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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앞선 ‘여성’ CEO 김만덕

제주도를 살린, 시대 앞선 ‘여성’ CEO 김만덕

▲사재를 털어 제주도민을 구휼한 김만덕

조선시대 여인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누가 있을까? 인수대비, 문정왕후, 장희빈,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 등등. 이들은 모두 왕실 여인이다. 그럼 왕실과 관계없이 유명한 여인들로는 누가 있을까?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등은 양반이거나 양반 계급과 관련 있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중인이나 평민, 천민에 속한 여인들 중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답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한 명은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 9월10일 제주특별자치도와 SBS는 ‘김만덕 드라마’를 제작해 내년 하반기 방영하기로 합의했다. 김만덕은 누구이기에 현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

제주 사람들 “우리를 살린 이 만덕이로다”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평민 신분으로, 때로는 기녀(妓女)라는 말을 들으며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남성들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한 여인이다. 본디 김만덕은 제주의 양갓집 딸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이후 마땅히 의지할 데가 없어 한 퇴기(退妓)에게 의탁해 살았는데, 나이가 들자 자연히 관아에서 그녀를 관기(官妓)로 삼아버렸다. 하지만 만덕은 관기로 있으면서도 근검절약해 장사 밑천을 만들었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일궈갔던 것이다.


스무 살 무렵, 만덕은 거상(巨商)의 꿈을 이루기 위해 관기에서 벗어나 다시 양민이 된다. 그러고는 모아둔 재산을 밑천 삼아 장사에 뛰어든다. 채제공의 ‘만덕전’에 보면 “그녀는 재산을 늘리는 데 가장 재능이 있어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낮이를 잘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하니, 수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린 뒤 제주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도붓장수를 육지로 보내 값이 쌀 때 사서 들여오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우황 미역 전복 귤 등을 육지로 내다 팔았던 듯하다. 그리고 나중엔 배를 여러 척 거느리고 선주(船主) 노릇도 했던 듯하다.


▲ 김만덕의 초상화

정조 19년(1795)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의 시신이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제주 사람의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 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해 뭍에서 곡식을 사들인 뒤 그중 10분의 1로는 친척들을 살리고, 나머지는 관가에 실어보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게 했다. 그러자 제주 사람들이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로다!”라며 그의 은혜를 칭찬했다.

마침내 구휼이 끝난 뒤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정조 임금이 만덕에게 소원이 있다면 쉽고 어려움을 따지지 말고 특별히 들어주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에 만덕이 “다른 소원은 없사옵고, 다만 한번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대궐을 보고 금강산까지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대범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정조 20년(1796) 만덕이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니, 왕과 왕비가 크게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네가 일개 여자로 의기(義氣)를 발휘해 굶주린 백성 1000여 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이듬해 만덕이 금강산으로 떠나 천하 절경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니, 백성은 물론 선비와 공경대부까지 찾아와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정승 채제공을 비롯해 당대 문장가인 이가환 박제가 정약용 등이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며, 사후에는 추사 김정희가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널리 퍼지다)’라는 편액까지 써주었다. 그는 당시 매우 존경받는 여성 최고경영자(CEO)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것이다.

이런 그가 육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주에서는 신적 존재인 ‘할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제주섬 탄생 설화인 설문대할망 이후로 김만덕은 ‘제주도의 중시조’ 격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30여 년 전까지 제주 화북포구에 있던 그의 묘를 도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사당(모충사)에 항일 의병들과 함께 모신 것만 봐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매년 김만덕의 제사 때는 여성들이 제사를 지낸다.

아직도 제주도의 중시조로 추앙받아
김만덕의 묘가 있던 화북포구는 당시 육지와 무역을 하던 포구였다. “내가 죽으면 제주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을 받든 것인데, ‘죽어서도 제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김만덕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엇갈렸다. 구한말까지 신적 존재였던 김만덕은 일제강점기엔 기생으로서의 이력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후 모충사에서 제사를 모시면서 영웅으로 부활한다.


영웅이든 기녀든, 김만덕은 요즘처럼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 더욱 부각될 만한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노블레스 오블리주’, 곧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는 물론 함께 사는 세상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몇 해 전 국내 학술회의에서 한 발표자는 북한의 고위급 간부의 말을 인용해 금강산에 김만덕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확인할 길은 없다.

기사제공= 주간동아/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 myjin55@hanmail.net

※ 정창권 씨는 김만덕의 일대기를 다룬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푸른숲, 2007)의 저자로, 6월에는 제주도문화정보점자도서관과 함께 이 책을 점역, 출판해 전국 시각장애인 관련 기관에 무상 배포하는 등 ‘김만덕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