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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해

`산은(産銀) 민영화` 민유성의 꿈 물거품 되나

'산은(産銀) 민영화' 민유성의 꿈 물거품 되나
"외국은 은행 국유화…" 정부·與 태도 돌변에 좌절
"해외자원 사고 싶어도 자금확보 못해 아쉬워"
방현철 기자 banghc@chosun.com

▲ 민간 금융전문가 출신으로 작년 6월에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사령탑을 맡은 민유성 행장은“산업은행을 민영화하라”는 임무를 띠고 취임했다. 그러나 국회 산은 민영화법이 마지막 관문인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외국은 은행을 국유화하는데 민영화라니 무슨 철없는 얘기요?", "이제 민영화는 포기한 거죠?"….

지난 1월 초 민유성(閔裕聖) 산업은행장이 정부 관계자 A씨와 아침 식사를 하면서 들은 얘기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A씨뿐만이 아니었다. 야당이 아닌 정부와 여당 쪽 사람도 많았다. 첫 민간 출신 산업은행장이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작년 6월 취임한 민 행장은 우군(友軍)인 줄 알았던 정부와 여당에서부터 벽을 느끼고 좌절감을 맛보고 있다.

민 행장은 취임 당시 금융위원회 관계자에게 "3~4개월이면 산은 민영화법이 통과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왔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산은 민영화법은 국회에 머물러 있다.

지난 3일 국회는 패키지로 상정된 산은 민영화법과 정책금융공사법 중 정책금융공사법만 통과시켰다. 두 법은 서로 연결돼 있어 하나만 통과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산은이 먼저 민영화돼야 산은 자금으로 정책금융공사를 설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의 극한 싸움이 빚어낸 '기형적' 법안 처리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민영화 작업이니 적당히 해도 될 텐데 민 행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민 행장의 수첩에는 점심·저녁 약속뿐만 아니라 아침식사 약속까지 빼곡하다. 주로 일대일로 만남을 가지는데 작년 6월 취임 이후 어림잡아 200여명을 아침에 만났다고 한다.

지난달 민 행장은 야당 중진 B의원과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민 행장은 "경제 위기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산업 구조조정이 필요한데, 그 재원을 산은 민영화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에 나섰다.
민 행장의 논리는 이랬다. "산은 민영화로 산은은 민영화된 은행과 정책금융을 담당하는 공사로 분리된다. 산은의 정책금융을 떼 만드는 정책금융공사는 약 9조원의 자본금으로 세워진다. 통상 금융기관이 자본 대비 10배의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90조원의 구조조정 자금이 새로 생긴다."

IMF 외환위기 때 1차 공적자금으로 64조원이 조성된 것을 감안하면 90조원의 파괴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해운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기는 '깡통배(배값이 대출금에도 못 미치는 배)'를 사줄 선박펀드 재원도 쉽게 마련할 수 있고, 쌍용차·GM대우 등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자금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민 행장의 생각이다.

하지만 최근 민 행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어렵게 반쪽(정책금융공사법)이 통과됐는데 산은이 민영화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책금융이나 중소기업 지원은 소홀히 한다는 말이 다시 나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민 행장은 지난 4일 오전 긴급 임원회의를 열고 "역풍에 주의하라"고 주문했다.

민 행장은 1982년 씨티은행에 입사해 자딘플레밍·리먼브러더스·모건스탠리·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 등 해외 금융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 금융통이다. 2003년엔 우리금융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우리금융의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성사시켰다.

민 행장은 이런 경험을 살려 민영화 후의 산은을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금융회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작년 8월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시도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리먼브러더스에서 부실자산을 뺀 인력과 네트워크만 확보하면 한국 금융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미국 증시에서 리먼브러더스의 주가는 20달러 선이었는데 민 행장은 "장부가 부풀려 있으니 주당 6.4달러에 사겠다"는 제안을 해 리먼측이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금융위원회 등에서 외화 유출 우려로 제동을 걸어 민 행장의 아이디어는 무산됐다.

민 행장은 민영화 이전에 산은의 몸집을 가볍게 하기 위해 대우조선해양 매각도 추진했다. 그러나 지난 1월 우선협상대상자였던 한화가 인수를 포기하면서 백지화됐다. 산은이 국책은행이었기 때문에 특혜 시비를 우려해 가격을 깎아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민 행장은 산은이 펀드를 만들어 한화의 비주력 계열사 등을 사주고 그 돈으로 인수 대금을 내라는 아이디어를 냈으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민 행장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산은 민영화법은 다음 달에나 국회 통과가 예정돼 있다. 그것도 여야의 정쟁이 심해지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서다. 민 행장은 주변에 "민간에 있을 때는 수익성만 따지면 됐지만, 국책은행장이 되니 고려해야 할 팩터(요소)가 너무 많아 하루가 40시간이어도 내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 외부인사는 "민 행장 혼자 힘만 쓰고, 국회와 관료 조직의 반대로 민 행장의 구상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민 행장은 또 이번 세계경제 위기 와중에 폭락한 해외자원을 사들이고 싶어한다. KIC(한국투자공사) 등이 외환보유액 문제로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산업은행이 현지금융을 최대한 이용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산은 민영화가 안 되면 이런 계획도 힘들어진다.

입력 : 2009.03.07 02:46