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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제264강11.13(목) 선각자 서재필 - 동아일보 고승철 국장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중 역사, 팩션 소설 부문 당선작. 정치와 이념에서 자유로운 시각으로 서재필의 생애를 차분히 짚어본 소설이다. 역사에서 면밀히 다루지 않은 서재필의 활동과 내면의 깊은 고뇌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도 함께 돌아볼 기회가 될 것이다.

서재필은 구한말 격변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6.25 전쟁에 이르는 시대를 살다 갔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의 일원이었고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시절에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조선 조정, 일본 식민지 정부, 대한민국 제1공화국까지 이어지는 정권의 감시와 견제를 받으며 살았던 서재필. 저자는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어 오해를 받고 있는 서재필의 일화를 당시 상황적 맥락에서 파악한다. 독립 협회에 대한 뒷얘기와 정권의 방해공작 등, 서재필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모두가 잠든 시각, 서재필은 숙소 부근 공원의 후미진 곳에 홀로 앉았다. 달빛이 어슴푸레했다. 이제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 머리에 달린 상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품에서 장도를 꺼냈다. 싹둑...
"상투여, 내 몸에서 떠나거라. 너는 구습의 상징물 아니냐? 나는 너를 보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노라." - 본문 117쪽에서

도립신문사 사장실은 말이 사장실이지 가로 세로 각각 삼 미터 가량의 좁은 공간이었다. 그 안에 작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서재필은 새벽 적막 속에서「독립신문」사설을 집필했다. 이럴 때면 그는 심장의 벅찬 고동 소리를 느꼈다. 가끔 주시경이 쓸 때도 있었지만,「독립신문」의 논설은 거의 서재필이 직접 집필했다.
인권, 법치주의, 위생, 경제 개발... 「독립신문」사설의 주제는 거의 그런 것이었다. 조선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지만,서재필은 서양 근대화의 산물인 이런 개념을 조선에 널리 전파해야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고유 - 본명 고승철. 부산, 통영, 마산 등 항구 도시에서 바다 너머 세계를 동경하며 자랐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고려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경향신문, 한국경제신문,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여 년간 재직하면서 세상사를 관찰하였으며, 프랑스와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특파원 혹은 유학생으로 체류하며 다른 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왔다.
책으로는 ≪학자와 부총리≫ ≪유럽의 푸른 신호등≫ ≪최고 경영자의 책읽기≫ ≪대기업의 리더들≫(공저) ≪학문의 길≫(공저) ≪밥과 글≫ 등이 있다.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역사.팩션 소설 부문에서 장편 <푸른 꿈을 꾸다>가 당선되었다.

서재필. 그는 누구인가? 「독립신문」창간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 그러나 그의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생애를 탐색하면 금맥 같은 스토리가 무더기로 드러난다. 웅대한 스케일의 TV 대하 사극 같은 장쾌한 일대기가 그려진다. 혁명가, 군인, 의사, 언론인, 연설가, 스포츠맨, 기업인, 독립투사, 의학자... 짧은 인생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다역을 맡을 수 있을까.
- 고유



1864년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일곱 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고,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 인사들과 교류하여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 군대의 근대화에 뜻을 두고 일본의 토야마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1년여 만에 조선 조정의 지원이 끊겨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다. 1884년 12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갑신정변 진행 중에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였으나 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YMCA에서 영어 공부를 하다 사업가 존 웰스 홀렌백의 후원으로 힐먼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때 홀렌백은 서재필에게 목회자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 선교 활동을 해주기를 바랐으나 미국 망명 당시 역적으로 몰렸던 서재필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후원을 중단하게 된다. 이 무렵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만들고 생활을 위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후 우연히 알게 된 빌링스 대령을 통해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일하며 야간 라파예트 의과대학을 무사히 마쳐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으며 우연한 인연으로 알게 된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다.
그사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일어나 대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갑신오적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박정양 내각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뒤이어 갑오개혁 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다가 실각한 박영효가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서재필은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백성의 계몽이라 보고 신문 발간 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독립 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 협회의 창설과 함께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강사로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협성회라는 학생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신문 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가르쳤고, 민족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막대한 영향력을 꺼린 수구파 정부와 열강의 방해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병원을 개업하여 의료 활동을 벌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 소식을 듣자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에 썼다. 일본 제국주의를 전 세계에 규탄하여 조선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 친우회를 결성하여 재미 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 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 후원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가산을 소진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지내며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근무하였다.
해방되자 하지 중장의 요청을 받아 귀국하였다. 미군정 당시 강연과 언론 활동을 통해 민의를 모으는 데 힘썼으며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새로운 독립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이 끝나자 서재필 지지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정치권의 견제로 또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정부 수립과 6.25 발발 소식을 들었으며, 한국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돌아온 역적
재기와 혈기
문인에서 무인으로
삼일천하
아메리카에 발을 딛고
꿈을 펼치다
미완의 꿈
파고는 높아 가고
광복을 맞아

서재필 소재 역사소설 펴낸 기자 고승철 문화 및 예술

2008/06/29 06:29

서재필 소재 역사소설 펴낸 기자 고승철

기획·김명희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기 마련. 하지만 지천명의 나이에 기자에서 작가로 변신한 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야기를 들었다.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죠. 쉰 살이 넘어서야 천명을 알았습니다.”

지난 2006년 한국전자출판협회가 공모한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역사·팩션 소설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가란 직함을 하나 더 얻은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54). 지난 5월 초 당선작 ‘푸른 꿈을 꾸다’를 일부 개작, 장편소설 ‘서재필 광야에 서다’를 펴낸 그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1층 ‘서재필룸’에서 만났다. 이곳은 광복 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곳으로,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공간이다.

고유(高惟)라는 필명의 작가로 변신을 꾀한 이유를 묻자 그는 “주니어 기자 시절부터 신문에 짧은 기사를 쓰는 게 답답했다. 심층보도나 탐사보도 같이 호흡이 긴 글을 쓰는 게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89년 조순 경제부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학자와 부총리’를 시작으로 올 초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고승철-밥과 글’까지 몇 권의 책을 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모두 기자활동의 연장선상이었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소설을 쓰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딱딱한 경제기사를 부드럽게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소설을 즐겨 읽기만 하던” 그가 소설 집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난 200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 관한 자료를 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국 언론사를 공부하다 서재필 선생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알게 됐어요. 서재필 하면 대부분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독립신문’을 창간한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그분의 삶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언론인이자 의사, 혁명가, 군인, 연설가, 스포츠맨, 기업인, 독립투사이기도 했어요. 쿠바섬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벌일 때 쿠바에 가 종군 의무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죠. 짧은 일생에서 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 남긴 족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이 아쉬웠고요. 그래서 그분의 생애를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안 쓰면 영영 묻혀버릴 것 같은,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막상 펜을 잡자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25년 넘게 기사를 써왔지만, 소설은 기사를 쓰는 것과는 또 달랐다.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을 구해 독파하면서 플롯 등과 같은 소설 기법을 익혔다. 아울러 집필실을 마련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소설을 썼다고 한다. 기사를 쓰던 이가 갑자기 소설을 쓴다고 하면 생뚱맞게 여길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것.

“일과를 마친 뒤 심야와 새벽 시간, 주말 동안 집필에 몰입해 거의 3개월 만에 소설을 탈고했어요. 한번 시작하니까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 술술 풀리더라고요. 저 스스로도 놀랐어요. 디지털 작가상에 응모를 하고 보니 다른 지원자들은 대부분 기성작가들이더군요. 그에 비해 전 소설을 처음 쓴데다, 그것도 단기간에 써서 수상은 기대도 못했는데 운이 좋았죠(웃음).”

지난해 12월 당선자 발표가 나자 그는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에게만 수상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모두 깜짝 놀랐지만 단 한 사람, 그의 아내만은 수상 소식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남편이 기자직에만 전념하기를 바라는 아내는 지금도 여전히 그가 소설을 쓰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엉터리 기사 보고 기자 되기로 결심, 상상력으로 기록의 빈틈 메우는 게 소설의 매력

지난 81년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기자로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아랍에미리트·요르단·이집트를 돌며 중동사태를 취재했고, 그해 10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에 있었다. 91년 걸프전이 발발하자 이스라엘에서 전황을 취재했고, 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수행 취재를 했다. 기자가 된 동기에 대해 묻자, 그는 엉뚱하게도 “복싱 때문”이라며 웃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인 70년대 초엔 복싱이 최고 인기 스포츠였죠. 그래서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와서는 문화체육관이나 장충체육관 등으로 복싱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어요. 그때마다 ‘기자석’이라 써놓은 링사이드의 좋은 자리는 거의 텅 비어 있었어요. 그런데도 신기하게 신문을 보면 복싱 기사가 보도되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기사에 오류가 많았어요. 대전 결과만 보고 적당히 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참다 못해 경기장에 수첩을 들고 가 메모를 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독자 투고 형식으로 신문과 잡지에 보냈어요. 제 얼굴 사진과 함께 글이 실리기 시작했고, 원고지에 쓴 글이 활자화될 때마다 짜릿한 쾌감을 느꼈죠.”

서재필을 주인공으로 첫 소설을 펴낸 고승철 작가는 사실에 기반을 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한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유학과 대학원 진학,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보자’는 생각에 기자를 택했다고 한다. 아마추어 기고가 체험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복싱 이외의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당시는 부정확한 정보, 비뚤어진 시각을 제공하는 일부 기존 언론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혈기로 가득 차 있었죠. 지금 돌아보면 기자생활을 하면서 ‘불의를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 필봉을 휘두른다’는 춘추필법을 제대로 실천하진 못한 것 같아요. 굳이 변명하자면, 그런 상황에 부딪힐 기회가 흔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해괴한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처음의 다짐은 거의 실천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다양한 인물들과 접촉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관찰력을 다듬을 수 있었던 점, 특파원 근무를 포함해 여러 차례 해외 취재로 바깥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던 점은 기자로서 얻은 행운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작가의 매력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저널리스트는 항상 취재원이 중심이 돼야 하잖아요. 취재원이 항성이면 기자는 행성이고, 취재원이 발전기라면 저희는 송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취재원이 말한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 기자들의 사명이자 동시에 한계죠. 그런데 작가는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잖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은 제가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이 되는 거죠. 소설 속에선 제가 인물을 창조하고 질서를 창조하고,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 기자는 정년이 있는 데 반해 작가는 정년이 없다는 것도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래도록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고전 많이 읽고 생각을 글로 쉽게 표현하는 능력 키우는 게 좋은 글쓰기의 비결”

“아직 우리 아이들은 제 소설을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읽지 않는 게 오히려 속 편하죠.”

그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작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쑥스러운 듯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는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는데 아들은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고, 딸은 호주 멜버른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 집사람이 벤처기업인으로서 한 대학에 특강을 갔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아이들이 어느 학교 다니는지 묻더랍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느 학교에, 딸은 어느 학교에 다닌다고 했더니 수강생들이 기업 경영보다는 자녀교육 비결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바람에 민망했다고 합니다(웃음).”

그는 종종 사람들이 자녀교육법에 대해 물어보면 난감하다고 한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나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주말마다 온 가족이 모여 독서하는 시간을 가진 것 정도라고.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끝이 없어요. 저는 특히 고전을 읽으라고 하죠.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파리에서 3년 반 정도, 인디애나대학에서 연수를 받느라 미국에서 1년여 지낸 적이 있어요. 그때 느낀 건데, 선진국의 힘은 고전 읽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더라고요. 미국에서 명문대 지망생들은 고전 원전을 적어도 수십 권은 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입학지원서에서 얕은 사고력이 금세 들통나니까요. 프랑스에서도 겉핥기식 독서만 한 학생은 대학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어렵죠. 그래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같은 고전을 탐독하는 고교생이 흔해요.”

요즘 우리나라 대학입시가 사고력과 글쓰기 능력을 요하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는데 그는 이것이야말로 좋은 징조라고 말한다. 그런 능력은 족집게 과외로 하루아침에 익힐 수 없으며 꾸준한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꾸준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또한 거기에서 그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해요.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글쓰기의 기본은 ‘정확한 소통’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쉽게 표현하는 능력도 키워야 하고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기자 출신 작가 이병주와 헤밍웨이를 모델로 삼아 사실에 기반을 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송재 서재필박사 기념공원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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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화순투데이] |2008/07/09 (수)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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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문덕에서 출생한 서재필박사(1864.1.7~1951.1.5)는 과거시험에 합격 교서관 부정자를 지내다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에 유학한 후 1884년12월4일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후 3일만에 뜻을 접고 박영효,서광범과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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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화순투데이 >
장민구 기자

전남 보성문덕에서 출생한 서재필박사(1864.1.7~1951.1.5)는 과거시험에 합격 교서관 부정자를 지내다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에 유학한 후 1884년12월4일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후 3일만에 뜻을 접고 박영효,서광범과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서재필박사는 미국에서 미육군 군의참모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며 콜럼비안대(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 한인 최초의 의학사(M.D)가 되어 미국시민권을 획득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하여 두 딸(스테파니,뮤리엘)을 낳았으며,1895년 귀국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와 독립문" 등을 만들었다.

서박사는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고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설립했으며, 워싱턴 군축회의 한국 대표단으로 외교활동을 추진하는가 하면 하와이서 열린 범태평양회의 한국 대표단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 서재필 기념관 ©화순투데이

또한 주요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를 한후 펜실바니아주 체스터와 메리다 등지에서 의원을 개업하기도 했으며, 1945년 미군정 최고 고문 자격으로 해방된 고국을 방문 통일된 민주'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1951년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8일 열린 서재필박사 기념공원 개관식은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1024번지에 위치한 공원광장에서 (사)서재필 기념사업회의 주관아래 박준형도지사,광주지방 보훈청 문병민청장, 보성군 정종해군수 등 많은 기관단체장과 사회단체 그리고 관계자와 보성군민 등 수백명이 자리한 가운데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기념공원 조성에 기여한 공으로 (주)성파 서운석대표와 남양건설 마형렬회장 그리고 "서재필 광야에 서다"란 장편소설을 집필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한 동아일보 고승철국장 등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사)송재 서재필 기념사업회 김중채이사장의 기념사 그리고 박준영도지사의 축사가 이어졌으며, 개화문의 테이프커팅, 송재사사당의 헌화 및 분향 그리고 동상 제막을 끝으로 기념식을 마쳤다.


▲ 동아일보 고승철국장에 감사패 전하는 박준영도지사 ©화순투데이

서재필기념관은 서재필기념공원사업의 일환으로 총 사업비 124억원을 들여 1992년 착공, 2004년 완공됐으나 그동안 운영비 부담과 관리주체를 놓고 전남도와 보성군, 기념사업회 측의 의견이 맞지 않아 개관식을 갖지 못한 채 임시로 관광객들에게 관람을 허용해 왔다.

서재필기념관의 `반쪽개관'은 관리운영비 문제가 조금씩 풀리면서 해결됐다.

지난해 국가보훈처로부터 기념관이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돼 매년 2천만원의 예산을 지원받게 됐고 전남도로부터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천만원의 운영비를 지원받으면서 정식 개관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이에 따라 기념공원 운영은 앞으로 기념사업회 측이 맡고 운영비는 보훈처와 전남도의 지원과 관람비 등으로 충당될 것으로 보인다.

4만5천700㎡ 규모의 기념공원에는 기념관과 독립문, 사당, 조각공원, 동상,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서 있으며 기념관에는 700여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기념사업회는 정식개관을 계기로 현재 기념관에 없는 도록을 제작하는 등 유물전시 사업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 기념사업회 김중채이사장 ©화순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