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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추워." "코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내와 딸아이가 들어오며 하는 소리이다. 대한이 소한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아내 손엔 뭉뚝한 검정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손에 든 건 뭐야?" "이거? 홍합이야. 앞에 장 선 날인가 봐. 꼬막을 팔고 있길래 좀 사왔어." "잘 됐네. 이리 추운 날엔 부침개나 홍합 삶아 먹는 게 최고지." "당신 좋아할 줄 알고 사왔지. 이천 원 어치인데 솔찬히 많네."
아내가 홍합을 커다란 냄비에 부어 삶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아이를 부른다. "야, 딸! 빨리 와 봐. 홍합이 입을 벌리기 시작한다." 딸아이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쪼르르 딸려가더니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묻는 소리가 들린다. "왜 어떤 것은 주황색이고 어떤 것은 하얀 색이야." "응, 주황색은 암컷이고 흰색은 수컷인데 주황색의 홍합이 더 맛있어." "근데 국물은 왜 하얀 색이야." "글쎄, 그건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니가 나중에 왜 그런지 찾아봐." "알았어. 나 한 번 먹어 볼래." 딸아이가 홍합 껍데기를 가지고 국물을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아빠를 부른다. 그리곤 먹어 보라며 조개접시(홍합 껍데기)로 가득 떠 준다. 국물 맛이 담백하니 맛있다.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와 사진을 찍자 딸아이가 "아빠 또 기사 쓰려고 그러지" 하며 한 마디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가 피식 웃는다. "자~, 다 됐습니다. 서방님도 우리 이쁜 아들도 어서 와서 먹어 보세요."
대학 졸업 후 한 때 취직을 못하고 보험 회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보험 회사에서 6개월 머물렀는데 한 건도 팔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그 때 난 빈털터리의 신세여서 동료들에게 얻어먹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갈 데는 없고 동료와 동대문 시장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데 포장마차가 눈에 띄었다. 포장마차엔 오뎅과 홍합 국물이 뜨거운 김을 내며 길가는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 때 함께 다닌 동료와 먹었던 홍합은 지금껏 내 기억 속에 박혀 나올 줄을 모르고 있다. 아마 추위에 떨고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것이어서 더욱 그런지 모른다. 당시 함께 다니던 짝은 중견 기업에 잘 다니다 일이 심심해 그만두고 보험 회사에 들어 왔다는 친구였는데 아마 광고 문구에 정신이 팔려 온 것 같았다. 지금 그 친구는 어찌 지내는지. 배고프고 추운 그 때를 생각하며 국물을 쑤욱 사발째 입에 대고 들이키니 속이 확 풀린다. 얼큰한 국물을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 한 잔 달라고 했더니 아내가 눈짓을 한다. 아이들 있으니 먹지 말라는 표시이다. "괜찮아. 한 잔은 약이닝께. 좀 갖다 주라고." 약이라는 말에 아내는 부스스 일어나 한 잔 따라온다. "당신도 조금 해." "서방님이나 드세요. 난 사양하겠어요." "하하. 당신이 이 맛을 몰라서 그래. 홍합 붉은 놈 하나에 붉은 술 한 잔. 어찌 표현이 멋지지 않어?" "에구 됐네요." 아빠와 엄마의 말장구에 아이들이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는다. 겨울에 비싼 것만이 맛은 아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 뜨끈뜨끈하고 담백한 홍합을 먹으며 추억을 먹는 기분도 괜찮을 성 싶다. 그리고 가족 간의 훈훈한 사랑도 맛보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