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저우성첸동난묘족동족자치주는중국의오지중오지다.자신들을동이족의한갈래로믿고있는묘족은지금도치우천황을조상신으로숭배하며'아시아의집시'로불리는민족이다.동족은오지산골에거주하면서지금도고대의전통과문화를유지하며살고있다.<오마이뉴스>는민족문화의활화석으로불리는첸동난자치구에서우리한민족과유사한민속풍습을간직하며살아가는소수민족묘족과동족의생생한문화와풍습,끈끈한삶과생활의현장을7차례에걸쳐현지르포로전한다. <편집자주> |
| ▲ 삐아사 전통의복인 ‘타오부’에 수놓을 자수를 놓는 여인들. 삐아사 묘족은 현대문명과의 다양한 교류 속에서도 전통문화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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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냥에서 돌아온 한 삐아사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허리춤에는 칼을, 양 어깨에는 사냥총을 멨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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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이저우(貴州)성의 수도인 구이양(貴陽)에서 자동차로 구불구불한 산간도로를 쉴새 없이 달려 9시간 만에 도착한 총장(從江)현. 총장현청에서 7.5㎞ 떨어진 산골에는 '묘족 생태 활화석' '중국 문화부락 제1촌'이라 불리는 특이한 마을이 있다. '비샤'(岜沙)라는 중국어 발음보다는 '삐아사'라는 사전에도 없는 묘족어로 더욱 통용되는 묘족 촌락. 삐아사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묘족 마을이다. 총장현에서 가장 큰 묘족 집단거주지인 삐아사는 420여가구, 2100여명이 살아 산골 마을로는 제법 큰 규모다. 삐아사는 6개 자연부락과 16개 촌민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군(滾)·왕(王)·자(賈) 등 9개 성씨의 사람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다. 본래 묘족은 자신만의 언어만 있고 문자는 없다. 청나라 때 강력한 중앙집권 행정체계의 편입된 구이저우성은 경내 거주하는 소수민족에게 강제로 중국식의 성씨를 부여했다. 삐아사는 묘족어로 '초목이 번성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 삐아사에는 항상 '원시' '신비' '원생태' '정토' 등의 단어가 따라다닌다. 오랜 세월 대대로 전해 내려져 온 풍속과 신앙, 총과 칼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고대 무사의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들, 태양을 숭배하고 나무를 사랑하는 전통, 생사의 윤회설을 믿고 신기한 조모석(祖母石)을 섬기는 마을…. 삐아사는 현대문명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전통문화와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촌락으로 알려졌다. 놀라운 것은 삐아사가 현대문명이나 도시문화와 단절된 마을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느 중국의 농촌 소도시와 다름없는 총장현청에서 삐아사까지는 자동차로 10여분, 걸어서 50~60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삐아사에는 묘족 외에도 뒤늦게 이주해온 이(易)·장(蔣)·류(劉) 등 성씨의 한족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점차 묘족과 통혼하면서 오늘날 철저히 묘족화 됐다. | ▲ 삐아사는 420여가구, 2100여명이 사는 제법 큰 산골 마을이다. 삐아사 묘족은 농경과 목축업을 주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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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목 후 나무를 나른 뒤 잠시 쉬고 있는 삐아사 남자들. 삐아사에서는 주민이 사는 집을 짓을 때에만 벌목을 한다. 삐아사 사람들은 나무에 자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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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의 민족 엑소더스를 겪은 뒤 정착한 땅 '삐아사' 묘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민족이다. 묘족의 기원에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데, '구여'(九黎)설과 '삼묘'(三苗)설이 현재 중국 역사학계의 주류 학설로 통하고 있다. 중국 신화전설과 고대문헌에 의하면, 오늘날 중국 한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황제는 황허(黃河) 중류 허난(河南)성·산시(陝西)성·후베이(湖北)성 일대에서 집단을 늘리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반해 황허 하류와 양쯔강 중·하류에는 전혀 다른 사상체계와 문화풍습을 지닌 구여족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끊임없이 영토를 늘려나가던 황제족은 염제(炎帝)가 이끌던 종족과 통합하면서 더욱 강성해졌고, 구여족의 땅까지 넘보게 됐다. 구여족을 비롯, 대륙 동쪽 종족들의 연합체 영수였던 치우(蚩尤)는 화하족(華夏族)의 침략에 대항하여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치우는 탁록(涿鹿)대전에서 염황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전쟁 후 화하족의 침공을 피해 구여족은 종족 보존을 위한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비록 황제·염제·치우의 존재와 탁록대전의 승자여부는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만, 묘족은 민족 시조의 치우설과 종족 대이동설을 굳건히 믿고 있다. 군니샹(滾你香) 삐아사 촌장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군씨 조상은 수천 년 전 지금의 장시(江西)성에 거주했다. 종족 대이동에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군씨 일족은 광시(廣西)장족자치구를 거쳐 구이저우 산간지역으로 진입했다. 군씨 일족은 처음 마장(麻江)·타이장(台江)에 정착하여 500여년을 살았는데, 온갖 재해가 잇따르자 리핑(黎平)으로 이주했다. 1700여년 동안 리핑에서 평온한 생활을 했던 군씨 일족에게 다시 엑소더스를 강요케 한 것은 한족이었다. 본래 자연 속에서 나무를 아끼고 필요만큼만 이용했던 군씨 일족과 달리 한족은 무분별한 벌목과 파괴를 일삼았다. 두 민족 간의 분쟁이 계속 발생하고 한족이 지방수령의 힘을 빌려 압박하자, 군씨 일족은 다시 지금의 삐아사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늘날 삐아사 주민의 80%가 군씨다. | ▲ '타오부' 짓기 위해 옷감을 다듬질 하는 한 삐아사 여인. 지금도 삐아사에서는 집집마다 손수 타오부를 만들어 입는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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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오부' 옷감에 아교액을 덧칠하는 두 여인. 타오부의 제작과정은 아주 복잡한데, 아교액을 덧칠함으로써 방수·방풍 효과를 낸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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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묘족의 '원생태', 헤어스타일·의복·태양숭배사상 기나긴 종족 이동의 역사와 험난한 자연조건을 개척하며 살아온 삐아사 묘족은 내부 결속의식이 아주 강하다. 삐아사 묘족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끼리 통혼을 하고 외지인과의 결혼은 극소수다. 특이한 것은 같은 성씨끼리의 통혼도 엄금하고 있다. 삐아사에 처음 정착한 자이(宰)씨 일족은 수백여 년 동안 자연적인 인구계획을 이뤄 일종 번식률이 제로에 가깝다. 이들은 밖으로 전해지지 않는 약재를 복용하여 일족을 조절하는데, 대대로 미인이 태어나고 장수하는 노인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삐아사 묘족의 헤어스타일과 의상복식, 상무정신은 중국 인류역사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삐아사 남자들은 머리 밑은 깎고 윗부분은 자르지 않고 상투 매는 '후쿤'(戶棍)이라 불리는 독특한 두형을 한다. 여자도 긴 머리까락을 곱게 빗어 빗과 유사한 장식물로 고정시켜 생활한다. 삐아사 묘족은 집집마다 '타오부'라 불리는 전통의복을 손수 지어 입고 지내기도 한다. 남자들은 14세 때 성인식을 치르는데, 낫으로 머리까락을 깎아 '후쿤'을 하고 아버지로부터 평생 가지고 다닐 칼을 선물 받아 성인의 삶과 미래를 축복받는다. 사냥총을 들고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는 삐아사 남자들은 언뜻 보면 늠름한 고대 무사의 형상마저 떠오르게 한다. 삐아사 남성상의 사진모델로 활동하는 군위안량(衮元亮·35)은 "삐아사 묘족에게 총과 칼이 몸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사냥과 수렵을 하며 살아온 종족의 역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군은 "오늘날 삐아사에 사는 묘족은 중국 남방지역을 최초로 개척한 묘족으로 온갖 전쟁과 전투의 선두에 서야만 했다"면서 "구이저우에 정착한 후에도 산간을 일궈 농경생활을 하면서 수렵생활도 줄곧 이어내려 왔다"고 말했다. 중국정부로부터 총기와 칼의 휴대가 허용된 것은 삐아사가 유일하다. 2개월 동안 삐아사에 머물면서 현지조사를 벌인 량딩샹(梁丁香) 총장현 여유국 부국장은 "삐아사 묘족의 성격은 아주 특별하다"고 말했다. 량 부국장은 "삐아사 사람들은 담백하면서도 자신이 있고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거나 허황되게 과장하지 않는다"면서 "타 지역 묘족이나 동족과 달리 손님에 대해서 반갑게 대접하지 않지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 ▲ 맨손으로 일일이 대나무 상자를 만드는 두 남자. 삐아사 남자들에게 칼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 휴대용품이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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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아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체육수업 중인 어린이들. 현대적인 의복과 헤어스타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대다수 삐아사 사람들은 전통적인 생활습관을 고집스레 지켜가고 있다. | ⓒ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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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은 구여족이자 치우의 일족... 더욱 철저한 연구 지속돼야 삐아사의 태양숭배사상 또한 특이하다. 삐아사 묘족은 자신들의 선조가 멀고 먼 해가 뜨는 동쪽 지방에서 왔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삐아사 사람들은 태양에 대한 숭배의식을 명절 때와 제사의식 때 잊지 않고 치른다. 공동제사를 치를 때면 온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며 집회당에 모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해를 맞대고 엄숙한 의식을 거행한다. 제사의식 후 누구도 태양을 등에 대고 집회당을 떠나지 않도록 엄금하고 있다. 일부 중국 역사학자와 삐아사 주민들은 헤어스타일과 태양숭배사상, 문화풍속 등을 유추하여 삐아사의 일족이 일본까지 도래하여 갔다고 주장한다. 왕전위(王珍鈺·43)는 "양쯔강 하류에 거주했던 일부 묘족은 배를 타고 일본까지 건너갔다"면서 "삐아사 묘족의 문화풍속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생활풍습과의 유사성 때문에 삐아사를 찾는 일본인 학자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밝혔다. 지난 7월 삐아사를 방문했던 위치우위(余秋雨)는 "삐아사 묘족은 산림을 보호하고 나무로 사람의 생명을 가늠하는 전통의식을 지켜오고 있다"면서 "죽은 사람을 묘지에 묻지 않고 자신의 분신인 나무 밑에 매장하는 것은 대자연 속에 귀의하는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위는 "삐아사의 독특한 생활방식은 고대 묘족의 생활방식이자 현대인이 배워야 할 자연과 함께 하고 존중하는 철학"이라고 말했다. 레이산(雷山)현 시장(西江)묘족마을에서 만난 저우밍푸(周明甫·62) 국가민족위원회 부주임은 "묘족이 치우의 후손으로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유지한 것은 중국 소수민족사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라고 밝혔다. 저우 부주임은 "묘족의 기원이 구여족에서 비롯되고 조상이 치우의 일족이라는 것은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구여족과 동이족의 연관성, 치우의 패퇴 후 화하족과 구여족이 융합하면서 지금의 묘족이 남하하고 자신만의 민족성을 어떻게 갖추게 되었는지는 앞으로도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