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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알면 홍어 맛도 안다
사람들이 홍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강렬한 맛에 대한 절대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대체 홍어가 뭐길래 한번 맛 들이고 나면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다시 찾는 걸까? 홍어의 매력인지 마력인지 지구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 오묘한 맛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홍어는 숙성을 통해서 맛을 얻는다. 숙성은 시간이 만들어낸 맛이고 모든 발효식품의 특징이다. 홍어 말고 일반 생선회도 일정시간 숙성을 하면 맛이 좋아진다. 하지만 홍어만큼 독특해지진 않는다. 홍어에는 그 어떤 생선도 따라올 수 없는 깊이가 있다. 홍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와 톡 쏘는 자극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만다. 하지만 그건 1차원적인 홍어의 맛 일 뿐이지 진정한 홍어의 참맛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홍어를 먹으며 자랐다. 하지만 맛을 알고 먹은 건 아니다. 홍어가 있는 환경에서 자랐고 어른들이 즐기는 걸 따라 했을 뿐이다. 홍어 맛을 알게 된 건 사회에 나와 어느 정도 산전수전 겪고 난 후였다. 인생이 뭔지 대강 알고 나니 홍어 맛도 보였다. 그때부터 잊고 지냈던 홍어를 다시 찾았고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기쁨을 주는 홍어는 삶의 다양한 모습과 닮았다. 그래서인지 인생을 알고 성숙해질수록 잘 숙성된 홍어 맛에 빠져들게 된다. 흑산도 홍어
홍어는 주낙을 이용한 낚시로 잡는데 낚시 바늘에 찔린 홍어는 자연적으로 피가 빠지기 때문에 더욱 맛있어진다고 한다. 10월 21일 홍어 취재를 위해 흑산도행배를 탔다. 흑산도가 가까워 오자 미리 소개받은 이상수 선주께 전화를 걸었다. 목포와 흑산도에서 홍어취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정 중에 하나가 생생한 홍어 잡이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거다. 이상수 선주의 홍어 잡이 배 한성호를 타고서. 그런데, 이럴수가... 이상수 선주는 목포에 나가있다고 한다. 주말에 날씨가 좋지 않아 조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리 연락을 취해보고 오지 않는 내가 잘못이다. 흑산도 예리항을 한 바퀴 돌았다. 홍어와 전복을 파는 업소가 여러 군데 보인다. 만화 <식객>에 등장한 홍어음식점 '성우정' 도 만화 속 모습 그대로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지붕 낮은 건물 하며 촌티 나는 간판들이 보인다. 추억의 옛 거리 그대로다. 조기젓을 담그고 있는 할머니께 물었다. "이쪽에 홍어 잘하는 집이 어디예요?" "인자 다 잘해요." "할머니도 홍어 좋아하세요?" "하하... 고장에서 산 사람이 홍어 안 좋아한데요?" 홍어 취재를 위해 흑산도가 고향인 이영일씨와 통화를 했다. 이영일씨는 나와 동갑내기 친구다. 양복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타난 친구는 곧 장가를 간다고 한다. 잠시 후면 목포에 나가는데 이유도 함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배 시간이 조금 남아 가까운 홍어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두개밖에 안 되는 전형적인 홍탁집 분위기 그대로다. "할머니 나 영일이요 서울에서 친구가 왔는디 홍어 좀 주시오."
정말 맛있는 홍어는 처음엔 별 맛 안 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청량감이 돌면서 감칠맛이 난다. 이 흑산도 홍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순간적인 자극이 느껴지는 홍어를 찾는다고 한다. 어렸을 때 먹었던 강렬한 그 맛을 원한다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음이다. 자극에 별로 노출되지 않은 어릴 때 입맛과 온갖 자극으로 인해 무뎌진 입맛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옛 어르신들이 했던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놈들아 홍애(어) 묵을지도 모르냐? 김치하고 홍애하고 입에 넣어두고 우물우물 씹다가 막걸리 한잔 묵어봐라." 그렇다. 그렇게 먹어야 진짜배기 홍어 맛 아니겠는가? 천천히 씹으면서 음미할 줄 알아야 홍어 먹을 자격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친구는 홍어 한 점 먹고 나더니 그만 가봐야 한다고 한다. 배가 곧 나갈 시간이다. 아쉬운 작별이다. 친구는 헤어지며 말한다. "홍어 값은 내가 냈다." 홀로 남았다. 토요일 오후 홍어의 고장 흑산도 홍탁 집에 앉아 그렇게 홍어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아까 통화했던 이상수 선주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홍어배 2척이 입항한다는 정보를 준다. 홍어배는 못 타게 되었지만 홍어 입판 하는 광경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홍어에 김치 돼지고기를 한꺼번에 먹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직접 담근다는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켰다. 이 맛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흑산도에 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홍어 배 두 척 들어오죠?" "잘 모르겠어요." "보통 몇 시쯤 들어와요?" "7시나 8시쯤 들어 와요." 시계를 보니 6시, 한 시간도 더 남았다. PC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 나오니 홍어 배 두 척이 수협 앞에 정박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리는 비로 인해 홍어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개월여 만에 내리는 비가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홍어 잡이 배는 총 8척이다. 홍도에 2척 흑산도에 6척이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3척 뿐이었는데 다시 홍어가 잡히기 시작하자 늘어난 것이다. 오늘 들어온 배 중 한척은 50여 마리 잡았고 또 한 배는 70여 마리 잡았다고 한다. 현재 흑산도 홍어는 1번치(8kg) 암치 가 38~42만원에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안주로 먹는 도다리 간장조림이 어찌나 짜던지 소주 맛이 싱겁게 느껴질 정도다. 나보다 어려보이는 젊은 친구가 말한다. 배에서 먹는 술맛 기가 막히게 좋지 않으냐고. 내가 왜 이 맛을 모르겠는가? 홍어 잡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홍어는 버릴게 없는 생선이다. 예전엔 홍어를 배에 싫고 영산포로 향했는데 홍어를 뒤집으면 바닥에 꼽(진액)이 남았는데 그것까지 손가락으로 찍어서 먹었다고 한다. 창자에 실가리 톳 같은 걸 넣고 끓이면 속풀이 해장국으로 더 없이 좋은 음식이라고 한다. 육지에서는 홍어탕이나 홍어앳국을 먹는다. 홍어는 활어로도 먹지만 삭혀야 약이 된다고 한다. 흑산도에서는 활어로 먹는다고 하지만 홍어 잡는 사람들은 홍어는 삭혀야 맛이라고 말한다. 또 감기 걸렸을 때 먹으면 코가 뻥 뚫려야 진짜배기라고 한다. "입 천장 벗겨져도 그 뒷날 보면 나서버려. 참 희한 하그만, 그래서 좋다는 거여 그것이." 홍어는 연중 산란을 하지만 특히 4~6월까지가 주 산란시기라고 한다. 해양수산부에서 내년부터 이 시기를 금어기로 정해 홍어조업을 하지 못하게 결정했다고 한다. 홍어 보존을 위한 적절한 조치다. 칠레 홍어
몇몇 군데 홍어집 빼 놓고는 수입홍어를 쓴다. 사람들은 수입홍어 하면 칠레산만 떠 올리지만 칠레산은 국산 홍어 다음으로 맛있는 홍어다. 잘만 숙성하면 국산홍어 못지않은 육질과 맛을 낸다. 문제는 홍어가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칠레산보다 저렴한 가격의 아르헨티나, 미국, 뉴질랜드 산 홍어가 시중의 홍어 집들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칠레산 홍어 수입은 줄어들고 미국이나 아르헨티나 홍어 수입물량이 늘어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칠레산에 비해 맛이 떨어지는 홍어 수입가가 오르고 있다고 한다.
전통 옹기숙성을 하는 이곳의 홍어는 홍어카페 회원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어느 정도 검증된 맛이라 할 수 있다. 흔히 홍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냄새가 역하다고 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수도 있다. 홍어는 어떻게 숙성을 하느냐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숙성을 잘못하면 홍어 특유의 냄새가 아닌 역한 냄새가 난다. 홍어 마니아인 나도 그런 홍어는 단 한 점도 먹기 싫을 정도이니 처음 접하는 사람은 오죽 견기기 힘들겠는가? 남도홍어에서 숙성하는 홍어는 잘 숙성된 향이 난다. 그걸 우리는 기분 좋은 향이라고 한다. 칠레산이지만 생물처럼 부드러운 육질에 선홍빛은 시각까지 만족시킨다. 또 짠맛도 그리 강하지 않아, 삼합으로 먹기에도 적당하다. 그리 크지 않은 작업장에서는 3명의 직원이 식당이나 인터넷을 통해 주문한 고객들에게 보낼 홍어를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 사진 찍으면서 홍어코를 몇 점 얻어먹었다. 홍어에서 제일로 쳐 준다는 코를 씹으니 홍어 한 마리 맛이 모두 코에 들어있는 듯 진한 맛이 난다. 반나절 작업장에서 취재하고 나니 내 옷에 홍어냄새가 짙게 배었다. 걱정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으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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