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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춘천이라는 도시는 단순히 강원도의 도청소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보단, 마음속 한 구석 텅 빈 그리움이 만들어낸 이상향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한잔 술에 낮은 시골집 담장을 그리워하듯, 불현듯 턱없는 지난날의 추억이 떠오를 때면 누구라도 기억의 골목을 빠져나와 남실대는 소양강 물빛을 엿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춘천의 대명사 중 한 가지 빼 놓은 것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전 국민의 먹을거리 '춘천 닭갈비'가 있지 않을까. 지난 3일(금) 취재 차 춘천으로 향하는 길, 기꺼이 마중약속을 해준 그 지역의 박병순 시민기자를 떠올리며 저녁은 100% 춘천 닭갈비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가는 길 내내 '냠냠' 입맛을 다셨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소양강이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마치니 시간은 어둑히 저녁으로 향했고 어느덧 뱃속은 "배고파!"와 "닭갈비!"를 동시에 부르짖고 있었지만 그는 별 말 없이 <겨울연가>, 아니 닭갈비의 거리 춘천 명동을 휘적휘적 지나치고 있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웬 닭발?", "일단 드셔보시죠"
"어, 닭갈비도 맛있지만 그건 너무 빤하잖아. 닭발 어떨까? 좋은 집이 있는데." "예, 그러죠, 뭐.(젠장, 그거 별로 뜯을 것도 없잖아…)" 툴툴대며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중심가 명동을 지나 강원도청과 시청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지척 거리의 도심인데도 변방처럼 느껴지는 허름한 건물들이 숨은 그림처럼 하나둘 생겨난다. 어느 골목에선가 80년대의 노동가요가 태연히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슬며시 낯설음이 가시고 있었다.
그래도 박 기자는 가끔 소주 생각이 날 때면 언제나 이곳을 찾는다는 귀띔을 하며 "여긴 원래 밤 장사다. 음식이 제법 괜찮으니 기대했던 닭갈비가 아니라고 서운해 하지 말라"며 마음을 들여다(?)본 듯 위로를 한다. 조만간 '자리'를 깔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은 닭발과 갈매기살 그리고 잔치국수 세 가지를 한꺼번에 주문했다. 먼저 식탁에 올려진 것은 닭발이다. 그런데 무언가 다르다. 보통의 닭발 요리를 보면 양념 바른 닭발을 숯불에 구워 먹지 않는가.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르다. 두툼한 무쇠 냄비에 담겨 나온다. 게다가 넉넉하고 벌건 고추장 양념도 흥건한 것이, 볶았는지 끊여 냈는지 구분조차 모호하다. 모든 음식이 그렇겠지만 닭발 요리만큼 양념이 맛을 좌우하는 것이 또 있을까. 두 끼를 건너뛴 시장기도 있었지만 새빨간 양념을 보고 있자니 입에 넣기도 전에 눈으로 보는 맛이 강렬한 유혹으로 느껴진다. 달궈진 냄비에 지글 지글 끊어 오르는 닭발을 작은 집게를 이용해 입에 넣는 순간, 그야말로 오묘한 맛에 사로잡힌다. 숯불에 양념이 타면서 익은 불 맛 하고는 분명 다르다. 맵지만 동시에 부드럽고 편안하게 입 안에 녹아든다. 코흘리개 시절, 놀이 후 먹던 떡볶이의 그 맛
주먹밥이다. 찰조를 섞어 참기름을 두른 주먹밥을 흥건하고 매콤한 닭발양념에 찍어 먹는다. 맛도 일품이지만 주인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이 밀려온다. 술만 들이키지 말고 쓰린 빈속을 달래라는 따스한 마음씨가 입안을 풍성하게 만든다. 술과 요리로 정신없이 주린 배를 채우니 그제야 세상이 '정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요리 비법을 아주머니(박정자·60)께 물으니, 처음 닭발을 식단으로 추가 하고 일품요리를 선보이겠다는 일념으로, 유명하다는 곳은 서울이며 지방 곳곳을 수소문했다고 한다.
이어 숯불과 함께 갈매기살이 식탁에 오른다. 별 생각 없이 구워내니 자꾸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입맛이 그리 까탈진 편은 아니지만 평소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전혀 지루하지 않게 젓가락질이 이어진다. 그 맛의 비결이 무엇일까. 그랬다. 고기를, 기계에 간 것이 아닌 일일이 손으로 빻은 마늘에 버무린 것이다. 마늘의 향이 강해 자칫 고기 본래의 맛을 못 낼 수 있을까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달큰하며 본래의 맛은 살린 반면 느끼함과는 '안녕'이었다. 어느덧 닭갈비 대신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에 대해 고개가 끄덕여졌다.
춘천, 기차로 향하던 그 곳... 너무나 즐거운 식사와 기분 좋은 한잔의 부딪힘이었다. 이어 나긋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고, 큰돈을 벌지 못해도 작은 작업실과 술 한잔의 행복에 기뻐한다는 초로의 화가를 만나 집념이 담긴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서울로 향하는 차 안. 등을 기댄 채 소양강과 맛난 만찬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심히 흐뭇해 하다, 순간 '아차'싶어 무릎을 쳤다. 일정의 모든 것이 좋았지만 단 하나를 빼놓았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한참을 입을 쩍쩍거리다, 다음엔 기필코 기차를 통해 춘천의 기억에 닿고 싶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맛나던 전날 만찬의 포만감을 고마워하다 까무룩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다시 춘천을 그리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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