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대조영의 후손 太氏’ 연원과 현황…동북공정 타개할 중요 사료
우리나라의 태씨는 발해의 전신인 진국(震國)을 세운 대중상을 시조로 한다. 대중상은 고구려 유장으로, 아들 대조영과 함께 고구려가 멸망한 지 28년 후인 696년, 고구려의 고토(故土)였던 지금의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돈화시 현유진 동모산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각각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高麗別種)과 속말말갈부의 고구려인이라고 한 기록이 전한다. 정수일 교수(동국대 사학과)는 "고구려의 별종이란 풀이에 대해 중국 측은 고구려와는 다른 종족이란 뜻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고구려의 다른 한 종으로 해석해야 정확하다"며 "속말말갈이니 백산말갈이니 하는 것도 중국왕조 중심의 역사관에 입각해 당나라 동북방의 이민족을 비하해 불렀던 것으로, 속말말갈은 송화강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이었다"고 풀이했다.
대중상이 죽자 대조영은 2년 뒤 국호를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이후 229년간 15대 황제가 재위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쓴 동방의 대제국으로 군림했다. 926년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고, 발해의 마지막 왕이었던 대인선(애황)의 세자였던 대광현은 934년 수만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와 사료가치가 있는 협계 태씨, 영순 태씨 족보 등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망국의 세자로 망명한 대광현과 발해의 신하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유민들을 고려와 한 뿌리로 여겨 후히 예우했다고 나와 있다.
대씨가 태씨로 바뀐 까닭과 시기는 언제일까.
문헌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큰 대(大)와 클 태(太)는 통용하는 자로, 동사통감(東史通鑑)에 발해 고황 대조영에 관한 기록을 할 때 태조영이라고 해 태조가 대씨에서 태씨로 사성(賜姓)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사서에도 고려에 망명한 대씨는 상당수에 이르지만 당시 태씨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현종 이후 활동했던 인물 가운데 대씨가 아닌 태씨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대씨가 태씨로 바뀐 시기를 고려 중기라고 짐작할 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후 조선에 들면서 태씨가 일반화됐다.
태씨의 본관은 크게 협계(陜溪)와 영순(永順) 등으로 나눈다. 남원, 나주, 밀양도 있지만 협계와 영순에서 분가한 것으로 본다. 특히 남원 태씨는 현재 북한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협계 태씨는 현재 전북 임실과 옥구 등지에 집거하고 있으나,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대부분 순절해 그 후손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영순 태씨는 대중상의 31세손인 태순금 일족이 임진왜란을 전후해 문경시 영순면에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이거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영순 태씨 중시조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을 물리치고 대장군에 오르며 영순군에 봉해진 태금취이고, 이때부터 관향을 영순(지금의 문경시 영순면)으로 하고 있다.
송백리 사당에 모신 위패는 조선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한 대중상의 29세손인 태두남이다. 태두남은 청백리로 유명하고, 지금은 예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돼 있다.
태씨는 1천3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와 선조의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한에 2천여가구, 6천여명이 거주한다. 성별인구 112위의 희성(稀姓)으로 남아 있다. 영순태씨는 이 가운데 4천여명으로 추정된다.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 족보는 다른 족보와 달리 발해의 기원, 발해 왕세 약사, 지리와 강역, 관제와 문물, 외교문서, 연표, 대씨가 태씨로 변한 사실 등 발해와 태씨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학계에선 발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릴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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