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日시장 2차 공습
진로 이어 롯데 내달 진출… 농심·대상·샘표식품·CJ 등도 관심
<이 기사는 주간조선 2104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08년 여름, 일본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한국의 막걸리 브랜드’에 관한 소비자 여론 조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 막걸리가 뭐냐”고 묻자, 많은 일본 소비자가 “진로 막걸리”라고 대답했다. 당시엔 ‘진로 막걸리’란 제품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생기지도 않았던 브랜드가 당시 일본서 시판되고 있던 40여종의 막걸리를 제치고, 이동막걸리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일본 소비자 머릿속에 ‘한국 술=진로’라는 이미지가 각인돼 있었기 때문에, 없는 브랜드인 ‘진로 막걸리’를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 ▲ photo 한국방송출판
뜻하지 않던 일본 소비자의 반응에 진로는 고무됐다. 진로는 즉각적으로 10명의 TF(태스크 포스)를 구성, 막걸리 개발에 나섰다. 삿포로맥주 출신의 발효 전문가 노구치 사토시를 2009년 기술 고문으로 영입, 깐깐한 위생관리를 거쳐 마산의 일송주류와 포천의 상신주류를 협력업체로 정했다. 대기업에 막걸리 공장 허가를 내주지 않는 국내 규제를 피해 중소 막걸리업체를 협력업체로 선정,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진로 상표를 붙여 일본 시장을 공략했다.
진로는 시음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인 입맛에 맞게 상쾌하고 부드러운 맛을 강조했다. 마케팅도 타깃 고객층인 20~30대 여성 취향에 맞췄다. 화장기 없는 ‘생얼’의 모델을 기용, 잠옷을 입고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광고로 내보내 ‘흥겹고 부드러운 술’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진로 막걸리’의 본격 시판을 앞둔 지난 3월엔 도쿄 롯폰기 힐스 카페에서 한국 뮤직비디오를 상영하면서 막걸리를 무료로 제공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진로 막걸리의 도전은 진로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초대박’이었다.
원래 진로가 목표로 잡았던 2010년 판매치는 10만상자. 한 상자에 1000mL짜리 15병(또는 페트)이 들어 있으니 150만병(또는 페트)이 판매목표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판매를 개시한 지난 3월 이후, 지금까지 약 한 달간 팔린 막걸리는 무려 5만3000상자, 79만5000병(또는 페트)이다. 진로막걸리의 병당 판매가는 420엔(5040원), 페트당 판매가는 600엔(7200원)으로, 이 회사는 막걸리 시판 한 달 만에 3억3390만~4억7700만엔(40억6000만~57억2400만원)의 놀랄 만한 매출을 기록한 셈이다.
전영태 진로 팀장은 “1년 목표치의 절반이 한 달 만에 팔려나갔다”며 “이렇게 많이 팔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전 팀장은 “판매 목표를 최소 4~5배 이상 높여서 다시 설정해야 할 상황”이라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 ▲ 진로가 지난 3월 도쿄에서 본격 시판한 ‘진로 막걸리’ 출시 행사를 열었다(왼쪽 사진). 진로의 행사에는 잠옷을 입은 모델 4명이 등장해 ‘편하게 마시는 부드러운 술’의 이미지를 강조했다(오른쪽 사진). photo 진로
롯데도 서울탁주 브랜드로 노크
진로에 이어 일본 시장을 두드리는 대기업은 롯데다. 지난해 3월 두산주류를 인수해 종합 주류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롯데는 현지법인인 ‘롯데주류 재팬’을 통해 6월 한국 지역별 탁주조합인 서울탁주의 ‘월매 막걸리’를 수입, 일본 주류회사인 산토리를 통해 판매할 예정이다.
롯데는 산토리를 통해 ‘경월 그린소주’를 일본에서 판매하고 있다. 롯데가 진로와 다른 점은 OEM 방식을 통해 ‘롯데막걸리’란 브랜드를 달고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탁주의 막걸리 브랜드인 ‘월매’ 이름을 그대로 달고 진출한다는 점. 롯데는 지난 4월 29일 “도쿄 지사로부터 ‘막걸리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는 긴급 메시지가 날아왔다”며 “이를 받아들여 조만간 서울탁주와 양해각서(MOU)를 체결, 판매대행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장수막걸리’로 유명한 서울탁주는 일본 수출과 급상승하는 내수 확대에 대비, 충북 진천군에 막걸리 공장을 신설하고 있다. 서울지역 7곳 탁주 제조장의 연합체인 이 회사 매출액은 2008년 663억원에서 2009년 1135억원으로, 1년 만에 무려 71%나 증가했다.
박성태 서울탁주 부장은 4월 29일 “진천공장은 살균기술을 강화한 공장으로, 1년 동안 유통이 가능한 막걸리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박 부장은 일본 진출에 대해 “명성·명문 등의 재일동포 기업을 통해 이미 일본서 ‘월매’를 팔고 있다”며 “롯데와는 아직까지 협의를 하고 있는 단계로, 양해각서를 체결하거나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 막걸리 시장 크기는 2009년 말 기준 약 20억엔(240억원) 규모에 달한다. 점유율이 가장 높은 곳은 이동막걸리로, 국순당·진로 등과 함께 선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CJ제일제당 “해외수출 대행하겠다”
국내에서 폭발적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막걸리 시장이 일본에서도 경이적 성장세를 보이자, 농심·대상·샘표식품 등 다른 대기업들도 잇달아 일본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대기업은 규제로 인해 국내 막걸리 시장에 진출할 수 없으나,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데는 제약이 없는 점을 노리고 있다.
농심은 지난 4월 19일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회사 정관 사업목적에 ‘특정주류도매업’을 추가했다. 농심은 막걸리 사업 가능성에 대해 “현재로선 검토 단계일 뿐”이라면서도 “가능성은 열어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농심은 제주 일대에 막걸리 공장 설립을 모색, 주세법 등 법리에 대한 검토와 함께 공장 부지에 대한 실사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샘표식품도 지난 3월 주총에서 ‘주류제조 및 판매업’을 추가했다. 발효식품에 노하우를 갖고 있는 샘표식품 역시 4월 19일 “(막걸리 관련) 연구소를 만든다든가 하는 등의 구체적 움직임은 아직 없지만 시장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정관을 바꿨다”고 밝혔다. 청정원으로 유명한 식품기업 대상은 “사업 목적에 별도로 주류도매업 등을 추가하진 않았지만, 막걸리 시장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주간조선에 밝혔다. CJ제일제당의 김진수 사장은 지난 3월 언론과 만나 “막걸리 균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막걸리 시장 진출설이 꾸준이 제기됐던 CJ제일제당의 김 사장은 “제조 공장을 짓지는 않지만, 해외 유통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제조사들의 해외 수출을 대행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제과업체인 오리온도 정관상 사업목적에 ‘주점업’을 추가했다. 오리온은 이에 대해 지난 4월 28일 “마켓O라는 레스토랑에서 술을 팔기 때문에 사업목적에 ‘주점업’을 추가한 것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막걸리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포석 아니냐”는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부드럽고 순한 술’ 이미지 정착
한국 막걸리가 일본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까닭은 20~30대 젊은 일본 여성들이 알코올 도수가 낮은 부드럽고 달콤한 술을 선호하기 때문. 진로 관계자는 “일본 주류시장 규모가 해마다 1000억엔씩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막걸리와 소다수를 섞은 하이볼의 수요만 늘고 있는 것이 이같은 현상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진로가 3월 29일 ‘진로 막걸리’를 출시하면서 한밤중에 잠옷을 입은 일본 여성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낸 것도 이같은 일본 트렌드를 반영했다. 막걸리가 ‘편안하고 부드러운 술’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본의 분위기엔 ‘한류’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한국에서 막걸리가 유행을 타면서 영화나 드라마에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해, 한류의 주요 소비층인 일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막걸리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발효주가 있긴 하다. ‘도부로쿠’ 또는 ‘니고리자케’라고 불리는 막걸리와 유사한 전통주가 그것이다. 하지만 맛이 시금털털한 데다 도수가 20도가량으로 높아 젊은이들이 이를 회피, ‘꼰대들이나 마시는 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빈자리를 치고들어간 것이 한국의 막걸리. 막걸리는 도수가 낮고 맛이 산뜻한 데다 ‘유산균이 많아 피부 미용에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폭발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의 현지화’다. 진로는 “일본 소비자들 기호에 맞춰 순하고 부드러운 맛을 강화한 것이 주효했다”고 밝혔다. 서울탁주 측도 “일본인 입맛에 맞게 탄산을 넣어 막걸리의 청량감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막사마<막걸리+사마(樣·님이라는 뜻의 일본어)의 합성어> 열기가 다시 한번 일본을 달구고 있다.
국내시장
2012년 ‘1조원’ 거래 시장 예측
서울탁주 등 지역별 탁주조합과, 이동막걸리·국순당 등 전문 주류업체가 패권을 쥐고 있는 국내 막걸리 시장은 2008년 3000억원 규모에서 2009년 4200억원대 규모로 40%에 달하는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막걸리 시장이 2010년 5200억원 규모에서 2012년엔 무려 1조원 규모의 거대 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그래프 참조> 여기에 한나라당 정해걸 의원이 대표 발의해 지난해 12월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전통주 등의 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안’이 오는 7월 시행되면, 바야흐로 ‘막걸리 르네상스’가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술 원산지표시제 도입, 품질인증제 확대 등을 통해 전통주의 고급화를 꾀하고 있는 이 법안은 전통주 산업발전을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제조기술 보급·품질향상을 위한 교육훈련을 실시하며, 산업 활성화를 위한 전문인력 양성을 추진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막걸리 열풍엔 지방자치단체들도 동참하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 2월 “막걸리의 명품화와 세계화를 위해 ‘경기 막걸리 세계화 클러스터’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경기 농업기술원 등이 참여해 쌀 막걸리 빚는 법에 대한 표준 매뉴얼을 만들고 물류·마케팅 시스템을 갖춰 경기도를 대표할 만한 막걸리 브랜드를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또 경기관광공사는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포천 일대 주요 막걸리 산지를 둘러보는 ‘막걸리 테마 팸투어’를 추진하고 있으며, 제주생물자원산업센터는 ㈜백록담과 공동으로 감귤막걸리를 개발, 전국 단위의 판매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범진 차장대우 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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