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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백담사에서 깔딱고개까지

옥빛 얼음계곡 조심조심 한발 한발
[겨울산행] 설악산 백담사에서 깔딱고개까지
임윤수(zzzohmy) 기자
▲ 봉정암으로 가는 겨울 길에는 백옥가루처럼 하얀 눈들이 깔려 있고 옥수가 얼은 청옥빛깔 옥빙교가 놓여 있었다.
ⓒ 임윤수
꼭 한 번은 가볼 거라고 몇 년째 벼르던 겨울 봉정암엘 다녀왔습니다. 딱히 가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겨울 백담계곡을 거슬러 삭풍 이겨내며 깔딱고개를 올라선다는 게 쉽사리 엄두나질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그러께도 '가야지, 이번엔 꼭 가봐야지'하며 마음으로만 다짐을 했을 뿐 실행에는 옮기지 못한 채 어영부영 봄을 맞았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어떻게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지난 늦가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약속 아닌 약속을 했습니다. 실없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엄두가 나지 않아도 꼭 다녀와야 할 상황이 되도록 겨울이 되면 '봉정암 가는 길을 걸을 것'이라고 떠벌리며 다녔습니다.

막상 겨울이 시작되니 수북한 눈, 얼어 있을지도 모를 빙판, 뼛속까지 시리게 할지도 모를 계곡바람 등에 엄두가 나질 않아 미루고 미루다 설날에서야 날짜를 잡았습니다. 1차적으로 날짜를 잡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엄청난 폭설로 입산 자체가 통제되니 다시 일주일을 미루다 지난주 토요일(11일)에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한겨울이면 백담사까지 가는 것도 큰 고행

봄부터 가을까지라면 용대리 매표에서 백담사까지 가는 것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문제 될 것이 없는 순탄한 관광길일 수도 있습니다. 체력이 되면 걸어가고, 걷는 게 싫으면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되니 선택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겨울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 한겨울이면 버스가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백담사까지 들어가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계곡에 있는 돌탑들도 백옥가루를 방석처럼 깔았습니다.
ⓒ 임윤수
겨울철에는 버스를 운행하지 않으니 매표소부터 거반 20리쯤 되는 구불구불한 포장길을 걸어야 백담사엘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같은 백담사엘 다녀왔다고 해도 겨울에 다녀온 백담사와 다른 철에 다녀온 백담사는 발품의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는 것으로 산행준비를 마치고 10시쯤에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입산이 통제될 만큼 많은 눈이 내렸지만 심하게 불었던 바람 탓인지 멀리 보이는 산에는 별스럽지 않았다는 듯 바위와 나무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담사를 다녀간 기념으로, 백담사를 찾아오며 가슴에 품었던 소원이나 기도하는 마음을 대신해 올려놓았을 수많은 돌탑들, 널찍한 백담계곡 물가에 자리하고 있던 돌탑들도 눈밭 가운데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백담산장을 지나니 눈 덮인 오솔길에 발자국으로 새긴 더 작은 오솔길이 오롯하게 생겨 있습니다.

▲ 엄청나게 내렸다는 눈 때문에 많이 걱정하였습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곳에는 무릎까지 발이 빠졌습니다.
ⓒ 임윤수
눈을 짓밟으며 올라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짐승의 이빨자국처럼 뾰족한 아이젠자국도 선명합니다. 그림자처럼 먼저 간 발자국을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갑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아래서는 '뽀드득 뽀드득' 눈들이 응답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건지,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뽀드득거리며 맞장구를 쳐줍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1시간쯤을 걷다보니 어느새 영시암입니다. 그동안 수 차례 오르내렸던 길이기에 낯설지 않은 길이지만 왠지 모든 게 낯설게만 보였습니다. 웅덩이에 머물며 가슴이 시리도록 푸른빛을 띠던 맑은 물, 졸졸거리며 흐르던 투명한 계곡 물은 물론 알록달록하거나 푸른빛 가득 머금고 있던 나뭇잎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감춰졌던 부분까지 다 드러냈을 기암의 바윗돌들도 예전의 모습으로 보이지를 않고 생소하게만 다가옵니다.

어쩌면 지금껏 오르내리며 계곡이나 기암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주변의 나무나 이파리와 어우러진, 부분적이거나 허상의 계곡과 바위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또렷합니다.
ⓒ 임윤수
생각했던 것보다 평탄한 길이기에 풀리는 긴장이 목마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꽁꽁 언 얼음과 눈만 있을 뿐 마실 물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른 계절이면 넘쳐나던 계곡물을 생각해 마실 물을 준비하지 않은 게 갈증의 업보로 다가옵니다.

몇 년씩 별렀던 '봉정암 가는 겨울 길'이지만 정작 겨울에는 계곡물도 얼어버린다는 사소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간과할 만큼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득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빈 수레처럼 덜커덩거리는 호들갑만을 떤 어리석음의 업보입니다.

하는 수 없이 수북한 눈을 한 움큼 뭉쳐 입 속에 넣었습니다. 물가에 엎드려 벌컥벌컥 마시던 물보다야 못했지만 갈증 정도는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흙내 비슷한 눈 특유의 냄새가 뒷맛으로 입안에 남습니다. 주먹만한 눈덩이가 녹아 밤톨 크기로 딱딱해진 얼음덩이를 입안에서 굴리며 그동안 뱉어왔던 언행들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참 많이 하며 살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마구 쏟아낸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담이나 비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조롱이나 비웃음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평생 짓는 이런저런 죄업 중 입으로 짓는 죄가 가장 많으며 중하다고 했습니다.

▲ 옥수가 흐르던 폭포는 청옥 절벽이 되어 있습니다.
ⓒ 임윤수
얼음덩어리처럼 딱딱해진 눈덩이에서 물기를 빨아먹으며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한다는 진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흥얼거리듯 반복해 봅니다.

백옥가루 즈려밟고, 옥빙교를 건너서

지금껏 발 아래서 뽀드득거리던 눈들은 경계해야만 할, 미끄러지거나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르는 장애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눈을 뭉쳐 갈증을 달래니 지금껏 느꼈던 갈증의 실체가 스스로의 잘못된 준비와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껏 걸었던 길, 지금 걷고 있는 길,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도 뿌려져 있을 하얀 눈들은 장애의 눈길이 아니라 백옥가루가 뿌려진 행복의 길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출발을 하면서 봉정암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평소의 두 배쯤 되는 8시간으로 예상을 했었습니다.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으려면 조심해서 걸어야 하고, 펄처럼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나가려면 아무래도 엄청난 체력소모가 예상되기에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금껏 걸어보니 평소 때보다도 오히려 평탄하고 좋았습니다.

▲ 다른 계절이면 엄두도 내지 못할 물 위를 걷고 있습니다. 발 아래는 뽀얀 백옥가루가 깔려 있고 옥수 빚어 만든 옥빙교입니다.
ⓒ 임윤수
수북하게 쌓인 눈들이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평편하게 다듬어 놓았고, 적당하게 다져진 눈들이 쿠션 좋은 스펀지처럼 폭신폭신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녹지도 않고 얼지도 않았으니 미끄러지지도, 빠져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햇살에 반사되는 하얀 눈들은 백옥석 곱게 갈아 만든 백옥가루로 생각됩니다. 이제부터라도 백옥가루 곱게 깔려진 길,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한 길을 행복한 마음으로 걸으렵니다.

수렴동대피소 앞에 있는 담(潭), 깊이가 4~5m는 된다는 계곡을 흐르던 물들도 꽁꽁 얼어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물길을 피하느라 바윗길을 기어오르고 내려야 할 곳이지만 꽁꽁 언 얼음 위를 걸으니 더없이 평탄한 지름길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맑고 파랬던 옥수가 얼은 얼음은 어떤 색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짚고 다니는 등산용 지팡이와 등산화로 쌓인 눈을 쓱쓱 밀어내니 맑은 옥색 얼음이 드러납니다. 아! 옥수가 얼어 만들어진 옥빙교 위에 서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언제 다시 이렇듯 청옥빛깔 찬란한 옥빙교를 걸어 볼 거냐는 마음에 맴돌이를 하듯 몇 바퀴를 돌았습니다.

▲ 시원하게 흐르던 맑은 물들이 쪽빛 암반처럼 보입니다.
ⓒ 임윤수
그곳에서만 머물 수 없기에 발걸음을 옮기노라니 지난 가을에 보았던 청옥빛깔 맑은 물,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깊게 보였지만 바닥까지 훤하게 들여다보이던 청정 옥수가 상념의 가슴으로 흘러듭니다.

봉정암을 향한 발놀림은 백옥가루를 즈려밟고 옥빙교(玉氷橋)를 건너고 있는 중입니다. 행복합니다. 참 잘 왔다는 생각과 날짜 또한 기막히게 잘 선택했다는 만족감으로 '룰루랄라~'거리는 흥얼거림이 코끝으로 매달립니다.

봉정암으로 가는 백담 계곡은 동안거 중

백옥가루 같은 눈들과 청옥빛깔 얼음이 없었다면 봉정암으로 가는 겨울 길이 조금은 살벌하고 눈길조차 허전했을지 모릅니다. 나무들도 허세처럼 덕지덕지 달고 있던 이파리들 모두 떨쳐내니 허전한 알몸이 되어 있습니다. 초목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바위와 땅들도 거무튀튀한 모습 그대로 드러나니 한 층 더 울퉁불퉁하니 험상궂은 산세만을 드러냅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 운행되지 않는 버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오가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계곡 자체가 동안거에 든 것이 아닌가가 의심될 정도로 조용하기만 합니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속세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날씨가 고요하니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물소리 또한 두꺼운 얼음에 갇혀 전혀 들리질 않았습니다.

▲ 엉덩이 미끄럼이라도 타고 싶을 만큼 매끄럽고 깔끔합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위험보다는 청옥에 드러날지도 모를 자화상이 두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 임윤수
움직이는 것은 휘적휘적 걷고 있는 필자의 일행과 이따금 들려오는 산새들뿐인 듯합니다. 물이 멈추니 하늘도 멈추었고 하늘이 멈추니 바람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삼라만상이 고요히 참선하고 있는데 철없는 나그네들만 부질없는 발놀림을 바쁘게 움직일 뿐입니다.

이 정도쯤이면 모습을 드러낼 다람쥐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람쥐들도 산승을 따라 동안거에 들어 선방생활을 하느라 출현하지 않는 가 봅니다. 동안거에 든 스님들이야 공부하며 화두를 깨치기 위해 참선한다지만 겨울 다람쥐는 어떤 생활, 어떤 화두를 붙잡고 무엇을 깨치려 하는지가 궁금증으로 다가옵니다.

저만치 쌍폭포로 오르는 철 계단이 보입니다. 옥수가 흐르던 계곡, 맑은 물 철철 흐르던 쌍폭포 계곡은 선비가 입었던 청옥빛깔 도포자락처럼 구불구불 흔들렸습니다. 정말 장관입니다.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얼음줄기가 거대하고, 그 얼음줄기에서 발산되는 청옥빛깔의 아름다움이 장관입니다.

▲ 깔딱고개를 오르던 거북이도 옥색도포 한 벌을 얻어 입은 모양입니다.
ⓒ 임윤수
계곡 전체가 옥색입니다. 백옥가루처럼 하얀 눈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그 청아한 청옥빛깔이 한층 더 도드라집니다. 옥빙 떼어내 부처님도 만들고, 옥가락지는 물론 옥비녀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숨이 가빠옵니다. 개구쟁이처럼 엉덩이 썰매라도 타고 싶다는 충동에 발길이 움찔거립니다. 그러나 눈으로만 보아야 했습니다. 다가서는 위험도 위험이지만 청옥빛깔 옥빙에 드러날 자화상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크고 작은, 이런 옥빙교와 옥빙폭포는 쌍폭포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벌써 2시간쯤을 걸었는데도 아직껏 백옥가루를 즈려밟고 옥빙교를 건너거나 마주대하며 걷고 있습니다.

어느덧 깔딱고개 아래입니다. 순백의 눈길과 청옥빛깔 얼음에 취해 꺼드럭꺼드럭 걷다보니 무아도취의 상태에서 깔딱고개까지 걸었습니다. 깔딱고개를 오를 때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위안 삼게 하는 돌 거북이도 백옥빛깔 눈 도포를 걸친 채 쉬고 있습니다.

▲ 걸어 올라온 길이 한눈에 보입니다. 비록 울퉁불퉁하고 험한 길이었지만 몸은 백옥이 되고 마음은 청옥빛깔이 되었습니다.
ⓒ 임윤수
사자바위에 올라 걸어온 길들을 굽어봅니다. 구불구불한 계곡, 울퉁불퉁하고 험악하기까지 한 바위산들이지만 포근한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백옥가루처럼 뽀얀 눈길을 즈려밟으며 걸었으니 발걸음은 가벼웠고, 옥빛 계곡수가 얼어 만들어진 옥빙교를 건넜으니 마음 또한 청옥빛깔입니다.

몸은 백옥이 되고 마음 또한 청옥이 되어 다가서는 그 곳, 봉정암 가는 겨울 길에는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고,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으며 그곳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행복과 지혜 그리고 표현되지 않는 그 뭔가가 있는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행복한 마음으로 봉정암을 향해 다시 한 번 발길을 옮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