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소리 나는 달동네를 찾아서
사진/다큐 2009/01/19 16:36 해를그리며
인천시 동구 송현동에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http://www.icdonggu.go.kr/museum/) 이 있다. 처음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이름이 너무나 생소했다. 우리의 산이름에 이렇게 낯선 산이름이 있었던가?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 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한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의 물 확보로 큰 곤란을 겪었다. 이에 일제 통감부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착수하게 하였다.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송림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송현동에 달동네가 형성된 것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왜병은 전동 근처에 주둔하면서 이 곳 주민들을 강제로 철거시켜 송현동 산 언덕에 주거를 정해주었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 그리고 1960-70년대 산업화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살면서 수도국산에는 3천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
산동네를 옮겨다 놓은 듯한 박물관안의 골목길을 다니다보면 곳곳에 붙여 놓은 벽보들이 보인다. 그 시절의 다양한 벽보들. 지금 보면 감회가 새롭다. 이런 벽보도 있었다 한다. 내가 접하지 못한 이런 벽보를 기억하는 선배들의 감회는 어떠할까? 옛추억의 장난감들을 파는 매점이 있다. 동네만화방, 기억에 나시는지? 언니에게 어린동생을 맡기고 장사를 나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행복한 삶은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꼭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다. 6,70년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소득이 늘었다. 엄청나게 소득이 늘어난 만큼 행복해진 사람도 엄청나게 늘어났을까?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행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른들은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해서 불행하고 학생들은 끝없는 경쟁만을 강요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우울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
정부는 국민소득 3만 달러시대가 되고 우리가 선진국이 되면 국민들이 행복해질 거라며 내일을 향해서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자고 이야기 한다. 이런 이야기는 국민소득 1만달러를 목표로 할 때도 2만 달러를 목표로 할 때도 들었던 이야기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는 인내하며 살았고 근면 성실한 근로자가 되어 일했다. 하지만 지금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된 시점에서 돌아보면 물질적으로는 좀 더 풍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사는 것은 더 고단해졌다. 이런 고난의 수레바퀴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것은 행복은 절대로 물질적 풍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그 쾌속열차에서 내려 우리가 살아왔던 그 어렵던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동네 입구의 백열전등 하나 밝힌 가게와 뒤척일 공간도 부족했던 좁다란 방과 빨간 꼬마 전구가 불 밝히고 있는 화장실, 그리고 영화포스터가 붙어있는 골목길 풍경속으로.
어디선가 사람들의 목소리와 동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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