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동냥, 귀 동냥 재미에 116개국 다녀 … 여행은 내 운명” [중앙일보]
[이만훈 전문기자의 사람 그리고 세상] 35년째 지구촌 누비는 배낭여행가 김만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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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김만석(66)씨 같은 여행가를 만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계절 탓이 아니라도 일상에 갇혀 사는 도시인치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을 이 없을진대 35년째 천하주유를 일삼고 있다니…. 복덕방에 앉아 장기나 둘 인상인데 ‘지구별 116개국 나그네’라고 새긴 명함을 내밀며 “지금까지 세계 116개국, 1000여 곳을 여행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 출입국증명과 여권, 여행일지 등이 그의 행적을 증거하니 사람이 일순 달라 보인다. 해외여행의 달인답게 ‘솔로 김(Solo Kim)’이란 영어 이름도 갖췄다. 그는 자칭 여행가다. 하지만 직업은 ‘무(無)’다. 돈 버는 여행가가 아니라 돈 쓰는 여행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백수다.
“예술가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마음도둑’이라면 여행가는 눈동냥·귀동냥하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는 동냥아치인 셈이죠. 하지만 귀동냥 한 섬이면 나라님도 부럽지 않은 법인데 뭘 더 바라겠어요? 길에서 길(道)을 찾으면 되지 돈은 뭘….”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김만석씨가 철길 옆에서 평생 풀지 못할 화두를 곱씹으며 또 다른 행선지를 그리고 있다. [김경빈 기자] | |
김씨는 자신이 여행가가 된 것은 팔자 탓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이제껏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돌아쳐온 것만 봐도 굉장한 역마살(驛馬煞)의 소유자다. 그는 실제로 말띠다.
경남 진해가 고향인 그는 바다를 보고 자란 까닭에 어려서부터 막연히 바다 너머 세상을 꿈꾸며 자랐다. 그러다 고교 1년 때 학교 앞 책방에서 우연히 여행기 한 권을 보게 된 것이 그의 인생 좌표를 고정시켜버렸다. 그 책은 다름 아닌 국내 여행가의 원조인 김찬삼(1926~2003)선생의 여행기 『끝없는 여로』였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막연히 언젠가는 세계를 가보리라 가지고 있던 생각이 한순간에 선명해지는 거예요. 거기에다 얼마 뒤 일본인이 쓴 미국 뒷골목 여행기도 보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냐’는 마음이 불끈 생깁디다. 그래서 한창 공부해야 할 고2 때 불쑥 두 달간의 무전여행을 다녀왔죠. 집안에서 난리가 나고 반쯤 죽었다 살아났지만 어쨌든 그게 제 여행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국내 무전여행을 계기로 타고난 역마살이 고개를 드니 공부가 될 리 없었다. 틈만 나면 산이야 들이야 쏘다니느라 삼수 끝에 중앙대 사회사업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회사업학과를 나오면 사업가로 돈을 많이 벌어 여행 밑천을 마련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 한 선택이었다니 얼마나 그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는지 알 만하다.
대학 졸업 후 양산에 있는 캐나다아동구호재단에서 2년간 근무한 그는 모교 지역사회개발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71년 홀트아동복지회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또한 그의 여행 팔자에 큰 보탬이 되는 운명적(?) 선택이었다. 해외입양을 다루는 기관이다 보니 업무상 외국을 드나들게 되고 또 그 과정을 통해 마인드 자체가 자연스레 글로벌하게 됐기 때문이다.
고산병에 시달리며 3일간의 트레킹 끝에 잉카의 신비 ‘마추픽추’ 앞에 선 김만석씨. | |
김씨가 꿈에도 그리던 첫 해외여행을 한 건 74년 2월 덴마크에 입양 가는 어린이들을 호송하면서였다.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한 살배기부터 여덟 살짜리까지 9명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도쿄~앵커리지~파리를 거쳐 코펜하겐에 이르는 30여 시간의 여정이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머리털 나고 하는 첫 해외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 같은 애들을 생면부지의 나라에 보낸다는 생각에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해 입양 가정들을 방문한 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기네 자식들이 있는데도 우리 애들을 데려다 훌륭하게 키우는 걸 보고 제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사랑으로 키우던지 한 초교 2년생 입양아가 오히려 저희들을 보고 다시 한국으로 데려갈까 봐 피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첫 해외여행에서 ‘세상은 따뜻하고 사람은 착하다’는 믿음을 얻은 건 큰 공부였다. 세상주유를 향한 열정이 더욱 솟구쳤다. 출장에 휴가를 맞춘 터라 귀로에 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프랑스를 여행했다. 낯선 데 대한 두려움은커녕 정말 신났다. 자신의 본색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휴가를 덧붙여 15~20일 일정으로 새로운 곳을 찾아다녔다. 97년 12월 말 명예퇴직할 때까지 26년10개월 동안 17번의 출장을 이용해 34개국을 여행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 전략과 출장 횟수에 비해 방문 국가 수는 그다지 많지 않은 편. 업무 특성상 입양 국가들이 대부분 선진국들이 있는 유럽과 미주에 편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연봉으로 보나 근무형태로 보나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정년(만 61세)보다 5년이나 앞당겨 그만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가보고 싶은 나라는 많은데 직장에선 한계가 있고,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일단 나를 찾아보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이 해보자 하는데 생각이 미치니까 달리 더 따지고 자시고 할 게 없더라고요. 그래,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에라잇 하고 사표를 썼죠.”
난리가 났다. 부인과 자식들은 물론 형제, 처가 식구들까지 한목소리로 미친 것 아니냐며 말렸다. 아무리 취지를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특히 부인은 이혼도 불사하겠다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그인가? 직장에서 송별회를 마치자마자 98년 1월 22일 짐을 꾸려 남미행 여행길에 올랐다. 엿새만 참으면 다가올 설도 쇠지 않고 떠나는 그의 등 뒤로 온갖 야속함의 원망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여행 인생 중 본격적인 2부 ‘홀로 하는 배낭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미국을 거쳐 아르헨티나-칠레-브라질-페루-멕시코로 이어지는 3개월의 여정이었다. 당초 6개월을 작정하고 나선 길이지만 중간에 집으로 전화했다가 부인이 통화를 거부하는 등 대로(大怒)하는 걸 보고 절반으로 접었다. 하지만 잉카·마야 문명은 물론 이과수폭포, 아카풀코해변 등 그동안 손꼽아 왔던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보았다. 특히 마추픽추 트레킹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그는 남미를 다녀온 뒤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계 정복(?)의 전략을 짰다. 우선 세계를 종축과 횡축으로 나눠 종축은 ▶알래스카부터 시작해 북미, 중미를 거쳐 남미의 끝인 칠레의 파타고니아까지 ▶노르웨이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까지의 두 개 선으로 잡고, 횡축은 역시 ▶사할린-시베리아-러시아-스칸디나비아-영국으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 ▶중국-중앙아시아-이란-이라크-터키-그리스-로마-포르투갈-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두 개 선으로 공략 목표를 나눴다. 또 출정기간은 한 번에 두 달 정도로 잡고 출발 거점을 정한 뒤 이들 네 개 축을 따라 연결 여행을 하기로 했다.
“최소한의 시간과 경비로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번 나가면 한 나라에 일주일씩 3~6개국 정도를 여행합니다. 실제로 이 방법대로 지금까지 18차례 배낭여행을 통해 84개 나라를 보았습니다.”
문제는 경비. 하지만 그는 사전에 스케줄을 잘 짜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항공료 말고 월 1000달러 정도 쓴다고 한다(국내에서도 이 정도는 든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배낭촌 신세를 지는 게 절약의 비결이다. 어느 나라건 배낭촌이 있게 마련인데 숙식 모두 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양한 친구를 사귈 수 있어 일석이조다. 여행 중 숙식을 함께 하면 국적과 인종을 가릴 것 없이 형제보다 친하게 된다. 그가 이렇게 사귄 친구만 전 세계에 이럭저럭 100명쯤 된다. 술 한 병 들고 가면 하루이틀쯤은 재워주고 먹여주는 그런 친구들이다. 그가 물가가 비싼 일본이나 미국, 유럽에 가도 큰돈이 들지 않는 배경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배낭여행에만 2억원가량 들었다.
“나 혼자 호사하는 거라 가족한테는 미안하지만 얻은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때론 장엄하고 때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 숱한 볼거리하며 인류 선배들이 곳곳에 남겨 놓은 다양한 문명의 자취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가슴으로 인간애를 전해주는 다양한 인종의 사해동포들과의 만남….”
이같이 무형적인 것들 말고도 김씨가 얻는 건 또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술을 마신다. 객수(客愁)를 달랠 겸 친구를 사귀기엔 술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마신 술의 종류만 어림잡아 5000가지는 된다. 기념 삼아 모은 300여 개의 수석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뭐니뭐니해도 여행이 그에게 남겨준 최고의 보물은 여행 기록. 특히 배낭여행을 시작하고부터는 꼬박꼬박 그날 있었던 일을 메모해 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20여 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것들도 부수적인 결과일 뿐 그의 여행은 언제나 하릴없다. 그저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어디론가를 향해 집을 나서고, 보고 듣고 할 따름이다. 그는 여행 도중 여러 번 위험을 겪기도 했다. 브라질에서 풍토병으로 아랫도리가 절구통처럼 붓는 바람에 일주일이나 헤맸는가 하면, 97년 양쯔강 대홍수 때 중국 우한(武漢)에 갔다가 가슴까지 찬 물속을 4㎞나 헤치고 탈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껏 여행의 끈을 놓지 못한다.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최소한 5, 6년은 더 세계를 누빌 각오다. 우선 모로코, 세네갈 등 아프리카 서부지역 20여 국가들과 피지, 통가, 타히티 등 남태평양 국가들을 돌아보고, 그래도 형편이 되면 나머지 미답(未踏) 국가들마저 여행할 계획이다. 부리나케 서둘러 유엔 회원국(현재 193개국)을 완순(完巡)하는 게 그의 남은 목표라면 목표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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