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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이야기 7 - 등 따숩고 배부른 삶

서울이야기 7 - 등 따숩고 배부른 삶


17세기말 서울에는 유난히 물난리가 잦았다. 1400년 이후 460년간 한성부 일대의 물난리는 총 172회였다고 하는데, 이 중 57회가 1650~1700년의 50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홍수가 질 때마다 개천가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쓸려 가는 일이 잇따랐다. 18세기에 들어와 홍수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피해는 더 커졌다. 18세기 중반경에는 이미 개천의 하상(河床)이 교량 상판과 맞닿을 만큼 높아져 있어 개천이 전혀 배수로 구실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배수로 구실을 할 수 없는 개천에 지류(支流)의 물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니 적은 비에도 큰 물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백성 - 특히 서울 주민 - 을 남달리 ‘사랑’했던 영조 임금은 물난리의 주원인이 개천(開川)에 있음을 알고 대책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1753년 봄, 영조는 직접 현장 조사에 나섰다. 임금은 수표교 어름에 오부(五部) 방민(坊民)의 대표격 되는 이들을 불러 모으고는 그 자리에서 한 노인을 불러 개천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자신이 어렸을 때만 해도 다리 밑으로 말 탄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하상(河床)이 높아져 다리 밑을 봉해 버렸다고 답했다. 그 ‘어느 사이’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60년이다. 한양 정도 후 수백년간 별 탈 없던 개천이 50~60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막혀 버렸다. 변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폐색(腸閉塞)’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1756년부터 영조 회심의 사업인 ‘준천(濬川)’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왜 개천이 막혔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에도 여러 가지 진단들이 나왔다. ‘간사한 무리들이 도성 주변 산림의 나무를 몰래 베거나 심지어 산자락에 밭을 일군 탓에 토사(土砂)가 흘러내린 때문’이라든가, ‘호강(豪强)한 자들이 개천을 침범하여 집을 지은 탓에 제방이 무너진 때문’이라든가, ‘동대문 밖에 사는 자들이 논밭을 일구면서 물길을 막은 때문’이라든가 하는 주장들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50~60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당시 사람들도 ‘간사한 무리’나 ‘호강(豪强)한 자’들, ‘몽매(蒙昧)한 농민’이 왜 내사산(內四山)의 나무를 베고 천변에 집을 짓고 성밖에 새로 밭을 일구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간사한 놈이니까 간사한 짓을 한다’는 식으로 행위의 성격에 사람의 인격을 통합시켜 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기야 스스로 수재요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인간(?)도 ‘먹힐만 하니까 먹혔다’는 동어반복을 무슨 새삼스러운 진리인 양 떠들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현대인도 적지 않으니 이런 비분석적인 사고를 ‘중세인의 한계’로 몰아갈 이유까지는 없다. 그러나 도대체 영명한 중흥(重興)의 군주(君主) 치세에 왜 이토록 간사하고 몽매한 인간들이 갑작스레 많아졌는지에 대해서는 꼼꼼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도시 문제의 핵심에는 언제나 인구문제 - 화산폭발로 사라진 폼페이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 가 있었다. 양란(兩亂) 이후 서울은 처음으로 ‘무서운 인구증가’를 경험했다. 상비군 병력과 그 식솔들, 서울에 걸식(乞食)차 올라왔다가 눌러 앉은 무뢰배(無賴輩)들, 새로 벼슬길에 나선 시골 양반들이 서울의 새 주민이 되었다. 그런데도 벼슬자리 떼인 양반들은 낙향(落鄕)하지 않고 서울에서 버텼다. 당장 집터가 부족했다. 권세를 앞세워 남의 집 빼앗아 사는 여가탈입(閭家奪入)이 새삼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렇다고 집 빼앗긴 자가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같으면 집 지을 엄두도 내지 않던 곳이 새로 주택지가 되었다. 개천변에 새로 집을 짓는 일이 빈번해졌다. 숙종대에는 이미 천변 도로를 침범하여 새로 지은 집이 500여호에 달하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큰 집을 여러 채의 작은 집으로 나누는 일도 많았을 터이다. 이제 텃밭은 사치가 되었다. 도시내에서 분뇨와 쓰레기를 처리해 주는 유력한 ‘시설’ 하나가 사라졌다.


사람이 많아지면 소비량과 배설량도 더불어 늘어나게 마련이다. 늘어난 도시 주민의 찬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채전(菜田) 개간이 성밖 일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남대문 밖과 동대문 밖, 한강변과 모화관 뒤쪽 일대가 무, 배추, 미나리, 파, 토란, 고추 등의 채소류 재배지로 바뀌어 나갔다. 개천 하류 동교(東郊) - 오늘날 마장동 일대 - 의 대규모 목장도 임란 이후 무기체계와 전술체계의 변화에 따라 전답(田畓)으로 변했다. 더구나 채소 소비의 증가 속도는 인구 증가 속도보다 빨랐다. 다른 기회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이 시기의 생산력 증가는 도시 내부에 축적되는 ‘부(富)’의 총량을 늘렸다. 음식 사치 - 모든 소비행위에서 사치란 ‘양(量)’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질(質)’과 관련된 것이다. 유럽인의 세계 정복을 이끈 후추와 설탕, 커피는 먹어서 배부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음식 사치의 요점은 주로 향신료에 있다. 한국인의 대표 음식 김치에 한국인의 입맛을 대표하는 고추의 매운 맛이 들어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 가 묘당(廟堂)의 논의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쓰레기는 늘어나는데, 그를 버릴 도시내 공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겨울철이면 물이 말라 붙은 개천바닥은 분뇨와 더불어 김장 때 잘라버린 푸성귀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0~60년 사이에 14km에 달하는 개천 바닥을 2~3m나 높일 정도의 엄청난 지리적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채소는 잘 썩고 분뇨는 잘 씻겨 내려간다. 쓰레기를 하상(河床)에 점착시키는 접착제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재’이다. 해방 후 1970년대까지도 도시 쓰레기의 대부분은 연탄재였다. 난지도가 공식 쓰레기장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시내 도처에 연탄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연탄재는 겨울철 눈길 위에 깨뜨려 미끄럼을 막는 데도 쓰였고, 악동(惡童)들이 눈싸움할 때 눈뭉치 안에 감추어 살상력(?)을 강화하는 데도 쓰였지만, 어쨌든 다 처리하기란 불가능했다. 1970년대 초 반포와 잠실 일대의 한강변 저지대를 개발할 때 땅을 돋우기 위해 바로 이 연탄재를 썼다. 오늘날 반포 아파트와 잠실 아파트는 연탄재 무덤 위에 서 있는 셈이다. 나무와 숯 말고는 다른 연료가 없었던 조선 시대에도 ‘재’는 도시 쓰레기의 대종이었다. 도시 생활에서 ‘재’가 나오지 않을 도리는 없다. 이번에는 그 양이 문제였다.

한국인들의 온돌 난방법은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혹자는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발명품 목록 앞자리에 올려 놓기도 한다. 그런데 난방용 연료와 취사용 연료를 통합하는 이런 방식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북부의 추운 지방에서는 무척 훌륭한 난방법이 되겠지만, 중남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더운 날에도 불을 때야 한다는 ‘불편’이 따른다. 그게 반복되다보니 더운 건 참을지언정 습한 건 못참는 한국인의 체질이 형성된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삼복 더위에조차 때때로 ‘난방’을 해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그 때문에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여름철에 거처하는 ‘마루방’과 겨울철에 거처하는 ‘온돌방’을 나누어 만들었다.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도성 주위 내사산(內四山)에서 매장, 채석, 벌목 등 일체의 산림 이용행위를 금하고 해당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군영별 관할구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영조년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도시 서울에서는 겨울철 ‘온돌방’ 조차 온전한 난방을 제공해 줄 수 없었다. 한국 농촌 마을에는 어디에나 뒷산이 있었으니, 기십년전까지만 해도 뒷산에서 꼴 베고 나무하는 일은 대개 사춘기 사내아이들 - 1960년대까지 도시에서 물긷는 일이 계집아이들 몫이었던 것 처럼 - 몫이었다. 나무가 없으면 볏단이라도 태울 수 있었으니, 농촌 집에서 아궁이 위의 가마솥에 그냥 물만 담아 놓고 하루 종일 불을 땐들 뭐랄 사람은 없었다. 집에 쓸만한 사내아이가 없거나 바깥주인이 게으르지 않다면 땔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도시 서울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서울 주변의 산에서는 투장(偸葬), 채석(採石), 벌목(伐木)이 모두 금지되었다. 서울의 지맥(地脈)을 보호하고 왕릉 예비지를 확보하며 때로는 왕의 사냥터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서울 사람들에게 ‘땔감’은 곧 쌀이었고 옷이었다. 쌀과 옷을 때서 온기를 얻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쌀과 땔감이 상호 전환되는 물자였다. 오죽하면 행복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 ‘등 따숩고 배 부른 삶’이 되었겠는가.

대한제국기 독립문 앞의 땔나무 장수들. 소 등에 땔감용 잡목을 바리바리 싣고 무악재를 넘어 와 도성 안에 팔았다. 대한제국기에는 이들로부터 땔나무를 도거리하여 도성 주민에게 공급하는 ‘재목시탄회사’가 여럿 생겼고, 그 중 ‘한성재목시탄주식회사’는 일제 강점기에도 한동안 땔감 거래의 왕좌를 점했다. 그러나 1910년대 중반부터는 프랑스인 브라이상(부래상(富來祥))이 땔감 거래를 지배했다. 그는 땔나무를 가져 오는 행상들에게 커피 한 잔씩을 주고 흥정을 붙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 탓에 서울에서 가장 먼저 커피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땔나무 장수들이었다.


지금 서울에는 조선 초기 민가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그 구조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도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컨대 오늘날처럼 모든 방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한겨울 공원에서 나무 벤치 두고 돌 벤치에 앉는 바보는 없다. 긴긴 겨울밤 밤새도록 불을 땔 수 있는 집은 서울에 많지 않았다. 그런 집에서도 행랑채 식구들 자는 방에까지 불을 때 줄 이유는 없었다. 궁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중기까지, 나인들이 거처하는 방은 모두 마루방이었다. 성균관 동서 양재의 방도 마루방이었다. 마루방 한 가운데 화로 하나 두고 밤새 한기를 이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잠결에 화로를 걷어차 일어나는 화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어느 사이엔가’ 마루방이 하나 둘씩 온돌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성균관 양재 일부가 온돌방으로 바뀐 것은 일찌기 세종 때 일이었지만 - 학자를 무척이나 아꼈던 세종은 성균관 학생들이 감기 걸릴까봐 온돌방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그 방에 이후로도 계속 불을 제대로 때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종 때에는 다시 성균관 양재에 온돌이 없다는 기사가 나온다. - 궁궐이나 민가에서 온돌방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궁궐내 마루방들이 모두 온돌방으로 바뀌어 시목(柴木)을 공급하는 기인(其人)들이 죽어난다는 얘기가 빈번히 튀어 나왔다. 영조년간에 이르면 서울 주위 사산(四山)에서 몰래 나무를 베어 시중에 내다 파는 자들이 무수히 늘어났지만, 이들은 대개 궁가붙이여서 단속도 쉽지 않았다. 왕이 금송(禁松)의 영(令)을 엄히 내리고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를 제작 배포하는 한편 군영마다 담당구역을 지정하여 감시하도록 했지만, ‘간사한 자들’이 산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때쯤에는 이미 땔나무는 ‘돈’이었다. 시목전(柴木廛)도 있었고, 땔나무 행상도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서울 사람들 살림살이가 전보다 나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 때문일까. 아무래도 겨울철 기온이 더 낮아졌던 것 같다. 돈을 때서라도 추위를 이겨야 했다. 이 무렵에는 땔감 소비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엄(耳掩) - 귀마개 - 과 같은 방한구 소비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주택 난방 능력은 ‘신분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연암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는 것’을 양반의 대표적 허영기 중 하나로 올려놓은 것도 그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일 게다. 때는 나무가 늘어나는 만큼 재도 늘어났다.


재는 분뇨와 섞이면 훌륭한 비료 - 퇴비 - 가 된다. 그러나 그건 농촌에서만이다. 도시에서는 더 이상 썩지도 않고 물에 잘 쓸려 내려가지도 않는 괘씸한 오물일 뿐이다. 땅바닥에 깔려 있던 재가 흙과 섞여 있다가 물에 쓸려 개천에 들어가 다시 똥과 버무려 지면 하천 바닥에 딱 붙어 버릴 수밖에. 조선 후기 서울 개천 폐색(閉塞)의 주범은 다름 아닌 도시민들 자신이었다. ‘등 따숩고 배부르게’ 살고자 한 도시민들의 욕망과 그를 실현할 수 있게 해 준 ‘늘어난 부(富)’.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5-03-21 | 조회 :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