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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2009첫강 : 제271강 1.8(목) 경제이야기 / 강경식 전, 부총리

정권말기, 경제 이렇게 관리해라 |③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기사입력 2006-09-05 23:12 |최종수정2006-09-05 23:12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1997.3~1997.11)

“대통령은 외압차단

부총리는 경제운용 전념하라”


경제정책의 실패는 경제외적인 요인이 대부분

대통령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레임덕 극복 가능


강 부총리가 말하는 임기 말 경제운용 노하우

1. 경제외적인 논리가 경제에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다

2.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확실한 역할 분담을 하라

3. 경제운용의 생명은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이다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수단은 배제해라

“경제에는 임기가 없다.”

1997년 3월, 이미 김현철 게이트와 한보비리, 여당인 신한국당과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레임덕에 빠진 문민정부의 경제부총리로 입각을 요청받은 강경식 신한국당 의원은 이 같은 말을 남기고 과감히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에 취임한다.

강 전 부총리는 자신이 쓴 책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시는 이미 대통령 차남 김현철의 구속과 한보비리의 확대로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이 깊어져 정부의 힘이 없어진 데다, 금융시장은 지극히 불안해서 금융대란설이 끊임없이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미 5공화국 시절 재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나는 자리욕심보다는 금융대란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부총리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뜻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정확히 8개월 후 강경식 부총리는 한국에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범’이 되어 부총리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한다.

강 부총리는 당시 금융대란과 외환위기를 막는 데 실패한 근본원인이 “레임덕에 빠진 김영삼 정부가 국정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1997년 3월부터 8개월간 김영삼 정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참여정부는 당시의 교훈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강경식 전 부총리를 만나 외환위기를 맞기까지 임기 말 위기관리에 실패한 김영삼 정부의 경험이 참여정부에 주는 교훈을 되새겨 본다.

- 1997년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를 맞게 된 결정적 원인이 김영삼 정부의 레임덕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사실이다. 내가 경제부총리에 취임하던 당시 김영삼 정권은 이미 레임덕이 깊어졌고 국정장악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고 이것이 외환위기를 못 막은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1996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는 무려 240억달러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원화절하라든가 긴축재정과 같이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또 금융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금융개혁법인이 8월에 국회에 상정됐는데도 당시 국회는 처리를 미루다가 결국 IMF 구제금융이 결정된 이후에야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당시 김영삼 정부는 김현철 게이트와 한보비리로 도덕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위기에 대처할 만한 국정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의 경제팀이나 KDI와 같은 연구기관들은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잘 알고 있었고 이점에 관한 한 외국인들도 인정한 바가 있다.

그런데 이처럼 위기의 징후를 알고 있었음에도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정책이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외국인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 ‘NATO(No Action Talking Only)’라는 말이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레임덕으로 국정장악 능력을 상실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 요즘 참여정부가 레임덕을 맞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많다.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 아무래도 그동안 쌓인 여러 가지 문제들이 드러나게 돼 있다. 이것을 레임덕이라고 자꾸 말하면 오히려 국정의 혼란을 부추길 뿐이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 국정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아직까지 여당과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 참여정부는 김영삼 정부에 비해 상황이 한결 낳은 편이다.

1997년 당시에 김영삼 대통령은 차남인 김현철씨의 구속으로 심리적·정신적 충격을 받아 대통령 스스로 국정에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임기 말인 1997년 10월에는 여당인 한나라당이 대통령을 제명할 정도로 당정관계도 최악이었다. 내가 부총리에 취임했을 때는 이미 정부와 여당 사이에 당정협의라는 것이 없어져 정부정책과 관련해 국회의 협조를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아직까지 결정적인 측근비리도 없고 당정 관계도 나쁘지 않아 집권 후반기를 마무리하는 데 훨씬 낳은 조건이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1997년 연두기자회견 이후 지지도 조사를 했는데 한때 70%에 육박하던 지지도가 30%까지 떨어졌고 이것이 집권 말 레임덕을 결정적으로 부추겼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YS보다 나쁘면 나빴지 결코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이것은 큰 문제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이처럼 낮은 지지도는 국정을 장악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노무현 정부의 지지도가 낮은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이 정부는 정부의 정책을 국민들이 바라는 쪽으로 맞춰가기 보다는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어붙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부동산 문제다. 부동산 문제의 경제적인 해법은 국민들이 살 만한 주택을 충분히 공급하는 데 있다. 다른 문제들은 사실 부수적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부동산문제의 해법을 전혀 엉뚱한 데서 찾으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결과 부동산 경기과열 이야기가 나온 지 3~4년이 지났는데도 부동산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 레임덕이 가시화되는 집권 후반기 경제운용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경제정책의 실패는 경제정책 자체보다 경제 외적인 데서 온다. 이를테면 노·사관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사관계는 기업활동과 경제의 안정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인데 노·사관계의 해법은 사실 경제적인 해법보다는 정부의 대응원칙과 조정능력에 좌우된다.

따라서 그동안 쌓인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부각되는 집권 후반기일수록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사실 정부 경제부처의 수장인 경제부총리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 경제부처가 쓸 수 있는 정책수단이래 봤자 세금과 금리 정도인데 이마저도 경제외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문제는 대통령이 이러한 부당한 경제외적인 영향을 제대로 차단해주고 경제운용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례로 현재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미FTA만 해도 그렇다.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중에서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 한미FTA인데 사실 미국과의 협상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다. 어차피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하나 양보하면 우리도 하나 양보하고 이런 식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국내 여론의 설득인데, 사실 이것은 정치논리에 따라 좌우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국내 여론을 설득해 나가지 않으면 자칫 한미FTA도 정치논리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최근 정부가 ‘비전 2030’을 발표했는데.


정권을 책임진 사람이나 정책담당자가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가 장기적인 전망이나 비전을 만들고 내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히기 위해서다.

그런데 비전 2030에서는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5만달러까지 높이고 정부의 복지분야 지출을 늘려 삶의 질을 세계 10위권으로 높이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나와있는 것 같지 않다.

-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중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면.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이 자신들의 주요 지지세력의 의견과 많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를 추진하기로 결단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지난 30년간 수출주도형 개방정책으로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개방정책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다음으로 현 정부 아래서 기업과 정부의 유착이 사라진 것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참여정부가 기업과의 관계를 투명하게 가져간 덕분에 우리 경제의 투명성도 한결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과거와 같이 정경유착이 극심했던 시절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마지막으로 집권 후반기를 맞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경제팀에 조언을 한다면.


경제운용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이다. 따라서 경제가 경제외적인 문제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각종 정치적인 변수를 사전에 차단하고 최대한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경제부총리의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

대통령이 경제안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각종 정치논리를 사전에 차단하면 경제팀은 주어진 정책수단을 활용해 급격한 변화보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뒷받침하고 물가 등 경제지표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간다면 임기 말의 혼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He is…

‘레임덕’ 때문에 실패한 비운의 부총리

1936년 경북 영풍에서 출생한 강경식 부총리는 부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1960년 고등고시에 합격해 경제 관료로서 첫 발을 내딛은 정통 경제관료다. 경제기획원 예산과장, 예산국장을 거쳐 1982년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개방과 안정을 기조로 하는 제5공화국 경제정책의 틀을 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2,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영삼 정부의 집권 말기에 금융위기가 닥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7년 3월 25대 재경원 장관 겸 부총리에 취임했다.

경제부총리로 부임한 이후 그는 금융개혁법안을 입안하고 경상수지 적자 완화를 위한 긴축재정 및 환율 유동화 등의 정책을 도입하는 등 경제위기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외환위기를 막는 데 실패하고 1997년 11월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100여 일의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지금은 동부그룹의 상임고문과 국가경영전략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형구 기자(lhg0544@ermedia.net)

대구, 불황속 어린이 경제교육 인기
2008-11-03 15:19:39
【대구=배기재 기자】 국제적인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 속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한 조기 경제교육이 인기를 끌고 있다.

3일 청소년 경제교육 전문 비영리단체인 JA 코리아(이사장 강경식 전 경제 부총리)에 따르면 지난 8월 발족한 ‘JA 대구 대학생경제교육봉사단’은 수성구 대청초등학교(1564명)를 비롯, 경북 칠곡의 북삼초등학교(1032명), 장곡초등학교(210명)등 지역 초등학교 어린이 2800여명을 대상으로 경제교육을 실시했다.

이번 경제교육에서는 대학생경제교육봉사단은 어린이들에게 수입과 지출을 통한 이익의 개념, 화폐가치, 자원의 중요성, 직업의 종류 등 주변 생활과 관련된 경제이야기를 통해 경제의 기본 개념을 가르쳤다.

이번 경제봉사활동에는 경북대와 계명대, 영남대, 경상대, 대구대, 금오공대, 대구카톨릭대 등 8개 대학에서 220명의 대학생이 봉사활동에 참여해 살아있는 경제교육이야말로 국가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라는 사명감으로 어린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진행했다.

JA Korea 김태준 회장은 “대구에서 2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고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방문해 경제교육을 하는 대학생들의 열정이 대단하다”며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경제교육을 활성화시킨 대구의 사례는 여타 지방 경제교육의 좋은 모델로 경제교사들의 열정과 노력이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됨으로 어린이들이 세계적인 경제 리더로 성장할 수 있어 우리나라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말했다.

한편, JA(Junior Achievement)는 1919년 미국에서 설립돼 전세계 119여 개국에서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경제교육을 진행하는 단체로, UN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특정분야 협의지위를 부여받아 단체로 JA Korea는 2002년 설립 후 지난2007년까지 총 16만 명이 넘는 초, 중, 고, 대학생들에게 무료 경제교육을 실시해 오고 있다.

/kjbae@fnnews.com

'환란 주범' 누명 벗은 강경식·김인호의 항변

"정책판단을 사법심판대에
올린 것이 잘못이었다"

강경식 전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경제수석이 '환란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동안 '환란 주범'의 누명을 쓰고 살아온 두 사람이 털어놓은 환란의 진실.

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환 란의 주범’으로 기소됐다가 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강경식(姜慶植·63)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金仁浩·57) 전 청와대 수석. 검찰의 입장에서는 쫓다가 놓쳐버린 얄미운 ‘닭’일 수 있지만 본인들은 구치소와 법정, 그리고 청문회장에 ‘환란의 주범’이란 칼을 쓰고 끌려다닌 세월이 야속하기만 할 것이다.

97년 초에 두 사람이 각각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될 때만 해도 언론은 서울대법대 선후배 사이에다가 경제기획원에서 상하 관계로 호흡을 맞춘 ‘강-김라인’을 황금콤비로 기대했지만 외환위기가 닥치자 ‘최악의 경제팀’으로 비난했다. 특히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 의원은 IMF(국제통화기금)사태 이후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고 소속 정당이었던 한나라당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인터넷의 ‘강경식 홈페이지’도 폐쇄했다.

그러나 무죄선고를 받은 직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만난 강의원은 그런 설움은 훌훌 벗어버린 듯했다. 8월말의 오후는 몹시 무더웠는데도 의원회관에서 국회 정문 건너편의 식당까지 밝은 태양을 즐기며 사람들 사이를 활보했다.

곤혹스러운 쪽은 재판부와 검찰이었다. 1년3개월 동안 끈 심리 끝에 서울지법 형사합의 22부(재판장 이호원·李鎬元부장판사)가 내린 결론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은 몰라도 형사처벌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담당재판부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전화가 많았다고 한다. 검찰은 “한국경제사를 다시 쓴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화살을 겨누었지만 과녁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국민들이 항의하는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환란주범인 줄 알았는데 재판과정은 지켜보지 못한 채 무죄선고라는 결과만 보니까 도저히 납득이 안 될 겁니다. 그래서 공판 자료를 모두 인터넷에 올릴 계획입니다. 이것을 읽어보면 무죄선고를 납득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면죄부를 받은 것은 아니다”

강경식, 김인호 두 사람이 법적으로 책임이 없다면 도대체 국가부도를 내고 IMF사태를 불러들인 장본인은 누구일까. 외환위기는 왜 일어났을까.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하며 IMF 구제금융은 받아들이면서 겪은 생활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있는 것일까.

“이번 재판은 검찰에서 저희 두 사람의 잘못으로 외환위기가 초래되었다고 기소함으로써 환란의 책임자를 가리는 재판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졌어요. 그런데 재판부가 무죄선고를 내리니까 마치 우리에게 면죄부를 준 것인 양 일부 언론에서 보도했어요. 마치 환란 책임을 벗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나 김인호 수석은 당시 경제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외환위기를 막지 못하고 이유야 어떠하든지간에 많은 국민이 고통을 당하게 한 책임은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인이 자기가 맡은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도의적 책임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도 벗어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지난 8월30일 국회의원회관 223호실에서 만난 강경식 의원의 말이다. ‘면죄부’란 말이 강의원에게는 몹시 거슬리는 것 같았다. 마치 죄가 있는데 재판부가 면해주기나 한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시민단체 등 일각에서는 이번 사법부의 판단이 강경식 의원과 김인호 전수석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검찰이 환란의 책임자로 우리 두 사람을 기소함으로써 환란에 책임이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이번 재판은 환란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 책임 소재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재판부는 검찰에서 죄가 있다고 기소한 사실에 대해 죄가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지 우리의 환란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닙니다. 환란 원인과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은 경제 전문가의 몫입니다.”

강의원은 이번 재판부의 무죄선고에 대해 “개인적으로 누명을 벗어 좋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재판 결과는 우선 국내적으로 공직에서 어려운 정책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소신있게 일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을 결정할 때 모든 결과를 미리 다 알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확실성속에서 정책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가지고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과 결과가 나빴다고 이를 형사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입니다.

정책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주식을 사는데 왜 올라가는 주식을 사지 않고 떨어지는 주식을 샀느냐고 사후에 따지면서 그에 대한 형사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정책을 형사 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직무유기를 형사 처벌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도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정책은 국민의 투표로 심판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정책문제를 가지고 형사 재판을 하는 우리나라를 보고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사법부의 판단으로 그런 오해는 불식시켰다고 봅니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의 신인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번 재판 결과를 보고 많은 국민들은 두 사람의 잘못이 없으면 이런 고통에 빠뜨린데 대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허탈해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허탈한 심정은 이해하겠어요. 누구든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지요. 그러나 책임을 물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 전제돼야 합니다. 권한도 없으면서 책임만 지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공인이란 법률이 정한 한도내의 일만 하게 돼 있고 그 범위 안에서만 책임을 지는 겁니다. 가령 금융개혁법을 입안하는 것까지는 경제부총리가 할 수 있어도 국회 통과가 안 된 것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합리성이 확보돼야만 우리나라도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개방화하고 세계화하는 시대에 정서나 감정만으로는 안됩니다. 정서나 감정으로는 외국인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분명한 법규에 입각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겁니다. 법치야말로 민주주의요, 시장경제입니다. 국민들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감옥에 쳐넣으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환란보고서조차 없어

차분하게 얘기하던 강의원은 이 부분에서 상당히 톤이 높아졌다. 우리보다 앞서 환란을 겪었던 태국 정부는 누클이라는 전 중앙은행 총재에게 의뢰를 해서 6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에서 환란 원인과 과정 등을 모두 조사한 뒤 보고서를 냈다. 지난해 5월에 그 보고서가 나왔는데 중앙은행이 정책 운용을 잘못한 부분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그 보고서는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태국에서도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태국정부는 정책 운용의 잘못이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위원회를 또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형사 처벌을 했다는 소식은 없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환란의 주범’으로 강경식 김인호 두 사람을 먼저 구속해놓고 청문회를 여는 등 거꾸로 가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나라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말 환란의 원인은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먼저 감사원에서 감사를 했어요.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해 재판이 진행됐고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 국회에서 경제청문회를 했어요. 애당초 우리나라도 태국처럼 전문가가 먼저 원인을 조사했어야 합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어 정책으로 반영할 것과 제도화할 것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 형사처벌을 할 사항이 드러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갔습니다. 지금 이 시점까지도 정부차원의 보고서조차 없습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정치권이나 행정부, 그리고 재벌이나 노조 모두 제대도 대처하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 그러면 당시 경제부총리로서 강의원이 책임질 부분은 어떤 것일까.

강의원은 먼저 당시 상황부터 진지하게 설명했다. 강의원이 경제부총리를 맡았던 것은 97년 3월초였다. 국제수지는 96년 현재 240억달러 적자였고 한보 부도 위기 등으로 금융시장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정부는 레임덕 현상과 한보사태가 겹쳐 식물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

이런 상황에, 1,2차 석유파동 때 어려움을 극복했던 경험이 있는 강의원은 주변에서는 반대가 심했지만 위기에 처한 경제를 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입각했다. 그러나 대선 정국과 맞물려 기아사태 처리가 제대로 안 되고 금융개혁법안조차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는 사태를 겪으면서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불구경하는 사람들은 많았어도 불 끄는 일에 몸을 던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엎질러진 물을 닦는 사람이 마치 물을 엎지른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


구경꾼만 있고 불끌 이 없어

“제가 경제부총리 자리에 있은 것은 97년 3월초부터 11월19일까지 약 8개월 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경제부총리를 맡기 이전의 일까지 책임지라고 합니다. 왜 단기차입을 못 막았느냐, 왜 환율을 경직적으로 운용했느냐 등을 따지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제가 취임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제게 따지는 것임을 잘 모르고 그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경제부총리를 맡았을 시점에는 이미 경제가 어찌 해볼 수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그런데 마치 제가 들어가서 경제를 어렵게 한 장본인인 것처럼 몰아붙였어요.

그리고 제가 경제부총리를 그만두고 난 뒤의 일도 저에게 책임을 물어요. IMF 왜 늦게 갔느냐고 검찰에서나 경제청문회에서 따졌는데 한번 봅시다. 이미 캉드쉬 총재와 11월16일에 IMF 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일에 갑자기 개각을 하면서 제 후임자가 이미 합의된 IMF구제금융을 안 받겠다고 했던 겁니다. 결국 2,3일 뒤에 다시 받겠다고 번복은 했지만 문제는 이런 번복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이 늦어진 것은 물론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IMF나 미국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를 신뢰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원인이 제가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직무유기로 처벌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 재판에서 다 밝혀졌지만 임부총리는 IMF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후임자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저한테 전화 한 통 안한 임창열씨는 제쳐두고 제가 직무유기를 했다니 말이나 됩니까.”

─임창열 후임 경제부총리는 통상부 장관시절 자동차협상과 관련해서 미국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얘기도 있고 IMF 이사로 있을 때는 캉드쉬 총재와도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IMF 구제금융을 안 받고 외환위기를 해결하려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그런 사정은 잘 몰라도 임 부총리가 IMF 협상 도중에 일본에 직접 가서 지원 요청을 한 일은 있었어요. 당시 일본이 돈을 빌려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인됐던 일입니다.

─IMF가 내건 조건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고금리정책이었어요. 멀쩡한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자도 더많이 생겼습니다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는 멕시코와 달라서 재정적자가 없었어요. 재정이 매우 건실한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초긴축 정책을 쓰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었어요. 더욱이 고금리 정책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외자를 유치한다고 고금리정책을 채택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채권시장은 개방되어 있지 않았고 증시만 일부 개방돼 있었습니다. 고금리는 증시를 침체시킨다는 것은 상식 아닙니까? 당시는 증시를 조금이라도 부양해야 외자가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들어온 돈은 나가지 않게 해야 되는데 고금리정책은 증시만 작살을 낸 격이 됐어요.

고금리정책은 건실한 중소기업까지 자금난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사정을 더 어렵게 한 것은 BIS(자기자본비율) 문젠데 IMF와의 협정에서는 2000년 말까지 기준에 맞추면 된다고 했지만 당시 정부에서 98년 3월말을 기준으로 해서 퇴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은행들이 앞다투어 대출금을 회수했어요. 그 와중에 멀쩡한 중소기업도 쓰러지고 실업자도 더 많이 생긴 겁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당초 단순한 외환 부족에서 비롯된 ‘유동성 위기’가 실물경제의 기반에 큰 충격을 준 경제위기로 치닫게 된 겁니다.”

강의원은 이왕 병이 든 이상 고통을 적게 하고 수술을 할 수 있는데도 IMF 협정과 그 후의 정책 운용 등에 문제가 있어 필요 이상의 고통을 겪게 됐다는 얘기다. 사실 대선 기간중 IMF 재협상론이 나와 IMF에서 580억달러 규모의 지원 약속을 했는데도 금융외환시장은 요동을 쳤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다음 당선자의 구조개혁의지가 분명해질 때까지 국가신인도는 곧바로 올라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검찰에서는 강의원이 정치적 야망이 있어서 외환보유고 관리 등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했는데….

“정치적 야망이 있으면 성공한 부총리가 돼야지 왜 직무유기를 하겠어요. 그리고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면 선거법상 부총리를 휠씬 전에 그만둬야지요. 검찰의 주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직무유기의 동기를 찾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겁니다.”

강의원은 입각 초기부터 외환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했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은 차갑게 돌아섰고 최후에는 일본에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 부총리가 우리 경제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한가한 이야기나 했다는 것이 주로 비난의 대상이 됐는데….

“제가 펀더멘털이 건실하다고 말해 대통령과 국민을 속였다고 비난하는데 거짓이 아닌 사실을 말한 겁니다. 97년 10월 IMF 평가단도 우리나라 펀더멘털이 건실하다고 기자회견까지 했어요. 97년 12월3일 합의한 IMF 협정문에도 첫째 항목에서 우리 경제의 기초가 건실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첫째 국제수지 적자가 그 전해의 240억달러 수준에서 그 절반 이하 규모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었고 물가가 5% 수준으로 안정돼 있었어요. 경제성장이 6%고 재정적자가 없었어요. 저축률 또한 높았어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도 ‘우리 경제 튼튼하다’고 연초 기자회견에서 강조했어요. 제가 펀더멘털이 건실하다고 말할 때에 늘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이야기했고 우리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정부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펀더멘털을 강조한 것은 국내용이 아니고 해외용이었습니다. 우리 경제가 어렵다고 하면 누가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당시 해외에 내놓을 수 있는 ‘사실’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어리석음 때문에 감옥살이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강부총리가 조금만 더 잘했다면 IMF에 가지 않고도 외환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외환위기는 불가피했고 충격파를 최대한 완화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봅니까.

“당시 상황에선 IMF에 안 갈 방법은 없었어요. 또 외환이 일시적으로 부족해지면 IMF에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IMF라는 기구를 만든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97년 11월 19일 개각을 하지 않고 IMF와 합의한 대로 정책 발표를 하고 협의를 했더라면 우리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에 대해 IMF가 지지하면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가 실제로 겪었던 것과 같은 패닉 현상은 겪지 않고 갈 수 있었을 겁니다.”

─평생을 경제관료와 정치인으로서 오점을 남기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참담한 심정이었을 텐데….

“구치소에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하다고 하겠지만 어떻게 경제문제를 풀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습니다만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있게 되었느냐. 구치소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오는 곳인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잘못으로 와 있는가 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3독으로 탐(貪) 진(瞋) 치(痴)를 얘기합니다. 탐은 욕심이고 진은 성을 내는 것이고 치는 어리석음인데 제 경우는 탐심이나 진심 때문에 구치소에 들어온 것은 아니니까 치심, 즉 어리석어서 여기에 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97년 3월 당시의 상황엔 입각한 것 자체가 ‘바보짓’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진술에서도 밝혔지만 이렇게 될 것을 다 알았다고 해도 당시로 돌아간다면 다시 입각하는 바보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화제가 된 ‘계백장군론’

김인호 전경제수석은 9월8일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 있는 그의 서재에서 만났다. 이번 재판에 대한 김 전수석의 논리는 강 전부총리의 논리와 거의 일치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강 전부총리야 전면에 나서는 경제각료였으니까 얼굴을 내민 만큼의 책임이라도 있지만 김 전수석은 대통령의 비서관으로서 그림자에 불과했다. 설령 그가 건의한 정책에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건의를 받아들인 대통령의 잘못이다. 따라서 검찰이 ‘그림자’를 법정에 세운 것은 ‘본체’를 대신해 세운 것이기 때문에 강경식 김인호씨 두 사람이 무죄선고를 받자 김영삼 전대통령이 더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김인호 전수석은 최후진술 때 ‘계백장군론’을 펼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계백장군론은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했기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고 봐서는 결코 백제 패망의 원인과 배경을 알 수 없다는 것. 백제 국력 쇠퇴의 구조적 요인과 신라와 당의 연합이라는 국제관계의 변화를 이해하면 계백장군에게 백제의 패망 책임을 묻는 ‘유치함’은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전수석은 최후 진술에서 이번 기소는 검찰사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며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단언했다.

“제가 강조했던 것은 접근 방법이 잘못되면 문제의 원인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이 이긴들 백제가 패망하지 않았겠습니까. 구조적 변화가 없는 한 백제는 계속 쇠퇴했을 것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당했을 겁니다. 경제 규모로 볼 때 세계 11번째 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을 때에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개방 경제를 취하고 있는 한 국내적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국제적 요인도 있지요.”

─국제적 요인이라는 것은 어떤 점을 지적한 겁니까.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한국의 외환위기와 IMF사태에 관한 논문이 많습니다. 그 내용을 종합해보면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는 당사국의 축적된 경제구조 문제 이외에 국제금융체제의 문제점에도 큰 요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IMF체제의 한계론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경제 상태는 괜찮았는데 헤지펀드들 때문에 당했다는 이야깁니까.

“우리는 잘했는데 국제금융자본 때문에 외환위기가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내부의 문제점이 축적되고 해결능력을 보이지 못하니까 외국자본들이 돈을 걷어들여야 된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른바 ‘기러기효과’라고 하지요. 한쪽이 빠져 나가니까 ‘우’ 하고 따라 빠져 나간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태국에 비하면 국제투기자본에 덜 노출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국제투기자본이 우리나라 금융시장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기보다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측면이 큽니다. 일본이 아시아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문제된 투자 자금을 보전하려고 우리나라에 투자한 자금을 계속 회수하니까 다른 국제금융자본도 너도 나도 돈을 빼나가기 시작했어요.”


11월16일 이미 IMF행

─강경식 의원의 말에 의하면 이미 97년 3월 입각 때부터 외환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외자를 유치하려고 백방으로 뛰었다고 하던데… .

“외환보유고는 자체도 문제였지만 정말로 심각했던 것은 그 해 10월경부터 기존 채무의 롤오버가 안됐다는 점입니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97년 11월5~6일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1월7일 강 부총리와 함께 가능한 모든 대안을 마련해보고 안 되면 IMF로 가야겠다는 판단을 한 겁니다. 그 이전에는 IMF로 가야 한다는 어떤 보고나 주장도 없었어요. 그후 11월14일 대통령에게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길이 없어 IMF 자금을 빌려야겠다고 건의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재가했어요. 그래서 강부총리가 11월16일에 비밀리에 캉드시 총재와 의논해 기본적인 합의를 봤어요. 그러니까 이미 11월16일에 IMF로 간 겁니다.”

─결국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없었던 것은 당시 ‘대한민국 주식회사’를 경영하던 경영진과 참모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이 신뢰의 위기를 낳았고 신뢰의 위기가 유동성의 위기를 야기해 외환위기가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뢰의 위기는 이미 강부총리와 제가 입각하기 전부터 쌓여온 것이고 기아사태가 결정적으로 불신을 증폭시킨 것 아닙니까. 당시 기아그룹 처리를 반대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금융개혁입법을 반대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기아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금융개혁법이 제때 통과되지 않으니까 신뢰의 위기가 가중된 것 아닙니까.”

─검찰은 김 전수석이 경제수석으로서 경제의 어려운 점을 대통령께 충분히 보고하지 않고 안이하게 보고했다는데….

“그래서 검찰에서는 경제수석의 대통령에 대한 교육책임론 등 희한한 논리를 동원합디다. 대통령을 잘못 가르쳤다는 거지요. 대한민국은 대통령 책임제 나라입니다. 경제수석은 대통령께 보고하고 지침을 받을 뿐 종합적인 판단은 대통령이 하는 겁니다. 제 변명 같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강연을 할 때 우리 경제에 구조적 문제점들이 축적되고 있는데 이것을 미리 개혁하지 않으면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이 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외환위기의 형태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경쟁력의 침하로 경제 시스템 전반에 붕괴가 올 줄 알았어요. 그런 제가 대통령께 안이하게 경제상황을 보고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대통령에게 심각한 경제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 김 전수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에게 보고를 게을리했다는데 그것은 관료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관료는 보고를 너무 많이 해서 문젭니다. 관료의 속성상 불필요한 보고라도 해놓아야 마음이 놓입니다. 윗사람이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을 안 내주니까 보고를 못할 뿐입니다. 1시간 보고해야 할 것을 5분만 보고하라니까 문제인 것이지 시간만 주면 하루종일 보고하죠. 외환위기가 엄습하던 11월초에는 하루에 4번까지 보고한 날도 있습니다. 검찰은 우리가 보고를 게을리 해서 대통령이 결단을 제대로 못했다고 하는데 무슨 결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올린 정책건의를 그대로 재가했는데….”

─결국 김영삼 전대통령은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개각을 한 것 아닙니까.

“개각을 왜 합니까.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아니면 같은 정책을 더 잘하려고 바꾸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개각을 하고서도 후임자에게 우리가 만든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는데 우리가 잘못 했으면 왜 그대로 시킵니까. 임창열 후임 경제부총리가 발표한 정책은 우리가 10일동안 준비해놓은 것을 글자 딱 한 자 고쳐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환율변동폭을 15%에서 10%로 숫자 한 자 고친 겁니다. 문제는 IMF와의 합의사항을 전면 부인하고 IMF로 안 간다고 해서 큰 국제적 문제를 야기하고 그 이후 외환위기를 더욱 증폭시킨 데 있지요.”

─이번 재판에서 해태그룹에 대해 김 전수석이 은행에 대출 압력을 넣는 것은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검찰의 발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은 대통령의 의지와 정책방향에 따라 관계부처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금융기관과 기업이 상호 이해하는 범위내에서 처리한 겁니다. 이 과정에 어떤 기관에도 의무없는 일을 강요하거나 강제력을 행사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직권남용이라면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업과 금융 관련 정책들은 휠씬 강도가 높은 직권남용이 되고 맙니다. 이것들도 전부 형사 처리하겠다는 겁니까”

검찰과 강경식·김인호씨 두 사람은 모두 항소했다. 2심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될 지 새로운 사실이 더 밝혀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IMF시절 이야기..




1997년 1월 23일 재계 자산순위 14위 규모의 대기업 '한보철강'이 자금난에 부도 처리된다.
한보철강의 부도로 계열사는 물론이고 수천 개에 이르는 하청업체와 거래업체,
또 한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까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며 부도 위기에 몰린다.
대한민국 외한위기 사태에 첫 신호탄인 셈이었다.



3월 18일, 재계의 26위인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철강 경기가 좋았던 때는 12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17위까지 올랐던 그룹이었다.
삼미그룹의 부도로 100여개나 되는 삼미특수강 하청업체도 연쇄 도산할 위기에 놓였다.



4월 21일, 자금난을 겪던 진로그룹의 부도를 막기 위해 정부는 급히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을 내린다.
하지만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이 급박하게 추진되면서 제2 금융권 등 자금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진로 문제에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며 부도를 막겠다는 방안이었지만
이로 인해 다른 기업의 부도는 되려 앞 당겨지고 말았다.
이후 5월 대농그룹, 6월 한신공영 등 굴지의 기업이 줄줄이 부도처리되며 무너진다.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 방지 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며 사실상 부도 처리된다.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 충격은 더했고
기아의 5천개가 넘는 협력 업체또한 비상에 걸려 기아의 부도는 한국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부도 발표까지 했다가 가까스로 부도를 면했던 쌍방울 그룹이
10월 15일, 결국 자금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법원에 화의 신청을 냈고 다음 날 최종 부도처리 된다.
쌍방울과 함께 태일정밀 그룹 또한 10월 16일 부도를 맞는다.



열흘 동안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 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A- → A+, 단기 : A1+ → A1로 하향조정한다.



연이어 주식값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이 발생되고
10월 27일,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괴가 우려되는 사태가 빚어진다.
미국 무디스사 역시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한다.



10월 28일, 결국 하루만에 종합주가지수 500선 마저 무너지며 증시 붕괴의 위기감은 고조된다.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다.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웠으며
강경식은 정부에 외환시장개입중단 지시했지만 재판에서는 불인정된다.



10월 30일, 환율은 1달러에 천원 가까이 치솟았다가 정부의 개입으로 폭등세가 주춤해 졌고,
주가는 다시 폭락해서 외환시장과 증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져 버린다.




10월 31일, 환율의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로 사람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11월 1일 해태그룹이 끝내 부도처리 된다. 당시 재계 순위 24위었던 해태그룹은
30대 그룹 가운데 5번째로 부실기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11월 4일 재계 순위 25인 뉴코아 그룹이 화의 신청을 한 데 이어 최종 부도가 났다.



11월 7일 주가가 사상 최대 폭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다시 급등하며
조금씩 안정세를 보이던 금융 시장이 다시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11월 10일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미화 1달러에 천원을 넘어선다.
물가는 오르고, 또 외채를 갚아야 하는 기업의 부담은 그만큼 커지게 돼 가계와 기업 모두 먹구름이 낀다.
당시 김영삼은 전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한다.



11월 17일 외국언론은 한국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하였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 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만하더라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뻔뻔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11월 21일 정부는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며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한다.
외환 위기가 한창이었던 11월 초 외환 보유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경식 부총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지 열흘도 안돼서 IMF의 구제 금융을 요청한 것이다.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 IMF의 긴급 자금지원을 위한 협상이 최종 타결된다.
IMF로 부터 550억 달러를 지원받게 됐지만 이후 한국 경제는 사실상 IMF의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금융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12월 5일 최종 부도처리 된다.
직접적인 원인은 IMF 체제에 따라 위기를 느낀 거래 은행들이 자금 제공을 기피하여
어음 2,700여억 원을 막지 못해 끝내 쓰러진 것이다.



12월 6일, 고려증권에 이어서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이 부도를 낸다.
한라그룹의 부도로 현대를 비롯한 거래 업체들의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생산 차질이 생겼다.
1997년 한해 동안엔 무려 하루 평균 40개 기업이 쓰러졌다.



정부는 협상 과정서 하나를 양보하면 IMF는 또다른 조건을 내세워서 항복을 요구했고,
결국 IMF기관에 이것 저것 다 내주고 말았다는 논란에 휩싸인다.
IMF에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IMF의 요구에 너무 많은 것을 내준 게 아니냐는 우려에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은 국민들이 뭘 몰라서 내정간섭으로 오해한다는 발언을해 논란이 된다.



12월 10일 1달러에 1600원까지 환율이 치솟으며 연초 800원대에 비해 2배로 오른다.



환율이 연일 사상 최고치로 기록하면서 생필품 68품목까지 따라서 치솟았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갈수록 심해졌다.



정부는 부도 위기에 몰린 5개 종합 금융사
나라, 대한, 신한, 중앙, 한화 총 5개 종금사 업무정지명령을 내린다.
이대로 뒀다간 기업과 다른 은행들까지 함께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미국 무디스사 한국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3 → Baa2(준 Junk),
단기 : P-3 → N∙P(투자부적격)로 하양조정한다.



12월 11일 환율은 1달러에 1719원까지 치솟았고
나흘 연속 제한폭까지 오르며 외환시장은 마비돼 버린다.
국제통화기금 IMF의 자금지원에도 불구하고 외국 금융기관은 외화 빚을 찾아가고 있고,
외국 투자자들도 여전히 대한민국을 외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당선 선거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12월 23일 사상 처음 1달러가 2천원선으로 폭등한다.
갚아야 할 외채만 2,000억 달러였으며 외화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서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자꾸만 떨어져 외화 차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김대중 당선자는 우리 경제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 막다른 골목에 서있다며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외환위기를 극복해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자율서 개입으로 강경식 정책 ‘U턴’

“부도기업 방치”소신
진로그룹 처리하며“구제하라”선회




『응급실 입구에 분초를 다투는 중환자들이 줄지어 대기해 있는 양상이다. 「한보」와 「삼미」라는 악성환자는 수술에 실패, 사망 처리했다. 진로라는 환자는 일단 응급처치를 통해 절명위기를 넘기는데 성공했으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밖에도 차마 이름을 공개할 수 없는 내로라하는 거물급 환자들이 응급실 주위에서 신음하고 있다. 과연 이런 판에 시장철학에 의거한 과감한 구조조정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재정경제원의 한 고위 관계자가 최근 실토한 작금의 심각한 경제현실이다. 재경원은 지금 말못할 고민에 빠져있다. 「골수 시장경제론자」인 강경식부총리 겸 재경원장관이 부임 이래 강도높게 추진 중인 「시장경제 만들기」를 가로막는 걸림돌들이 최근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부총리가 지난 3월6일 취임 직후 내놓은 경제난국 타개책의 핵심은 시장경제만들기였다. 정부 관료가 아닌 민간경제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작금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선진국형 경쟁구조로 바 꾸도록 제반 제도 및 관행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강부총리의 주장은 『정부 관료는 시 대착오적 노파심을 버려야 한다』는 「노파심론」으로 압축됐고 그 뒤 재정긴축, 금융실명제 개 정, 외환도입 자유화, 금융개혁 가속화 등을 통해 하나씩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같은 「강경식 밀어붙이기」에 최근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를 가로막은 첫번째 장애물은 4월 중순의 진로그룹 부도위기로 촉발된 대기업들의 연쇄 도미노 위기다. 우리 경제는 연초의 한보-삼미의 연쇄도산으로 국제신임도 하락, 환율-금리 급등이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강경식경제팀의 입장은 단호했다. 차입경영에 의존해 방만 하게 확장한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삼미가 희생된 근거도 바로 시 장경제만들기였다.

어쨌든 삼미가 무너진 뒤에도 얼마 동안은 평온상태를 유지했다. 시장경제를 만들자는 강부총리 의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담기기 시작했다. 정부도 겨우 금융시장의 불안을 잠재웠다고 한숨을 돌 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또다시 진로그룹이 부도 위기에 봉착해 강부총리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70년 전통의 진로는 매일같이 50억원의 현금이 들어오는 알짜기업이었지만 부채비율이 2800%에 달할 정도로 부실했다. 재벌2세 총수가 은행 등 남의 돈에 의존해 건설 방송 유통 등 상호연관성 이 적은 부문으로의 방만한 무한팽창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강부총리의 평소 「시장철학」대로라 면 진로는 즉각 부도를 내는게 당연했다.

연쇄부도 현실 벽에 시장경제 원칙 뒷걸음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부도위기에 몰린 대기업이 진로 한군데만이라면 부도처리 가 가능하다. 그러나 진로 외에도 자동차 식품 유통 건설 의류 부문의 내로라하는 30대 대기업 집단에 속하는 상당수 재벌들이 동일한 부도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진로를 부도처리 하면 가뜩이나 심한 시중의 자금경색이 더욱 심화돼 나머지 대기업들도 연쇄 도산할 가능성이 농 후했다.

강부총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장경제원칙을 고수할 것이냐, 아니면 현실적인 타협을 할 것 이냐. 강부총리는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 그는 4월 중순께 진로의 처리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자 『진로그룹은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다. 현재 자구노력에 착수한 만큼 현재의 경영위기를 넘기면 앞으로 경쟁력있는 기업으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인 입장표명에 불과했지만 삼미 의 부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강부총리의 이 한마디는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 것이었다.

이후 시장경제원칙은 잠시 잊고 진로살리기에 관련부처가 팔을 걷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재경 원의 「원격조종」에 의해 발족한 것이 35개 은행들의 연합기구인 채권금융기관협의회다. 오직 『부 도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구제하라』는 특명을 갖고 탄생한 기구다.

재경원은 공식적으로 『금융 기관협의회는 어디까지나 금융기관들의 자율적 결정에 따라 구성된 것이며 필요하다면 아무리 대 기업이라도 부도처리할 것』이라고 강변했으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었다. 『정부가 더이상 대기업 부도를 방치하지 않으려 한다』는게 채권금융기관협의회 발족이 던진 대 내외적 메시지였다.

재경원은 그 대신 현재 40조원대의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어 부실 대기업 못지않은 도산 위기를 맞고 있는 은행들에 대해 『1조5000억원의 기금을 새로 조성하고 세금특혜를 줘 부실채권을 덜어 주겠다』는 부실채권정리전담기구 발족이라는 반대급부성 선물을 줘야 했다. 내부 사정이야 충분 히 이해가는 일이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 시장경제론자의 중차대한 한발 후퇴였다.

강부총리의 최근 고민과 변신은 시장경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에서 시장경제론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시련인지도 모른다.




<박 태 견/ 문화일보 경제부 기자>

"'제2의 IMF', 그들은 두렵지 않다"

[기자의 눈]경제관료들이 '위기'를 두려워할까

기사입력 2008-09-03 오후 7:01:17

극단적 질문을 던져보자. 경제관료들이 과연 '위기설'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을까?

3일 <조선일보> 3면에 실린 "경제 어렵지만 제2 외환위기는 없다" 기사를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조선일보>는 이날 IMF 당시 경제관료들의 말을 빌어 "제2 외환위기는 없다"고 보도했다. 현 '9월 위기설'에 대해 IMF 당시 관료들은 입을 모아 '루머'라고 진단했다.

이날 <조선>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현 '위기설'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IMF 당시 경제관료가 하나 더 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당시 재경원 차관이었던 강 장관은 1일 국회 9월 위기설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IMF주범들 "'9월 위기설'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
▲ 3일 <조선일보>는 외환위기를 경험했던 전직 관료들의 '9월 위기설' 진단을 보도했다. ⓒ프레시안

김인호 당시 청와대 수석은 '9월 위기설'에 대해 "경제규모, 외환규모로 볼 때 위기 아니다"고 평가했다.

윤증현 당시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은 "9월 위기설은 쓸데 없는 루머다"고 말했다.

윤진식 당시 청와대 금융비서관은 "현 금융시장 불안이 외환위기나 경제위기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연종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는 "근거 없는 위기를 부추기면 해외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영욱 당시 재경원 국제금융담당관은 "외환보유액이 많고, 외채 구성이나 질 면에서 지금이 훨씬 좋다"며 위기는 없다고 봤다.

김석동 당시 재경원 외화자금과장은 "기업.금융기관의 재무구조 등이 세계적 수준으로 개선돼 위기에 대한 내성이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다들 '9월 위기설'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이들도 현재 한국경제가 어려운 상황인 것을 사실이라고 진단했으나, 그 원인이 일차적으로 글로벌 경기침체에 있다고 봤다. 이 역시 강만수 장관과 똑같은 평가다.

10년 전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외환위기를 겪은 관료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기반해 내린 분석과 평가는 한번쯤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9월 위기설'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이들의 평가도 전문가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외환위기 당시 이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시 되짚어보면 과연 경제관료들을 믿어도 되는지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1997년 1월 한보철강 부도사태가 위기의 신호탄이었지만 경제관료들은 IMF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까지도 "위기는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는 IMF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한 11월21일을 불과 열흘 앞둔 시점에도 "내 재임기간에는 창피해서 IMF에 못 간다"고 버텼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11월 10일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가 전화를 걸어 국가 부도 위험에 대해 얘기할 때까지 경제관료들을 통해 아무 것도 보고 받지 못했다고 한다. 윤진식 당시 금융비서관이 YS에게 공식 보고한 것은 11월 12일이었다. 당연히 YS는 "왜 이런 급박한 상황을 이제야 알리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YS의 진노로 끝까지 IMF 구제금융만은 피해가려던 경제관료들은 11월13일 IMF행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11월19일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경질되고 '구원투수'로 임창열 부총리가 투입됐다. 임 전 부총리는 지난해 11월 <주간조선>과 인터뷰에서 "1997년 3월부터 위기 경보가 계속 울렸는데 그걸 뒤담아 듣지 못했다. 그러다 상황이 악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닷새 전인)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가 비밀리에 입국했다. 그런데 전임 경제팀은 그 뒤에도 'IMF 구제금융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고 전임인 강경식 경제팀의 안이한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현재의 '9월 위기설'도 마찬가지다. 9월에 위기가 터지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제주체들이 위기설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할 만큼 경제 체질이 허약해져 있는 게 문제다. 따라서 지금 경제관료들이 할 일은 "위기는 없다"고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게 아니라 신음하고 있는 한국경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대응책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 지점이 10년 전 '그때 그 사람들'로부터 강만수 경제팀이 진짜 배워야할 교훈이 아닐까. 강만수 장관은 본인이 직접 겪어 봤으니까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 말이다.

책임질 필요 없는 경제관료들이 과연 '경제위기'를 두려워할까
▲ 외환위기 이후에도 외환위기 당시 경제관료들은 이후에도 주요 요직에 있었다. 당시 재경원 차관이었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뉴시스

또 이날 <조선일보>는 10년 전 '그때 그사람들'이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확인시켜줬다.

경제수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강 장관 뿐 아니라 윤진식 당시 청와대 금융비서관은 현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이다. 윤 회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산자부 장관까지 지냈으나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캠프로 합류해 노무현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줬었다.

윤증현 당시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냈다. 윤 전 금감원장 역시 지난 1월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현재 공직을 맡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지난 7월 강만수 장관 경질론이 비등할 때 후임 1순위로 거론됐었다. 그만큼 이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것이다.

김석동 당시 재경원 외화자금과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재경부 차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현재는 농협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진영욱 당시 재경원 국제금융담당관은 현재 한국투자공사 사장이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는 현재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IMF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이 사태를 불러온 상당수의 경제관료들이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잘 나가고 있었다. 경제관료들이 느끼는 '경제위기'에 대한 공포감이 과연 일반 국민들보다 클지 의문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IMF 직후인 98년 5월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수석은 직무유기와 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됐으나 99년 8월 재판을 받고 풀려났다. 법원은 "정책적 판단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런 전례 역시 강만수 경제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테니 문제다.

/전홍기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