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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제263강 11.6(목) 전통 목공예 - 박종덕 전승자(목우당 대표)

박종덕 소반 기능전승자
나무숨결 살리는 匠人
2003년 09월

우리 조상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반과 더불어 살았다. 지체 높은 양반에서부터 머슴에 이르기까지 어느 계층에서나 사용한 생활필수품으로 산지에 따라 그 지방색이 뚜렷한데 그 중에서도 경상도 통영반, 전라도 나주반, 황해도 해주반이 유명하다.
또 다리의 모양에 따라 개다리소반, 호족반, 죽절반, 외다리소반 등으로 불리는데, 이는 단순히 짐승의 다리를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무관은 호랑이를, 문관은 말을, 개는 서민을 뜻했다고 한다.소반의 재료로는 탄력이 있어 흠이 잘 생기지 않고 가벼운 은행나무를 비롯해 가래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피나무, 호두나무 등이 주로 쓰인다. 또 면이 트거나 흠이 생기는 것을 막고 방수와 멋스러움을 위해 생옻칠, 황칠, 주칠, 흑칠, 식물성 유칠 등을 여러 번 입힌다.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구봉공방(043-733-1963) 대표이자 소반(小盤) 기능전승자인 박종덕씨(51세)는 자신을 ‘나무 깎는 일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그는 ‘천직’을 벌써 30년 째 하고 있다. 나무가 좋아서, 나무 깎는 일이 좋아서 시작한 목공예는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타고난 손재주를 바탕으로 스무 살에 개인전을 여는 등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사실 소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생활고 해결을 위해서였어요. 종류도 많고 당시에는 수요도 많은데다 다른 목공예품보다 많은 기술을 부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죠.그런데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요.”20대 초반 원주 구룡사에서 무명스님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다.“스님의 전각 하는 모습에 반해 무작정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어요. 스님은 당신에게 배운 기술을 반드시 10명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단서를 다셨어요. 전 기술 배울 욕심에 무조건 알겠다고 했죠.”

대중화 위해 다양한 작품 개발
박씨는 6개월 동안 대구와 원주를 오가며 기술을 배웠다. 이를 밑천으로 1973년 약관의 나이에 고향인 대구에서 목공예 학원을 열어 강의했으며, 경북도 교육위원회 목공예 연수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군 제대 후 대전으로 거취를 옮겨 공방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반 만들기를 시작했다.
박씨는 발품을 팔아 전국을 돌며 직접 보고 만지며 제작기법을 배우고 관련 자료를 모았다. 전통의 맥은 이어가되 오늘에 맞게 제작방법을 개선하는 노력과 함께 짜임새 있고 내구성 있는 소반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기법도 개발했다. 박종덕씨는 기능전승자가 되면서 새로운 숙제를 얻었다고 말한다. 바로 생활환경이 변하면서 ‘생활 밖으로’ 밀려난 소반을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소반의 개념을 생활소품 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소품으로 인식하도록 다양한 작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스님은 저에게 기술이 아니라 나무에 대해 가르치신 겁니다. 손으로 만드는 것은 잔재주일 뿐이죠. 나무를 보는 순간 쓰임새를 알 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이 중요해요. 상의 크기가 나무의 형편에 따라 결정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스님이 말씀하신 10명도 바로 그런 안목을 가진 장인을 일컫는 것이었죠.”
박종덕씨는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나무에 무지한 자신부터 다그쳐야 한다”며 ‘나무 깎는 일’에 몰입한다.



















글│김철홍 기자│ chkim@dreamwiz.com
사진│장상용 기자│ spes21c@empal.com

'조선가구' 고집하는 박종덕씨
1992년 07월 18일 (토) | (138호)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사람이 낼 수 있는 색은 언젠가는 벗겨지든가 변합니다. 반면에 자연상태의 길이나 색깔은 아무리 시간이 지난도 늘 그 자리죠"라고 말하는 사람. "꼭 필요한 곳에 있어야할 한주먹의 모래나 자갈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며 "현재의 우리나라 4천3백만 국민들은 모두 단군의 적자인데 전통가구라는 말이 더 어울리죠"라는 생각에서 굳이 '조선가구'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사람.

이 사람이 고집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전각'이라는 도장 새기는 일부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칼로 새기는 글씨라는 '서각'도 옛 고전에 명시된 대로 '각서'라고 써야 한다며 굳이 '각서'라고 쓰자고 한다.

대청호의 저녁햇살이 수면 위에 아로새겨지는 모양을 볼 수 있는 곳. 군북면 소정리 소태골에 깃들어 민속공예를 하고 있는 구봉 박종덕(45)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박씨가 옥천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은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90년 4월에 이곳, 소태골에 정착했으니 이제 2년하고 2개월이 지난 셈이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올 때 남들은 박씨의 1남1녀에 대한 교육문제가 어렵지 않겠느냐며 그래도 큰 학교에 보내야 된다는 충고를 했으나 박씨가 '촌에서 학교다녔다고 될 거 못되고 도시에서 다녔다고 모두 대통령되느냐'며 이곳으로 전학시켜 각각 옥천중학교와 군북초교에 다니고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일. 박씨가 처음 목공예를 접한 때는 중앙대학교 2학년 재학시절, 요양차 들렀던 원주 구룡사에서 였단다. 그때 한 스님이 '각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듯 좋아보이더라고. 이것이 박씨가 목공예로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게 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71년. 대학재학시에 대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개인전이 화제가 되어 당시 경상북도 교육위원회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한 교사연수과정에 박씨를 강사로 한 목공예 과목을 신설하기도 했다는 회고이고 보면 '재능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라는 말이 맞는 듯 싶다.

본래 박씨의 고향은 대구로 개인전 이후 영남대 입구에 공방을 냈다가 뒤늦게 군에 입대, 대전 육군통신학교에서 군생활을 했다. 통신학교 법당 안의 조각을 박씨가 모두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정석모 충남지사와 정득만 3관구 사령관 등 고위층 인사들과도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곧 박씨를 충청도 사람이 되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박씨의 사회 초년생활은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비참함 그대로였다. 방바닥의 담요를 쳐들면 몸의 온기와 바닥의 냉기로 인해 물이 흐를 정도인데도 연탄 한 장 사지 못해 불을 못 땔 정도로 어려운 시기가 있었으므로 그때의 어려움을 잊지 않는다.

특히 마땅한 스승도 없었을 뿐 아니라 기록 하나없이 눈으로 보며 기예를 익혀야 했던 만큼 목공예 계통에서 이름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각고 끝에 '구봉 박종덕'이란 이름이 관심있는 이들에게 알려졌고 현재는 백퍼센트 주문생산으로 연간 총매출액이 6천만원 정도에 이른다.

소정리로 이사오면서 농사도 함께 짓기 위해 4천평의 포도밭을 사들여 직접 가꾸는 농사꾼으로서도 살기를 원하는 박씨는 지난해 첫수확을 거둬 '줄데 주고', '가져갈 데 가져가라'며 인심을 쓰고도 남은 것을 팔아 6백만원의 소득을 거뒀다. 앞으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농촌실정에 맞는 '목공예품 가공공장'을 소정리의 민속공예를 하는 다른 두사람과 힘을 합해 설립하는 것이 희망으로 충분히 타산성이 있다고 자가진단한다.

"우리 것, 우리 도자기는 스스로 숨을 쉽니다. 바이오 세라믹 같은 것은 플라스틱 등 현대화된 인공품에만 필요한 것이지 순수한 우리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우리것의 우수성에 흠뻑 빠진듯한 박씨는 아들에게 어릴 적부터 옛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땅까지 우리나라 경계였음을 알리며 지도를 그려주었을 정도였다.

선산이 있는 경북 상주로 정착하기 위해 시외버스로 상주에 가던 도중 대청호에 비치는 햇빛이 너무도 아름다워 상주행을 포기하고 소정리에 정착했다는 구봉. 특별히 주문생산품의 재료가 수입목이지 않는 한 모든 재료를 우리나라 나무를 쓰는 박씨는 '또다른 희망을 주는 농사'를 짓기 위해 오늘도 순수한 우리 것을 지키며 가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