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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비빔밥은 막걸리, 콩나물국밥으로 진화 중
전주는 비빔밥 고장을 이제 넘어섰다. 밤이 되면 효자동 삼천동 일대를 환하게 밝히는 즐비한 막걸리집이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서민들 가벼운 주머니를 슬며시 열도록 대단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막걸리 값만 내면 제철에 나는 산해진미 안주가 스무 가지나 차려지니 이 또한 최근에 자리 잡은 전주 명물이다. 이뿐이면 서럽다. 또 하나 쟁쟁한 친구가 있다. 바로 '남문시장 콩나물국밥'이다. 무슨 '새발에 피'밖에 되지 않은 콩나물국밥 하나 가지고 이렇게 거창하게 덤빌까 싶으리라. 맛을 본 사람 그 맛에 흠뻑 빠지고 만다. 주당들은 다음날 곧바로 해장을 위해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지만 낙찰을 전주콩나물국밥으로 낙찰되고 만다. 고만고만한 음식으로 전락한 퓨전비빔밥에 든 콩나물보다도 국밥에 들어 있는 알짜배기 콩나물을 청소골이 공활하게 씹히는 소리를 경험하기 위해 몇 시간을 마다않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급기야 해장국하면 남문시장을 떠올리니 허름한 재래시장을 찾지 않은 사람들도 전주에 가면 꼭 한번 들러 원조를 먹어보리라 다짐한다. 전주콩나물 뭔가 다르다는데...
가느다라면서도 씹히는 맛이 아삭아삭 살아 있다. 길이가 짧지만 알차다. 질기지도 않다. 그러니 전국에 산재한 콩나물국밥집 주인은 전주 현지에서 기른 콩나물을 구하려고 안달이다. 이른 새벽 전주고속터미널은 콩나물박스를 곳곳으로 부치기 위해 분주하기만 하다. 이 콩나물은 키가 작고 통통하지만 시중에 떠도는 공장콩나물에 비하면 훨씬 가늘다. 예전 투박한 질 시루에 기른 듯 맵시가 있다. 이 비밀은 두 곳에서 비롯한다. 한 가지는 콩나물 콩이 여타 지역과 다르다는 점이다. 임실 주변 산간 출신인 쥐눈이콩, 서목태(鼠目太)로 부르는 까만 콩이다.
같은 콩으로 콩나물을 길렀다고 하자. 흔히 쓰는 콩나물콩 대두(大豆)로 길러도 그게 아니며 거꾸로 자란 콩나물이랬자 원하는 나물을 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한들 전주에서 하던 대로 하지 않으면 결과물은 뻔하다. 선조들 말씀에 '사방 백리 즉 40km 밖의 농산물을 먹지 않는다'고 한 이치는 제철 농산물 못지않게 산지에서 먹는 것이 얼마나 몸에 이로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허름한 전주남문시장 주인아줌마와 실랑이
맛있는 걸 먹으려면 한두 끼 굶으며 기다릴 줄 아는 아량을 갖추지 못한 내게 그가 가게에 들렀다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김이었다. 그저 그런 김 두 봉지를 사서는 주머니에 넣고 허름하고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간다.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행여 옷에 먼지가 묻을까 조심스럽기만 했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서니 서너 집이 몰려 있다. 늦은 아침 시간인데 복작거린다. 분명 어제 어디선가 세상을 논하며 한잔씩 걸쳤던 사람들이 분명하다. 활짝 열린 주방 겸 식당으로 들어가자 손님과 주인이 어울려 장사진이다. 콩나물을 삶아 건지느라 김이 서려 있고 한 아주머니는 삶은 꼴뚜기를 잘게 썰고 있다. 여기에 땡초 청양고추를 다진다. 일찍 온 사람들은 거의 다 비워 그 맛이 대체 어떨까 궁금했다. 10여 분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잖은가. 사진기를 꺼내 한방 찍으려고 하자. 욕쟁이는 어디나 있게 마련 현대옥 사장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그 명성 그대로였다. "호랭이 물어갈…. 뭣땜시 자꾸 찍었싸?" "그만 찍으라고!"
찍소리 못하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성미가 아닌지라 "지금 뭐시라고 했소?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가지고 사진 한 장 못 찍는대서야 원. 쫓아낼라믄 쫓아내시오" 했다. 같이 간 전주 사람은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알았는지 끼어들지를 않고 허허 웃고 있을 뿐이다. 평소에 이런 일이 잦은가 보다. "형님, 원래 저러요?" "그런갑다 하시게. 그렇지 뭐." 수란이 빠지면?
이미 다른 데서 전주남문시장식 콩나물국밥을 먹어보았던지라 매 한가지로 여기고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서 뜨거운 국물을 내 몸으로 들여보낼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인내심에 한계를 드러낼 즈음 괴상한 것이 나왔다. 한 개는 정 없다고 핀잔 들을까봐선지 두 개는 먹어도 괜찮다는 건지 익다만 달걀 두개였다. 수란(水卵), 물처럼 흐를 성 싶은 끓이다만 달걀! 차라리 생 달걀 두 개를 줄 것이지 요리하다만 달걀이라니. 도통 첫 대면 자체가 매끄럽지가 않았다. 수프 후후룩 먹고 돈가스 다 먹었다고 자리를 털고 나오는 촌놈은 되고 싶지 않았다. 참기름 고소하게 타 약간 엉기며 굳어가고 있다. 이것을 먼저 먹으면 독한 술 마시기 전 위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듯 이바지는 충분할 것 같지만 여기서 난 어디까지나 촌뜨기고 초보자다. 돌다리도 두들겨보라 했다. 어떤 맛일까 자못 궁금했지만 참는 게 약이다. 한동안 옆을 쳐다보았다. 김을 부셔 넣고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어 휘휘 젓더니 술술 떠 넣고 있는 게 아닌가. 나도 꼭두각시처럼 같은 행동을 하며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비릿하지도 않다. 탱탱 불은 간까지 마사지 하듯 목 넘김과 속이 편안하다. 미지근한 국밥이 속까지 후련하게 한 비결이 따로 있다
이토록 늦게 대령한 이유가 뭘까? 음식을 대충 내놓는 집이나 따로국밥이 아닌 경우엔 밥이 내게 오는 동안 탱탱 불어서 퍼져 있게 마련인데 이 집은 이미 김을 죄다 빼서 꼬들꼬들 식혀놓은 밥을 따뜻한 국물에 대여섯 차례 헹군다. 헹구다 보면 오히려 불지 않고 오히려 코팅이 되듯 겉은 말끔해진다. 밥알 안쪽은 혀끝 느낌이 좋도록 알맞은 상태로 데워진다. 여기에 준비된 재료를 고명 올리듯 넣고 마지막 한 번 더 씻어서 내왔다.
김이 이제 제 소임을 다할 때다. 국밥을 한 숟가락 뜨고 위에 한 장을 올려 국밥을 싸먹는다. 맥주 집 마른안주 차림에 빠지지 않는 김이 육지 속풀이 대명사와 만났으니 설명해서 무얼 하겠는가. 어렸을 적 어머니처럼 그릇을 국물로 두르고 나서 담아선지 생각보다 오래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다 비울 때까지 맛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 외곽에서 이곳까지 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후련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땀까지 싹 빠져나가니 개운했다. 밤새 먹은 독기가 슬슬 꽁무니를 감추며 내 몸은 다시 깨어났다. 모주까지 한잔 걸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밥 한번 먹으면서 상식을 몇 번이나 고쳤다. 그래 이런 맛에 여길 그토록 찾는 건가 보다. 숭늉까지 한 그릇 마셨더니 고향 생각이 더 간절했고 후회 없는 아침 식사 덕분에 하루가 너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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