(傔人) 나부랭이 한 둘쯤 죽인대서 무슨 큰 문제가 되는 시절도 아니었다. 또 역적질을 해야만 공신(功臣)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꿎은 사람들을 역적으로 몰아 출세길을 찾으려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역심(逆心) 비슷한 것을 품고 오해될 소지가 있는 글이라도 지었다면 백마디 변명이 소용없었다. 멀쩡한 사람도 역적을 만드는 판에 시정의 무뢰배쯤이야. 현대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에게 인권이 없었듯이, 조선시대 역모(逆謀) 관련 사건에는 인정(人情)도 왕도(王道)도 없었다. 숙종대 이후 당파간 권력다툼이 극성(極盛)하면서는 불측(不測)과 무도(無道), 무뢰(無賴)와 역심(逆心)이라는 말이 무수히 난무하였고, 그 때마다 대관(大官)의 죄를 얽기 위해 겸인(傔人)을 닦달하고 종친(宗親)의 역모를 밝히기 위해 겸종(傔從)을 때려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실재한 모반(謀叛)도 있었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역모(逆謀)도 있었다. 영감 대감이든 겸인(傔人)이든 자중자애(自重自愛)하지 않고서는 천수(天壽)를 다하기 어려웠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고, 또 이 무렵 세상은 그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부(富)가 권력에 버금가는 지위를 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역모(逆謀)를 꿈꾸지 않고도 경제적 이권(利權)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장토에서 얻는 수익만큼이나 상업을 통한 이익도 늘어나고 있었다. 궁방(宮房)이나 세도가(勢道家)에서는 염전(鹽田), 어장(漁場), 주인권(主人權) 등을 절수(折受)받거나 사 들여서 부(富)를 축적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일을 노비(奴婢)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 세가(勢家)나 궁방(宮房)의 노비(奴婢)가 포구주인이나 여각주인이 되는 예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에는 세정(世情)에 밝고 장부(帳簿)를 능숙하게 쓸 줄 아는 겸인들이 적격이었다. 영조 년간에는 시전 상인들을 윽박질러 겸인(傔人)으로 만드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이 관례는 조선왕조,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말 모리배 예종석(芮宗錫) - 그 자신 겸인(傔人)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곡도 찰방이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한말부터 일제하까지 전형적인 겸인(傔人)의 행태를 보였다 - 은 ‘육의전 중 1헌(軒)에 상인이 2, 3인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상인으로, 다른 한 사람은 고관(高官) 집에서 겸인으로 일했다’고 회고하였다. 무슨 군(君)이나 옹주(翁主)마마, 대감마님은 시전 상인의 상업적 지식을 활용하여 부(富)를 늘릴 수 있어 좋았고, 상인들은 든든한 배후를 두게 되어 좋았으니 이런 일이 관례화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늘날의 조직폭력배들이 형님 아우라는 호칭을 버리고 새로 사장이니 상무니 하는 호칭을 얻게 된 것처럼 조선 후기의 겸인배(傔人輩) 역시 말 타고 활 쏘는 대신에 치부책을 쓰는 데 더 많은 정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벼슬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벼슬은 좋았다. 비장이니 오위장이니 별감이니 찰방이니 하는 벼슬은 물론 때로 군수(郡守)까지도 겸인에게 열려 있었다. 영감 대감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면 보답은 있게 마련이었다. 벼슬은 죽은 뒤 묘비에 새길 글자를 바꿔 주었을 뿐 아니라 돈도 벌게 해 주었다. 그런데 겸인이 상인이 되었다고 해서 무뢰배 기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본래부터 국법을 우습게 알고 사적 권력을 배경삼아 하지 못하는 짓이 없던 자들이었으니, 그들의 상업활동이라는 것도 대체로 무뢰배의 행태를 답습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무뢰배로서만 생활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남의 영업권을 빼앗거나 힘없는 상인들로부터 분세(分稅)를 징수하는 일은 배후에 영감 땡감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명관은 무뢰배와 별감을 각각 오늘날의 조폭과 오렌지족에 비유했고, 고석규는 조선 후기 소비활동의 새로운 주체로 왈짜패를 찾아 냈지만, 이들 사이에 십만팔천리쯤 되는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놈이 그 놈이었다. 별감 나부랭이나 시정 잡배가 무슨 돈으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겠는가. 다 남의 돈을 제 돈처럼 만지고, 그 틈에 제 몫을 챙길 수 있었으니 그같은 사치가 가능했을 터이다. 도마뱀 꼬리 자르듯 배후가 드러나지 않으니 무뢰배나 왈짜패가 되는 것이지 실상 이들은 대개 겸인(傔人) 무리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 도시 상업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자본에는 무뢰배 자본의 성격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무뢰배 자본가들은 국역(國役)에서 면탈된 채 사적 의무만 지면 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만 상전(上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었다. 부득이 상전(上典)과 진퇴(進退)를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전이 몰락하면 재빨리 다른 주인을 찾아 나서는 자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바 ‘타락한 부르주아’의 한국판이었으며, 한국적 천민자본주의의 비조(鼻祖)들이었다 - 나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가 미국에서 완제품으로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이래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 내재해 있던 천민성이 식민지 상황을 거치면서 전면화된 것으로 본다 - . 이 자들은 본래 궁방이나 세도가의 천예(賤隸)들이었으니 무슨 노블레스 오블리제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개항 후에도 서울안 상인들의 무뢰배적 성격은 지속되고 확산되었다. 한말 서울의 3대 거상(巨商)으로 조진태(趙鎭泰), 조병택(趙秉澤), 백완혁(白完爀)이 지목되었는데, 이 중 조진태는 포전(布廛) 대행수였으며 조병택은 민영익(閔泳翊)의 겸인(傔人)이었다. 백완혁(白完爀)은 오위장 벼슬 경력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후일 송병준(宋秉畯)의 겸인 노릇을 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누군가의 겸인(傔人)이었을 것이다. 을사조약 후 내부대신을 거쳐 일황(日皇)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초특급 매국노 송병준(宋秉畯) 역시 민태호(閔泰鎬) 민영환(閔泳煥) 집안의 겸인(傔人)이었다. 민영환이 턱으로 부리면 ‘네 네’하고 따르던 자가 세상이 일변하매 옛 주인을 무는 개가 되어 주인집 재산을 몽땅 훔쳐냈을 뿐 아니라 - 단재(丹齋)의 표현이다 - 심지어는 나라까지 통채로 팔아먹겠다고 나섰으니 이 자야말로 사욕(私慾)말고는 아무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무뢰배의 전형(典型)이었다고 할 만하다. 한동안 국적 포기자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국적 포기자 중에는 강남, 분당의 특급 주거지역에 거주하는 자들이 많단다. 그들 스스로는 이 사회의 지도층이요 모범적인 성공사례라는 소리를 듣고 싶겠지만, 그래서 Global Citizen이니 Cosmopolitan이니 되지도 않는 정체성에 자신을 갖다 붙이려들지만, 아무리 그래도 송병준 같은 무뢰배 매국노의 후예라는 딱지를 떼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 딱지를 붙이고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천한 미국시민’임을 입증하는 증명서 한 장 뿐이다. 의무는 지지 않고 권리만 누리려는 자의 눈에는 국가나 공공(公共)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오늘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가 내일 또 ‘세상이 일변하면’ 다른 나라 시민이 되고자 용을 쓸 자들이다. 천예(賤隸)의 기질이 몸에 밴 무뢰배는 아무리 부유해져도 아무곳에서도 용납받지 못하는 낭인(浪人)이 될 수 있을 뿐 시민(市民)은 될 수 없다. |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5-06-01 | 조회 : 2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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