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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미래산업 정문술회장

“얼른 줘버리고 편히 살려는 욕심이었지”

  • 7년전 “전재산 사회 환원” 밝힌 미래산업 정문술회장의 지금
    전문경영인 제치고 내가 다시할까 생각도 몇번 들었지, 나도 인간이라
    자식들 내 행동 자랑스러워하는데 좀 못사는 딸은 섭섭하기도 할거야
  • 신정선 기자 violet@chosun.com
    입력 : 2007.11.17 00:11 / 수정 : 2007.11.17 19:36
    • “사람들이 내 은퇴를 두고 아름다운 퇴진이라고 합디다. 하지만 알고보면 내 남은 인생을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또 다른 노욕(老慾)이지요.”

      7년 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맨손으로 일군 회사마저 전문경영인에게 넘긴 칠순의 ‘벤처 대부(代父)’는 자신의 ‘욕심’을 먼저 내세웠다. “물러난 놈이 자꾸 나서는 건 노추(老醜)”라며 인터뷰를 사양하던 정문술(69) 미래산업 창업주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사무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돈 되는’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 그의 공식 직함은 비상근 상담역. 회사 결정에 끌어들이지 않고, 업무 보고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맡은 자리다.

      그가 1983년 세운 반도체 검사장비 업체 ‘미래산업’은 전세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한국 반도체 설비 업체 중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1999년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되기도 했다. 정 회장은 2004년 한국능률협회에서 선정한 ‘존경받는 경영인’으로도 선정됐다.

      정 회장이 300억원을 기부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올해 초 그에게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려고 애를 써야 했다. 그가 학위를 비롯한 각종 예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KAIST측의 간곡한 요청으로 학위는 받아들였으나, 그의 기부금으로 건립된 ‘정문술 빌딩’에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마땅히 돌려줄 것을 돌려준 건데 거기 가서 생색내기 싫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것도 있습니다. 나한테 감사패 주고 사진 찍는 형식 절차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재산을 내놓은 본질적인 뜻에 맞는 걸로 보여달라는 것이죠.”

    • “약속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사무실에 걸린 그림들은 그가 애지중지하는 소장품이다. /정경렬기자 krchung@chosun.com
    • ―유난스럽다는 말은 안 듣습니까.

      “당연히 듣죠. 좀 심하다 싶어서 나도 반성하고 있어요. 너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내 성격이 원래 너무 깔끔해서 그래요.”

      그의 답변에는 ‘깔끔’이라는 단어가 십여 번 등장했다. ‘너무 깔끔 떨어서 문제’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도, 정작 ‘깔끔’을 버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18년간 근무한 경력도 철저하게 뒷자리를 살피는 고집을 웅변한다.

      ―기부 의사를 발표하고 갈등은 없었습니까.

      “‘갑자기 일이 생겨 약속을 못 지키면 어떡하나’ 하는 스트레스가 돈을 잃는다는 생각보다 더 무서웠어요. 나중에는 오히려 ‘얼른 줘버리고 편히 살자’는 생각밖에 안 납디다.”

      ―전 재산 환원 약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재 갖고 있는 미래산업 주식 10%를 정리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2~3년 생각해보고 실행할 작정이오. 죽을 때는 집 한 채와 다소의 생활자금만 갖고 죽을 거요.”

      ―발표 당시 자식들은 기부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애들은 내 기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딸 중에 좀 못 사는 애도 있어요. ‘아버지가 우릴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겠죠. 속으로야 모르지. 섭섭하긴 할거야.”

      “유산은 독약(毒藥)”이라는 정 회장의 소신은 유명하다. 2남3녀 중 두 아들은 미국 명문대에서 MBA를 마쳤다. 장남은 국내 대기업을 다니다 IT관련 벤처기업을 차렸으며, 차남도 벤처기업에 취직했다.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나도 인간이니까 ‘자식놈한테 물려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듭니다. 어렵더라고, 어려워. 전문경영인 제쳐버리고 내가 들어가서 다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몇 번 들었어요. 나도 인간이라서, 내부에서 나와의 싸움이 치열해요. 하지만 아직은 내가 이기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이길 겁니다.”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태어난 정 회장은 1980년 중정에서 강제 해직된 후 전기설비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퇴직금 2000만원을 들여 인수한 공장이 빚더미에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친 후에야 알았다. 그의 고통과 오기, 신념을 동력으로 미래산업이 태어났다. 회사가 대표적인 우량 기업으로 떠오르고 1000억원 이상의 부를 모으면서 현 정부 초기 산업자원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다.

      ―‘불사조 기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헤쳐왔습니까.

      “파산 직전에 몰려서 죽으려고 동네 약국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모은 적도 있어요. 돈 때문에 죽을 고비까지 넘겨야 해서, 그놈의 돈을 극복해보겠다는 일종의 보복심리를 지니며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사기와 배신이 아니라, 신의로 보란 듯이 성공해보겠다는 오기가 있었어요. 그렇게 벌어서 아낌없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이를 악물고 버텼죠. 이젠 그런 오기는 희미해졌지만,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현재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

      “지금은 봉급 안 나오는 일가재단과 카이스트 이사만 맡고 있어요. 임기가 끝나면 둘 다 그만둘 겁니다. 은퇴는 사회인으로서의 죽음이지만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축제라고 생각합니다.”

      ―욕심 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내가 그림에 대한 욕심이 좀 있어요. 공무원 때 애지중지 모아온 그림을 사업이 위기에 몰렸을 때 헐값에 넘겼어요. 재기한 다음에는 맨 먼저 든 생각이 그림을 되찾아와야 된다는 거였지.”

      ―지금은 꽤 많이 모았겠네요.

      “80점쯤 되죠. 물러나면서 이 놈들을 정리할 것도 걱정이 됐어요. 자식들한테 주면 작품마다 값이 다르니 분란의 씨앗이 될 거 아니오. 그래서 이달 말에 경매에 부치기로 했어요. 경매 때도 내 콜렉션이라는 거 밝히지 말라고 했어요. 내 이름 때문에 가격에 거품이 생기는 것도 사기요. 물론 많이 받아서 기부 많이 하면 좋겠지만, 과정도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히는데,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까.

      “밥값을 하고 죽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죠.”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약속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내가 약속을 지킴으로써 후배들에게 기업가 정신의 한 페이지를 열어주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 2007년 11월 12일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인터뷰. /정경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