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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3대 근초고왕(346∼375 재위)과 아직기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17. 日 '가나'글자를 만든 왕인·아직기와 그 후손들

고대 일본어의 뿌리는 '구다라어'였다

오사카에 있는 왕인 사당 오사카 하비키노시에 있는 왕인박사의 사당 ‘사이린지’.

일본 문자인 ‘가나’의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アイウエオ)는 고대 백제인들이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서기 6세기경부터 일본말에 맞는 글자를 하나 둘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힌 사람은 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 고대사학자 오노 스즈무(大野晉) 교수다. 오노 교수는 “서문수(西文首, 왕인 박사), 왜한직(倭漢直, 아직기 왕자)의 후손인 백제인들이 ‘가나’를 만들었다. 또 한국 고대 향가(鄕歌)의 한자어 사용법은 일본 ‘만요시가’(萬葉詩歌)의 그것과 똑같다”(‘日本語の世界’ 1980)고 주장했다. 가쿠슈인대학은 옛 왕도였던 교토 땅에서 1847년 ‘공가(公家)학습소’라는 왕실학교로 설립되었다. 그 후 수도 이전으로 1877년에 도쿄로 옮겨 왕실인 궁내성에서 관장하는 ‘관립학교’로 이어지면서 대학으로 승격했다.

우리나라 ‘이두’와 마찬가지로 한자어를 일본어에 맞춰 써 온 ‘만요가나’가 “이두의 영향을 받았다”(鄕歌及び‘吏讀の硏究’ 1929)고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일제 하 서울의 경성제대 조선어학과 오구라 신페이(1882∼1944) 교수였다.

무엇 때문에 백제인들은 ‘가나’를 만든 것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은 왜나라 지배 과정에서 왕실에서 사용할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왜로 건너간 왕인은 왕자들에게 한자어 교육을 담당하면서 일본어 문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왕인과 아직기의 후손 백제인들 역시 구다라스(百濟洲) 왕실 고위직에 세습적으로 근무하면서 한자어를 왜나라 말에 맞추어 약 5세기에 걸쳐 글자를 만들어 나갔다. 그 이후 왜인들은 ‘가나’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약 1200년 전 친어머니가 백제왕족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였던 간무일왕(781∼806 재위) 치하 무렵이다.

선박 기술이 발전했던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고대인들 중 상당수가 일본 땅으로 이주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7세기 초까지 약 1000년간 도래한 인구는 150만명에 달했다. 7세기 초 당시 선주민과 도래인의 인구 비율은 1 대 8.6이나 된다”(‘日本人の成り立ち’ 1995)는 것이 도쿄대학 인류학과 하니와라 가즈로 교수 등의 ‘시뮬레이션’에 의해 밝혀졌다. 이로 미루어 당시 ‘가나’의 실수요자는 인구의 8할이 넘는 도래인들이었다는 것이 반증되는 셈이다.

◇ 왕인묘역 ‘박사왕인지묘’라는 묘비.

묻지 않아도 필자에게 “내 조상은 백제인이다”, “신라인이다”라고 말해 주는 일본인들이 요즘 와서 부쩍 늘고 있다. 특히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이 “제50대 간무왕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다.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밝힌 이후, 더욱 많은 사람이 한국인 핏줄을 타고났다고 입을 열고 있어 흥미롭다. ‘한일동족설’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가나’ 중 한문의 새김인 훈독이나 외래어 표기에 주로 쓰이는 ‘가타카나’(カタカナ)는 한자어의 한 쪽(片)을 떼어내서 만든 글자다. ‘가타카나’의 ‘아이우에오’(アイウエオ)는 한자어의 ‘阿伊宇江於’ 각 글자의 한쪽씩이다. 즉 ‘ア’는 언덕아(阿)자에서 옳을 가(可)를 떼어버리고 좌부방변(左阜傍邊)인 ‘ア’만을 취했다. 이처럼 ‘가타카나’의 각 문자들은 음절문자로 만들어져 9세기경부터 일본 내 백제인 왕실을 중심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한자어와 함께 일본어 표기의 주류가 되는 ‘히라가나’는 한자어의 흘림 글자인 초서체를 기본으로 만든 문자이다. ‘あ’는 한자 편안 안(安)자의 초서체에서, ‘い’는 써 이(以) 자의 초서체가 각각 근간이 되었다. 즉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의 기본이 된 한자의 초서체는 ‘安以宇衣於’가 모자체(母字體)다.

왕인과 아직기 후손에 의해 약 5세기 동안 이어지며 만들어진 ‘가나’는 10세기경에 이르러 정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11세기에 47문자(いろは·伊呂波 47文字)로 완성됐다. 여기에다 ‘ん’까지 포함하면 모두 48문자가 된다.

그러나 당시 왜 왕실의 백제 세력가들은 한문만을 숭상하여 뒷날에 가서 그들 스스로 만든 ‘히라가나’ 문자를 터무니없이 외면했다. 도쿄교육대학 국어과 나카다 노리오 교수는 “백제인 왕실은 ‘히라가나’는 여자들이나 쓰는 글자”(‘平安時代の國語’ 1969)라고 비하했다고 지적했다. 세종대왕 당시 훈민정음을 가리켜 ‘언문은 아녀자의 글씨다’라고 폄하하던 한국인의 조상이 한발 앞서 일본 땅에서 똑같은 권위주의 언동을 한 셈이다.

◇ 전남 영암의 왕인묘에 봉안된 왕인박사의 영정(왼쪽), 나라 지역 등 각지에서 발굴된 왕인 박사의 ‘난파진가’의 목간들. 고대의 일인들은 왕인의 ‘난파진가’를 ‘아버지의 노래’(父歌)라고 찬양하며 붓글씨로 베껴 쓸 만큼 ‘난파진가’는 일본 대표의 와카였다.

왕인 박사가 사용하기 시작한 일본 고대 한자어 ‘와카’(和歌)가 크게 발달하면서, 그 훨씬 뒷날에 가서 ‘히라가나’는 비로소 와카를 읊는 문학예술의 문자로 차츰 발전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왕인 박사가 읊은 와카인 ‘난파진가’(難波津歌)를 ‘히라가나’로 베껴 쓴 나무쪽인 ‘목간’과 문헌들이 지금껏 일본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왕인은 백제왕실에서 ‘사서오경’에 가장 뛰어난 학자에게 주었던 벼슬인 ‘오경박사’였다. 백제 제13대 근초고왕(346∼375 재위) 때는 ‘태학박사’(太學博士)라는 벼슬도 있었다. 백제 역사를 처음으로 쓴 ‘고흥’(高興)이 태학박사였다. 이처럼 백제에는 의사에겐 ‘의박사’, 주역학자에겐 ‘역박사’, 기상과 일력에 통달한 사람엔 ‘력박사’라 불렀고, 기술직으로 ‘기와박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인재를 ‘박사’로 호칭했다.

지난 3월 필자는 ‘구다라 역사 문화답사’차 전북 익산의 미륵사터와 공주 무령왕릉을 거쳐 서울에 온 지기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교토산대 고대문화연구소장) 교수와 모리 히로미치(森博達· 교토산대) 교수를 만났다. 이날 모리 교수는 “고대 일본어는 본래 ‘구다라어’(百濟語)였다. 그 후 중국 ‘오어’(吳語)의 영향으로 일본 고대어인 백제어에 차츰 탁음(濁音)이 붙게 되었다”고 귀띔했다. 모리 교수는 그런 사실을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수수께끼를 푼다’(‘日本書紀の謎を解く’ 中央公論社, 1999)의 ‘고한음과 왜음’(古韓音と倭音) 항목에서 “오음(吳音)보다도 고색(古色)을 띠는 한자음은 고한음이다. 고한음을 바탕으로 쓴 일본 가나 글자에는 사이타마 이나리야마고분(埼玉稻荷山古墳)에서 출토된 철검에 새겨진 ‘가나’이며, 스이코 여왕(592∼628) 당시 유문(遺文)의 ‘가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 사료의 ‘가나’ 등이 있다”고 고증했다.

특히 와카 모리타로(和歌森太郞) 도쿄교대 사학과 교수는 북규슈 구마모도의 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에서 발굴된 칼은 백제 개로왕(455∼475 재위) 때 백제인 기술자 이태가(伊太加)가 만들었고, “장안(張安)이 글씨를 써서 음각한 것으로 외래인이 한자를 구사했다는 증거이다”(‘日本史の虛像と實像’ 每日新聞社, 1972)라고 지적했다. 또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1919∼ ) 오사카시립대 사학과 교수는 “후나야마고분 출토 유물을 살필 때 일본 야마토 정권(4C∼7C 중엽)은 신라인지 백제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남한에 종속돼 있었다고 본다”(‘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고 야마토 정권이 고대 한국의 식민지였음을 들추어냈다.

◇ 왕인박사의 사당 ‘사이린지’ 터전에서 발굴된 거대한 주춧돌(지름 1.5m).

다케다 유키치(武田祐吉, 1886∼1958) 교수도 “한자를 음부(音符) 문자로 취급한 것으로서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스이코 여왕 때 세운 이요온천비(伊豫溫泉碑)로 한국인 혜총(惠聰)이 만든 것으로 본다. 지명을 표현하는 이요(夷與·いよ)라는 두 가지 표현의 글자는 한자로 일본어를 묘사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上代日本文學史’ 博文館, 1936)라고 이두식 ‘만요가나’ 표현임을 지적했다. 혜총은 백제 스님으로서 나라 땅 아스카에서 백제 건축가며 기와박사, 사찰미술가 등이 건너와 아스카노데라(호코지·法興寺)를 건설하던 서기 595년에 역시 백제에서 건너온 학승으로 이름 높다.

또 일본 최초로 역사책을 쓴 사람도 백제·신라인들이었다고 우지타니 쓰토무(宇治谷孟, 滋賀文敎大) 교수는 지적했다. 즉 “‘일본서기’를 고대 조선어로 읽음으로써 종래 일본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해석 방법을 알게 되었다. ‘만요가나’의 한자어 사용에는 갑류, 을류라고 하는 2종류가 있고, 그 당시 역사를 쓴 사람들의 출신지 사투리의 차이, 즉 백제계와 신라계라는 두 가지 계통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日本書紀’講談社, 1988)고 ‘만요가나’가 이두식 한자 표현 방법임을 밝혔다.

일본 첫 왕실 역사책 ‘고사기’(서기 712년)와 ‘일본서기’ 집필에도 왕실의 백제인 조신 야스마로(安萬侶·안만려, 생년 미상∼723)가 참여했다. 조정 민부경(民部卿, 내무장관)이던 안만려의 묘지가 나라시 동쪽 끝 다와라(田原)의 차밭 언덕 위에서 1979년 1월에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안만려 민부경의 사후 1256년 만에 그의 신분 기록이 새겨진 묘지석도 나왔다. 안만려의 거주지는 당시 백제 왕족들이 살았던 왕도 나라경(奈良京左京四條四坊)이라는 것이 묘지명에 쓰여 있어 그가 백제인임이 확인됐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이웃, 불과 1km 지역에는 제49대 고닌(光仁·770∼781 재위)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고닌일왕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고대 왕실 목판본 문헌(‘袋草子’, 1158)을 필자가 발굴한 바 있다. 그의 왕후는 다름아닌 백제 무령왕(501∼524 재위)의 직계 후손 화신립 황태후이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근초고왕과 아직기

백제 근초고왕때 학자 아직기는 '천자문'과'논어'를 들고 왜나라로 건너갔어요.

그덕분에 왕인은 왜국 왕의 아들(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오래도록 귀족들을 가르쳤답니다.

이로써 왜나라는 백제를 잘 섬기며 따랐다지요.

근초고왕은 이런 왜 나라에 "칠지도"를 하사하셨습니다.

칼의 한쪽 면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답니다.

- 태 ㅇㅇ년 ㅇ월 16일 한나자에 백 번을 다듬은 강철의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전쟁에 나가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이 칼을 마땅히 후왕에게 준다. -

백제 말고도 신라와 고구려도 왜나라를 보살폈지요. 특히 고구려는 정식으로 사신ㅇ르 보내 고구려 왕의 국서를 전달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왜나라 왕은 글을 읽지 못했답니다.

이와에도 고구려는 건축 예술을 전하고 승려 담징ㅇ르 보내 종이와 먹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법륭사의 벽화를 그리게 하였답니다. 이렇게 왜 나라는 백제와 신라, 고구려가 없었다면 더 오랫동안 미개인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칠지도는 일본의 왕에게 내린 신비의 칼 칠지도는 지금 일본 델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어요

日 연구진 "일본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농경인이 만들었다"

  • 입력 : 2011.05.05 21:41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농경인들에 의해 형성됐다는 연구 결과가 일본에서 제시됐다.

일본의 다양한 방언을 분석해보니, 현재의 일본어가 유래한 것은 일본에서 3만년 전부터 거주하던 수렵·채집인이 아니라, 22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농경인이라는 요지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일본 도쿄대학의 션 리와 하세가마 도시카쓰가 영국왕립학회보B(the journal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제출한 논문을 통해 공개됐으며, 뉴욕타임스(NYT)는 4일 “이 같은 발견이 일본인의 기원을 새롭게 밝혀준다”고 보도했다.

연구진은 일본어 가운데 오랜 기간 거의 변화가 없었던 동사, 숫자, 명사 등 단어 210개를 뽑은 뒤 59개 방언과 비교하는 방법으로 일본어의 기원을 추적했다. 이 결과 일본어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대대적인 이주가 이뤄진 기원전 200년쯤에 뿌리를 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이번 연구는 현대 일본어의 ‘외부 기원설’에 힘을 실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언어학계에서는 일본어의 기원을 놓고 ‘자생설’과 ‘외부 유입설’이 맞서왔다.

자생설은 현재 일본어가 1만2000~3만년부터 일본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원주민인 ‘조몬인(人)’에게서 유래했다는 학설이고, 외부유입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농경 이주민인 ‘야요기인(人)’의 언어가 원주민의 언어를 누르고 득세하면서 현재의 일본어를 이뤘다는 학설이다.

최근 고고학계 연구결과와 유전자를 통한 연구 결과는 대체로 후자의 이론을 지지하는 추세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인류 역사에서 농업의 전파가 언어의 다양화에 주된 동력이었다는 이론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NYT는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한국과 만주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야요기 문화를 장려했었고, 전후에는 조몬 문화를 강조했던 만큼, 일본어의 기원은 정치적 중요성을 띠는 문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