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 | ⓒ 유근종 | | 학창시절 어느 날 후배가 "선배, 꿈 속에서 절에 다녀왔는데, 그 절은 산에 있고 바다가 보였어요. 혹시 어느 절인지 아세요?"하면서 느닷없이 물어온 적이 있다.
나 역시 막연한 생각에 그냥 내소사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에 있는 바다가 보이는 절은 꽤나 많다. 하지만 그 당시 왜 내소사가 그것도 바다가 보이지도 않는 절인데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다. 변산반도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는지 아니면 무슨 전생에 인연이 있는 것인지….
 | | ▲ 내소사 대웅보전 | | ⓒ 유근종 | | 이번에는 좀 고생할 작정을 하고 내소사 꽃살문을 만나러 갔다. 진주에서 변산반도까지는 꽤나 먼 여정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보다는 밤늦게 출발해서 중간쯤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 | ▲ 줄포 가는 길, 무 수확이 한창이다 | | ⓒ 유근종 | | 내소사 외에는 뚜렷한 목적없이 이정표를 따라 무작정 다니기로 했다. 줄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줄포라면 이 근처에 포구가 있다는 말인데 길가는 온통 무 수확이 한창이다. 그냥 포구가 보고 싶어 길을 가다 동네 어르신께 바다를 여쭸더니 애매한 대답만 하시기에 그냥 직진만 했다. 하지만 바다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직진만 하면 바다가 나올 것 같은 엉뚱한 생각만 한 것 같아 오던 길을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 | ▲ 곰소염전의 적막한 풍경 | | ⓒ 유근종 | | 아~, 변산반도에는 내소사 외에도 곰소염전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곰소로 가는 길, 길 가에 사진으로 봐서 어느 정도 익숙한 염전의 풍경이 있어 차를 세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곰소에 요즘 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농한기에 찾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새들이 떠나 간 숲은 적막하다더니 곰소염전이 딱 그랬다. 사람 없는 염전에는 이따금 지나가는 차 소리 외에는 정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곰소염전에 새하얀 구름들이 떠다닌다.
 | | ▲ 곰소항에서 만난 말린 갈치 | | ⓒ 유근종 | | 늦은 아침을 먹으러 곰소항에 들렀다. 항구에 들르면 가장 먼저 어시장에 가볼 일이다. 어시장 풍경은 평일이라 한산하다. 상인들의 발길들도 느긋하기만 하다. 도시의 시장들과는 다른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곰소에는 염전이 발달해서인지 거의 대부분의 찬거리가 소금에 절인 것들이다. 젓갈은 당연한 것이고 곰소에서 처음 본 것으로 갈치를 말려서 요리를 해먹는 것도 있다. 처음엔 뭔가 했는데 여기저기서 갈치를 손질하는 모습도 보였고, 갈치를 말려서 파는 모습도 보였다.
 | | ▲ 변산에서는 흔히 보는 풍경 | | ⓒ 유근종 |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를 채우고 내소사(來蘇寺)로 향했다. 곰소항에서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니 금세 도착한다. 제법 먼 길을 생각하고 왔는데 너무 가까이에 있으니 이상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 스님이 처음으로 지었으며 조선 인조와 고종 때 새로 지은 절이다. 원래 절의 이름은 소래사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지금의 내소사로 바뀌었다.
 | | ▲ 내소사 젓나무 숲 길, 삼림욕이 따로 없다 | | ⓒ 유근종 | | 몇 년 만에 다시 걸어보는 내소사 젓나무(전나무라고도 부름) 숲길은 여전히 아름답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간간이 들리는 솔바람 소리까지 여기 온 보람이 느껴진다.
 | | ▲ 내소사 부도밭 풍경 | | ⓒ 유근종 | | 절 입구 왼쪽 부도밭에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아 온 부도밭과는 달리 산을 지고 또 앞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 | ▲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의 그림자 | | ⓒ 유근종 | | 내소사에 오는 날이면 항상 궂은 날씨 때문에 아름다운 꽃살문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딱 걸린 날씨 덕에 솔바람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어 좋았다.
대웅전에서 삼배를 하고 나와 따뜻한 햇살아래 앉아 있는 시간, 잠시나마 세상 모든 것을 잊어본다. 절에서 이렇게 편안한 마음은 처음 가져보는 여유다. 마음 같아서는 마냥 한나절을 그렇게 앉아있고 싶다. 나오는 길, 찻집에 앉아 솔바람차를 한 잔 마시고 격포를 향해 떠난다.
격포에 갔더니 이젠 썰물 때라 바람까지 거세다. 그래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던 채석강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되돌아 왔다. 채석강은 태곳적 호수였으나 격렬한 지각변동으로 솟아올라 절벽이 된 것인데 진주에서 가까운 고성의 공룡발자국이 있는 쌍발과 그 생성연대가 비슷하다.
 | | ▲ 채석강 해식동굴 | | ⓒ 유근종 | | 중생대 백악기(약 7천만 년 전) 지층으로 바닷물에 깎여서 퇴적한 절벽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책들 같다. 내소사는 때를 잘 맞췄는데 채석강은 때가 맞지 않았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격포에서 내변산으로 향한다. 내변산 가는 길은 여태까지 달려 온 풍경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차를 몰고 가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읍 방향으로 가는 길, 어디선가 들어 본 개암사라는 절이 나온다. 망설이다 개암사로 들었는데 대웅전 공사 중이라 다음 기회로 미뤘다.
이번 여행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간 여행이었다. 채석강은 켜켜이 쌓아 온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었고, 내소사의 빛바랜 단청이며 꽃살문, 곰소염전의 정지된 시간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시간 앞에서의 겸허함을 가르치는 듯하다.
혼자 떠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는 것, 이런 여유를 가끔씩 누려보는 것도 삶의 활력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