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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검은색 바람이 불고 있다. 밥을 지을 때 조금 집어넣으면 밥맛이 마치 찐쌀밥을 먹는 것처럼 고소하고 달콤한 흑미에서부터 검정콩으로 만든 흑두부, 검은 깨를 넣어 만든 떡과 두유, 오징어 먹물을 이용한 여러 가지 조리 등, 이제 검정색은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생명의 빛깔로 거듭나고 있다. 이는 식품학자들 사이에 검정색을 띤 열매나 채소, 음식이 영양가만 뛰어난 게 아니라 사람 몸의 면역기능을 북돋워 각종 질병 예방에 아주 좋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정색 음식은 겉보기와는 달리 고소하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깔끔한 감칠맛까지 있어 입맛이 짧은 사람들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그중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 불릴 정도로 단백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콩, 그중에서도 식이섬유를 듬뿍 품고 있는 검정콩은 예로부터 한방에서 약재로 쓰일 만큼 그 약효가 뛰어나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장수마을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오래 살려면 검정콩을 많이 먹어라'는 이야기를 누누이 한다고 하겠는가.
중국 명(明)나라 때, 본초학자(本草學者)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엮은 약학서(藥學書) <본초강목>에 따르면 검은콩은 신장을 다스리고 부종을 없애며,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한다. 이어 검은 콩은 모든 약의 독을 풀어주며, 탈모를 막고 꾸준히 먹으면 신장과 방광의 기능을 좋게 한다고 적혀 있다. 이처럼 검은콩은 다른 콩과는 달리 노화방지 성분이 4배나 많이 들어있고, 성인병 예방과 여성들의 다이어트에 큰 효과가 있다. 또한 검은콩을 그냥 먹는 것보다는 볶아서 먹으면 건강에 훨씬 더 좋다고 한다. 특히 통풍이나 관절통이 있는 사람들은 검은콩을 볶은 뒤 식초나 청주, 소주 등에 담가 하룻밤 재워 두었다가 하루에 2~3번씩 마시면 큰 효과를 볼 수가 있다. 1960년대 끝자락,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그해 가을, 나는 틈만 나면 동무들과 가까운 산에 올라 해가 지도록 꿀밤(도토리)과 알밤을 주웠다. 그리고 그렇게 주운 꿀밤과 알밤을 웃옷을 벗어 싸들고 오다가 그만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내게 식초에 절인 검정콩을 먹게 했다. 그렇게 며칠 먹고 나면 신기하게도 감기가 뚝 떨어졌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두부의 뿌리는 중국 한고조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처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끝자락 성리학자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대사구두부내향'(大舍求豆腐來餉)>이라는 제목의 시(詩) "나물죽도 오래 먹으니 맛이 없는데,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우어 주어 늙은 몸이 양생하기 더없이 좋구나"에 두부가 처음 나온다. 해마다 이맘 때, 시월 끝자락이면 어머니께서는 밭에서 거둔 콩을 맷돌에 갈아 맛난 손두부를 만들었다. 어머니께서 두부를 만드는 방법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시간도 꽤 오래 결렸다. 어머니께서는 콩을 하룻밤 정도 물에 불렸다가 맷돌에 물을 조금씩 부으며 갈았다. 그리고 그 콩죽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로 끓였다. 이어 가마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때면 양쪽에 막대기를 끼운 삼베 주머니에 그 뜨거운 콩죽을 붓고 온 힘을 다해 걸러짰다. 그리고 콩비지는 주먹밥 만하게 동글동글 말아 콩비지된장찌개를 끓일 때 쓰기 위해 따로 두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콩물이 어느 정도 식었다 싶으면 간수를 부었다. 이윽고 콩물이 가라앉으면 어머니께서는 윗물을 부어버리고 삼베가 깔린 사과박스에 콩물을 붓고 삼베로 싼 뒤 납작하고도 커다란 돌을 올려두었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나 해가 질 무렵이면 어머니께서는 삼베를 걷어낸 뒤 부엌칼로 사각지게 잘랐다. 그러면 고소한 어머니표 손두부가 수없이 만들어졌다.
"두부는 '갱년기 보약'이라 할 정도로 뇌졸중이나 치매환자에게 참 좋은 음식이지요. 저희집 흑두부는 밭에서 직접 가꾼 검정콩을 재료로 하여 재래식 손두부 만드는 방법 그대로를 고집해요. 특히 흑두부는 흰 콩이나 누런 콩으로 만든 일반 두부에 비해 영양가가 2배 이상 들어있어 보약이라고 봐야지요." 지난 21일(토) 오후 1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보광사 수구암에 계시는 효림스님을 찾아뵙고 내려오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한 식당. 단풍빛이 곱게 비치는 산골짝 계곡 옆에 마치 산장카페처럼 예쁘게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주인이 직접 검정콩으로 빚은 흑두부 전문점이다. 널찍한 앞마당 곳곳에 낙엽이 떨어져 뒹굴고 있어서 그랬을까. 왠지 쓸쓸한 분위기가 맴도는 이 집에 들어서자 바깥의 썰렁한 분위기와는 달리 사람들이 꽤 붐비고 있다. 저만치 흑두부를 안주 삼아 검정콩으로 만든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는 연인 몇 쌍… 등산복 차림의 은발 노신사 몇 분…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가을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나그네가 울긋불긋한 단풍빛이 곱게 물들고 있는 산골짝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자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쪼르르 달려온다. 나그네가 막걸리 한 사발에 흑두부를 달라고 하자 옥수수로 담근 막걸리도 있고, 검정콩으로 담근 막걸리도 있는데 어느 것을 먹을 거냐고 되묻는다. 저어기 술독이 있으니 맛을 먼저 보라는 투다.
술독으로 다가가 단지에 든 막걸리를 조금 떠서 맛을 본다. 둘다 흙내음 같은 누룩맛이 감돌면서 톡 쏘는 게 제법 독하다. 하지만 기왕 흑두부를 먹으러 왔으니 검정콩으로 만든 흑막걸리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흑막걸리가 옥수수 막걸리보다 조금 더 깊은 감칠맛이 맴돌기도 한다. 이윽고 흑막걸리 한사발과 함께 볶은 검정콩조림, 젓갈, 김, 양념간장, 막된장, 흑두부조림, 명란젓 등이 식탁 위에 차례로 올려진다. 나그네가 거무스레한 빛깔이 맴도는 흑막걸리를 사발에 부어 꿀꺽꿀꺽 들이키자 이내 속이 찌르르해진다. 검정콩으로 만든 막걸리에 검정콩을 볶아 간장에 절인 안주라. 이열치열이란 말을 이런 때 써도 되는 건가? 나그네가 그렇게 흑막걸리를 두어 잔 비워내고 있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검정콩죽을 올린다. 이어 가지런하게 썰어놓은 흑두부와 무건지, 돼지수육과 마늘, 명란젓이 차례대로 나온다. 근데, 흑두부의 양이 너무 적다. 사실, 흑두부를 먹으러 왔는데, 흑두부는 몇 점 되지 않고 다른 밑반찬이 더 푸짐하게 올려져 있다는 그 말이다. 흑막걸리 한 잔 마시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검정콩죽의 맛이 기막히도록 고소하다. 콩 특유의 비릿한 맛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혀끝에 부드럽게 착착 감기는 고소한 맛! 이 집 검정콩죽은 맷돌로 간 검정콩물을 그대로 끓여 양념장과 함께 낸다고 한다. 근데도 이렇게 깔끔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새록새록 배어날 수가 있다니.
말랑말랑하면서도 탱글탱글한 흑두부 한 점에 무건지를 싸서 입에 넣자 금세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맴돈다. 거무스레한 흑두부를 집간장을 이용한 양념장에 포옥 찍어 김에 싸먹는 맛도 별미 중의 별미다. 무건지에 싼 흑두부 한 점과 새우젓갈에 찍은 돼지수육 한 점을 김에 싸서 먹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이 집 흑두부 맛의 비결은 서해안 천일염으로 만든 간수를 사용하며, 가마솥에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펴 직접 만든다는 데 있다. 흑두부를 다 먹어갈 때쯤이면 구수한 내음이 풍기는 흑두부 된장찌개에 금방 가마솥에서 지은 곱슬곱슬한 쌀밥이 나온다. 그렇게 쌀밥 한 그릇 흑두부 된장찌개에 쓰윽쓱 비벼 먹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잠이 스르르 쏟아진다. 어떤가? 단풍빛 곱게 물드는 시월 끝자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단풍잎 흐득흐득 지는 산사 아래 산골짝에 앉아 흑두부 한 점 나눠먹으며 건강과 사랑을 속삭여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